43대 조지 워커 부시(George Walker Bush)와 미국 대외 정치 세계 질서 전쟁
[백악관의 주인들] 43대 조지 부시 대통령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W. 부시가 당선되면서,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아버지와 아들이 대통령을 지내는 기록이 세워졌습니다. 부시 대통령 부자는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 정권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요. 43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해 알아봅니다.
보스니아내전에의 개입으로부터 이라크전쟁까지 : 미국 대외정치의 군사화와 세계질서전쟁
1. 서론
2. 지구화와 안보개념의 변화
3. 클린턴행정부의 대외정치의 선회 : 보스니아 내전에의 개입과 코소보전쟁
4. 부시행정부의 군사적 일방주의 :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5. 결론
1. 서 론
2003년 3월 20일 새벽, 바그다드의 정적을 가른 미국 미사일의 섬광과 굉음은 21세기의 세계질서가 평화와 안정, 그리고 협력과는 동떨어진 위치에 놓여 있음을 다시금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미국은 압도적인 화력 및 군사분야혁명(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 RMA)에 기반한 최첨단 전쟁수행능력에 힘입어, 전쟁 초반에 등장한 혼선1)에도 불
구하고 결국 3주 만에 바그다드를 점령하는 군사적 승리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미국은 이로써 오늘날 군사적 측면에서 자신이 갖는 절대적 패권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온 세계에 시위한 셈이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전쟁을 놓고 등장한 미국에 대한 전 지구적 차원의 항의는 신속한 군사적 승리의 의미를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2003년 2월 15일,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전쟁에 반대하여 무려 팔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 세계 다섯 대륙의 숱한 거리들을 채웠다. 그 크기, 규모, 범위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이 최초의 자발적인 지구적 동원3)의 목표는 이라크를 점령하려는 펜타곤의 계획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그리고 전쟁의 와중에서도 반복된 이 시도는 물론 실패로 끝났지만,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대단히 중요한 변화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지구화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변화와 함께 시민사회에 있어서도 전 지구적 의사소통의 공간이 만들어졌고, 이를 토대로 등장한 지구적 시민사회는 기존 국가세계의 전유물로 알려진 전쟁의 결정권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군사적 승리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은 또한 이라크전쟁을 두고 일어난 정치적 대결이다. 이라크전쟁을 지지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몇몇 국가들, 미국에게 “새로운 유럽”으로 부상한 일련의 동유럽국가들, 그리고 상당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전부였다. 미국의 “앞마당”으로 불려지던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국가들, 그리고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여겨졌던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들 역시 전쟁에 반대했다.4) 그 결과 서유럽은 미국에게 “낡은 유럽”으로 전락하였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세계전략을 의심적인 눈초리로 바라보던 프랑스는 그렇다 치고, 오늘날 여전히 가장 많은 해외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나라인 독일에서조차 미국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연방의회 선거전이 치러지던 2002년 여름, 연방수상 슈뢰더(Gerhard Schröder)는 독일이 어떤 경우에도,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도 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슈뢰더의 대외정치적 공세는 사민․녹색연정을 소생시키는 데에 기여했지만,5) 그러나 부시행정부의 신보수주의자들을 자극하였다. 이후 독일과 미국 정치인들 사이에 오간 외교적 설전(舌戰)은 독일 법무장관이 부시의 대외정책을 히틀러의 점령정책과 비교한 데서,6) 그리고 급기야 미 국방장관 럼스펠드(Donald Rumsfeld)가 독일을 리비아와 쿠바와 동급으로 묘사하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7) 이라크전쟁은 세계를 정치적으로 분열시켰으며, 특히 냉전체제 종식 이후 등장한 미국과 서유럽의 암묵적인 긴장관계를 공공연한 갈등관계로 표출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위기 및 세계대전과 같은 파국을 방지하는 데에 그 핵심이 놓여있었다. “현명한 권력”9)으로서 미국은 자신의 경제적․군사적 우위를 동의와 협력에 기초한 다양한 제도들을 구축하는 데에 활용하였고, 세계질서의 장기적 안정을 위해 자신의 단기적 이익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요컨대 미국의 전후 헤게모니10)는 단순히 군사력의 우위에 의존
하였던 것이 아니라, 미국의 지도적 위치를 수용케 하는 경제적 양보 및 다양한 다자주의적 제도를 통해 유지되었다. 미국의 전후 헤게모니는 강제와 협박보다는 동의와 협력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강한 것이었다.11)
미국 헤게모니의 변질은 이미 1980년대 초반 레이건(Ronald Reagan) 행정부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12) 그러나 이번 이라크전쟁은 더 이상 헤게모니적이지 않은 미국 패권의 특성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즉 21세기의 세계는 동의와 다자주의적 협력에 기초한 헤게모니국가 미국이 아니라, 강제와 일방주의적 행동을 선호하는 패권국 미국을 상대해야 한다. 바로 이점에서 독일의 평화학자 하랄트 뮐러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정당해 보인다. “오늘날 세계는 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바로 미국이다.”13)
이 논문은 21세기 세계질서의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 미국의 일방주의와 대외정치의 군사화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려는 시도이다. 미국의 일방주의와 대외정치의 군사화가 특히 우려되는 것은, 이 전략이 변화된 세계의 현실에 대해 심각히 잘못된 대응이라는 점이다. 쳄필의 지적에 따르자면, 미국은 21세기의 문제들에 19세기의 시각과 논리로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14) 따라서 미국의 대외정치에 대한 무비판적 편승(bandwagoning)은 단기적인 국익확보의 차원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는, 심각한 지구적 재앙의 등장에 기여할 수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15)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우선 제2장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진행된 지구화의 관철과정이 안보개념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이는 오늘날 미국의 안보정책이 얼마만큼 시대착오적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예비적 작업이다. 제3장은 클린턴행정부가 치른 두 번의 전쟁(보스니아 내전에의 개입과 코소보전쟁)을 분석한다. 제4장은 부시행정부가 주도한 두 번의 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에 대해 논의한다. 이 논문은 이 전쟁들을 일종의 세계질서전쟁으로 해석하려 시도할 것이다.
2. 지구화와 안보개념의 변화
2001년 9월 11일의 사태는 오늘날 질적으로 변모한 안보의 성격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요컨대 세계화 또는 지구화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다면적․다차원적인 변화16)와 더불어 오늘날 특정 지역의 긴장과 갈등은 더 이상 그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지구적 차원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지구화라는 공간과 시간의 변형(“시공압축”)은 과거에 특정 국가와 지역에 한정된 문제를 오늘날 동시에 중심부의 문제로 부상시키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된 선진국을 향한 경제적 난민의 행렬이 지구화된 세계의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때때로 충격적으로―드러내고 있었다면, 9월 11일의 사태는 이와 유사한 문제를 상상을 초월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즉 이슬람 지역의 심각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문제의 표현인 이른바 이슬람근본주의의 확산은, 알제리 농촌지역 주민에 대한 학살 또는 아프가니스탄 주민에 대한 억압 등으로만 표현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미국의 심장부를 향하는 비수로도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구화의 과정이 안보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이유는, 지구화가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과정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적 균열의 확산과정이라는 데에 있다. 지구화의 심각한 긴장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전지구적인 불평등의 확산 및 사회적 균열을 동반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브라질의 커피생산 농가의 운명의 커피가격에 대한 국제금융시장의 투기에 의해 결정되는 사실만큼 지구화의 현실을 명확히 드러내는 예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이 거의 숙명적으로 받아들인 세계시장지향적 근대화노선은, 풍족과는 무관했지만 그나마 소박한 생계유지가 가능했던 전통적 생산방식을 무참히 파괴하고 있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생존하던 인도의 수많은 농어민들은 중심부로의 수출을 위해 만들어진 대규모 새우양식장에 밀려 봄베이와 캘커타 등지의 슬럼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주변부 대도시들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극단적 빈곤계층의 규모는 지구화라는 경제적 상호의존 과정이 동반한 심각한 사회적 긴장을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17)
경제적 지구화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본질적인 경쟁과정을 매개로 진행된다. 따라서 생산, 무역, 직접투자 등은 경제적․기술적 능력이 있는 특정 지역 혹은 국가들로 집중되며, 이 흐름으로부터 차단된 국가들의 빈곤은―가혹한 세계시장지향적인 근대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보다 심화되었다.18) 1970년에서 1990년 사이 세계총생산은 4조 달러에서 23조 달러로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기간 빈곤층의 숫자 역시 20% 이상 증가했다.19) 가장 빈곤한 인류의 1/5은 1960년만 하더라도 세계소득의 4%를 점유했지만, 그러나 이 비율은 1990년 1%로 줄어들었다. 반면 지구의 초특급부자 358명의 재산의 합은 인류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25억 명의 전재산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20) 이 어마어마한 전지구적인 부의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참혹한 수치를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오늘날 지구에는 매일 평균 3만 5천명의 어린이들이 홍수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재원만 있다면 충분한 예방과 치료가 가능한 질병(말라리아, 천연두, 파상풍, 천식 등)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단 이틀 동안에 전세계적으로 죽어 가는 아이들의 수는 미국이 베트남전쟁 전체를 통해 치른 인명희생(5만 8천명)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21)
이른바 새로운 위협으로 지목되는 테러와 같은 조직화된 폭력이 등장하는 사회적 배경은 위와 같은 전지구적 규모의 엄청난 불평등이다. 이는 9․11 테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모델을 지향했든, 아니면 현존사회주의적 모델을 지향했든 간에 서구로부터 차용된 근대화의 전략은 이슬람권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의도한 경제적 성공을 가져오지 못했고 오히려 사회문제들을 악화시켰다.22) 근대화의 과정은 이들 사회를 소수의 근대화의 수혜자들과 대다수의 근대화의 패배자들로 분열시킨 것이다. 광범위한 빈곤층의 대두, 높은―특히 청년층에서는 거의 극적인―실업률이 가져오는 절망감은 지켜지지 않은 근대화의 약속에 대한 배반감과 함께 반서구주의, 반민족주의, 이슬람근본주의가 확산되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요컨대 이슬람근본주의의 확산은 이슬람의 호전성 때문이 아니라, 근대화와 결부된 사회경제적 문제, 그리고 이 근대화 과정을 담당했던 부패한 정치권력의 “서구적” 민족주의에 대한 반발로부터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23)
테러와 같은 새로운 위협은 국가세계에서 출현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세계로부터 등장하는 문제이다. 지구화는 한편 사회적 균열의 심화를 통해 테러의 잠재적 가능성을 확산시키고 있고, 그리고 다른 한편 노동력의 이주 및 교통․통신수단의 급속한 발달―이는 지구화의 또 다른 측면이다―을 통해 새로운 위협의 예측할 수 없는 등장을 현실로 만들었다. 9․11 테러가 극적으로 보여주었듯이, 최첨단 무기체계로 무장한 미국의 불가침성이라는 신화를 순식간에 무너트린 것은 강대국의 핵무기나 “깡패국가”의 미사일이 아니라, 단순한 종이칼로 무장한 일련의 테러리스트들의 경악할 행동이었다. 초강대국 미국에 대한 공격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에서, 군인들이 아니라 민간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24) 지금까지 어느 국가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일을 테러집단, 즉 사회적 행위자가 시도한 것이다. 오늘날 조직화된 폭력의 위협은 더 이상 국가로부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화된 사회로부터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보(security)의 의미는 더 이상 방위(defense)라는 국가간 갈등의 차원에서 정의될 수 없다. 또한 새로운 위협에 대해 세력균형, 공포, 봉쇄 및 위협 등과 같은 전통적 국제정치의 수단은 거의 유효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오늘날 진행되는 군사적 갈등에서 국가들 사이의 충돌은 극히 예외적이며, 갈등의 대부분은 내전의 형식을 띄고 있다. 2001년에 발생한 38개의 무장투쟁을 동반한 갈등 중 유독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만이 전통적 의미의 전쟁으로 분류될 수 있다.25) 오늘날 군사적 갈등에서 국가간의 충돌은 극히 예외적이며, 갈등의 대부분이 내전의 형식을 띠고 있다. 여러 평화연구자들이 강조한 바와 같이,26) 국가세계로부터 사회세계로의 조직화된 폭력의 이행이 관철된 것이다. 즉 1960년대 이후 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눈에 띄게 줄어든 반면, 내전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27) 탈식민화의 과정과 함께 사회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고, 물질적 자원의 공정한 배분을 요구하는 민주주의적 사고가 확산되면서, 일련의 구식민지 지역이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다. 이와 함께 폭력은 국가간의 대결로부터 점차 국가 내부의 사회적 문제로 전환되었고, 지구화의 과정과 함께 국경을 넘어선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한 것이다.
오늘날 안보정책은 변화된 세계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새로운 위협은 국가세계에서가 아니라 균열된 사회세계로부터 등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전통적 대외정치의 수단이 아닌 현대적 안보정책을 통해 대응해야 할 문제이다. 현대적 안보정책은 지구화라는 변화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긴장과 갈등을, 협력을 통해,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보다 공정한 세계를 지향하면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담아내야 한다. 독일의 저명한 평화학자 쳄필은 사회세계로부터 등장한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는 시급한 안보정책의 내용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꼽고 있다. ① “평화 대 토지”의 교환에 기초한 중동지역 갈등의 신속한 해결 ② 불안정한 지역에서 민주주의적 방식의 국가형성에 대한 지원 및 제3세계에 대한 원조․개발정책 ③ 지구적 이윤의 균등한 분배 ④ 내전의 예방 및 이의 국제적․비폭력적 해결 ⑤ 모든 국가들이 참여하는 다자주의적 원칙에 기초한 세계질서의 구축 등이 바로 그것이다.28)
오늘날 안보정책은 방위능력의 강화보다는 지구적 차원에서 경제적 복지의 확대 및 정치권력에 대한 참여요구의 수용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안보정책의 탈군사화라고 지칭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의 모색은 더 이상 규범적 차원의 요구가 아니라, 지구화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위협에 대해 평화적으로, 그리고 또한 중․장기적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유일한 방안으로 보인다.
3. 클린턴행정부의 대외정치의 선회 : 보스니아내전에의 개입과 코소보전쟁
사회세계로부터 등장한 위협과 불안정에 대응하는 문제는 결코 21세기에 새롭게 제기된 과제가 아니다. 1989/90년 동구권 현존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속적 붕괴와 함께 냉전체제가 종식되었을 때, 세계는 일종의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는 것으로 보였고, 이러한 “개벽”의 분위기는 안보문제와 관련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를 규정한 냉전이라는 대립적 구도의 해체는 지구적 차원에서 안보환경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1990년 10월 바르샤바조약기구(WTO)는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고, 이는 서방측에게 더 이상 억지할 상대도 봉쇄할 적도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상황의 등장을 의미했다. 이제 잠재적인 적을 상정하고 동맹의 구축을 통해 대응하는 안보전략은 시대착오적이며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보였다. 따라서 냉전체제의 종식은 전통적인 동맹개념으로부터 탈피해 더 이상 적을 상정하지 않는 집단안보체제29)를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의미했다. 더욱이 지구화의 관철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개별국가 차원을 넘어선, 포괄적 안보개념에 입각한 협력적 안보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로 보였다.
이러한 변화에 상응해 지속적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구상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 냉전구도 해체의 진원지인 유럽에서는 안보협력 차원에서 획기적인 사건들이 1990년을 전후해 일어나고 있었다. 1989년 3월에서 1990년 11월에 이르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의 협상을 통해 나토(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안보정책 영역에서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정도의 광범위한 군축․군비통제․검증체제30)에 합의하게 된다. 과거의 적이었던 이들 동․서유럽 국가들은 1990년 11월 유럽안보협력회의의 파리회담에서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에 조인하였다. 이들은 “인권과 기본적 자유권에 기초한 민주주의,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정의를 통한 복지, 그리고 모든 국가들에게 동일한 안보”라는 기본틀에 합의했고, “민주주의의 발전이 더 이상 후퇴하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해” 상호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다.31) 그리고 이를 위해 지금까지 참여국들의 느슨한 연속회의 형식으로 진행되던 유럽안보협력회의를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라는 상시적 국제기구로 제도화하는 데에 합의하였다.
안보구상의 전환은 지구적 차원에서도 등장하였다. 냉전체제의 종식은 미․소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국제안보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기능이 마비되었던 유엔의 위상을 회복하고, 이 기구를 갈등의 예방․중재 및 평화의 유지․강제를 위한 지구적 기구로 발전시킬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의미했다. 1991년 미국의 부시(George Bush)대통령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선언하면서, 이 질서가 유엔과의 밀접한 협력 위에 기반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실제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응징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678호 결의를 통해 이루어졌다.32) 유엔이 냉전체제 종식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의 형성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리라는 기대가 당시만 해도 지배적이었다. 1991년 7월에 열린 G-7 정상회담은 다음과 같은 희망적인 내용이 담긴 공동선언문을 채택한다. “유엔 창립자들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들이 오늘날 존재한다. 강화된 유엔은 국제질서를 확립하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우리는 인권을 보호하고, 모두에게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며, 어떠한 공격도 저지하기 위해, 유엔을 보다 강력하고 효율적이며 성공적으로 만들 의무가 있다.”33)
이러한 열정적인 기대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유엔과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역할은 점차 주변화되었다. 바로 이 두 기구야말로 지구화의 과정이 야기하는 사회적 균열과 갈등을 지구적․지역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이기에, 이 주변화는 더욱 안타깝게 보인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참여함으로써 지구적 통치(global governance)의 정당성의 기반을 갖춘 유엔, 그리고 유럽-대서양 지역의 모든 국가들을 포함하는 유일한 안보제도로서 유럽안보협력기구, 이들 두 기구의 활성화에 지구화 시대에 걸 맞는 현대적 안보정책의 성패가 걸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안보정책은 일단 좌절되었고, 1994/95년 이후 국제정치는 다시 막다른 길로 들어선다.
물론 여러 학자들은 유엔과 유럽안보협력기구와 같은 집단안보체제는 구성원들 간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존재하고, 다루는 의제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효율적인 토론이 어렵고, 따라서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신속하고 체계적인 대응이 어렵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또한 이들 기구의 결의가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며 법적 구속력이 없고, 나아가 이들 기구 자체의 물리적 수단이 없기에 나토와 같은 군사동맹에 비해 효과적으로 위기․분쟁을 관리할 수 없다는 지적도 들린다. 요컨대 유엔과 유럽안보협력기구는 훌륭한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어도, 긍정적․부정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수단, 즉 “하드웨어”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34)
그러나 유엔과 유럽안보협력기구는 기본적으로 협력적 집단안보에 기초한 제도이다. 여기서 안보전략의 핵심은 무엇보다 분쟁을 사전에 제어하는 예방적 조치에 놓여 있고, 만약 분쟁이 발생한 경우 이의 확산을 막기 위한 위기관리에 놓여 있다.35) 1990년대 중반 이후 유엔과 유럽안보협력기구가 보여준 딜레마는 이들의 안보개념․구상․제도 자체에 있기보다는, 이들의 구상과 전략이 진지하게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분쟁과 갈등의 예방보다는 분쟁과 갈등에 대한 사후적 개입이 안보정책의 반복되는 모습이었다. 유엔과 유럽안보협력기구의 무력함은 이 두 기구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초강대국 미국이 이탈하면서 일정하게 강제되고 있었다. 미국의 보스니아내전에의 개입과 코소보전쟁은 이 과정을 잘 보여준다.
냉전체제 종식 이후 발칸지역에서는 구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함께 심각한 분규가 진행되고 있었다. 캘도가 “새로운 전쟁”36)의 전형적 형태로 지칭한 이 내전은 무엇보다 민간인들에 대한 극도의 잔혹함에 그 특징이 있다. 1992년 4월 이후 보스니아 지역에서 극단적인 세르비아인들의 보스니아 회교도들에 대한 공격은 “학살”과 “만행”의 상황에 근접해 갔다.37) 그러나 미국과 서구는 무려 3년 3개월 동안 이 만행에 침묵하였고,38) 그 사이 보스니아 인구의 약 10%에 달하는 20만에서 25만으로 추정되는 민간인들이 살해되었으며, 200만이 넘는 난민들이 발생하였다.39)
보스니아내전은 그 잔혹함에서 충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냉전체제 종식 이후 등장한 평화와 안보협력에 대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내전은 유엔의 안보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1992년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743호와 749호의 결의를 통해 유엔보호부대(United Nations Protection Force, UNPROFOR)의 설치 및 파견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결정은 불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1956년 유엔에서 결의된 형태의 평화유지(Peacekeeping)는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의된 평화를 지키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40) 그런데 이러한 성격의 평화유지군을 전쟁이 한창인 발칸지역에 파견했다는 자체가 역설적이었다. 전쟁의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교전권이 없는 평화유지군은 평화를 강제할 수도, 민간인에 대한 학살을 막을 수도 없었고, 그 결과 유엔의 신빙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경무기만으로 무장한 유엔보호부대의 화력은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중무기 앞에 자신을 방어하는 데도 급급해야 했다. 유엔이 설치한 보호지역은 수차례에 걸쳐 무차별적인 공격목표로 변했고, 1994년 4월 급기야 150명의 유엔보호부대원들이 세르비아계 부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는 수모의 장면이 전 세계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그러나 비극의 정점은 1995년 7월에 도달했다. 세르비아계 부대는 유엔의 보호지역인 스레브레니차와 쩨파에서 500여명의 유엔보호부대원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피난해 있던 수천 명의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41) 유엔의 안보능력은 땅으로 추락하였고, 냉전체제 종식 이후 유엔에 걸었던 기대는 실망으로 반전하였다.
1995년 8월 말, 미국과 서구는 오랜 침묵을 깨고 나토의 폭격기들을 동원해 회교도 도시들을 에워싼 세르비아계 진지들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보스니아내전은 결국 엄청난 희생을 치른 이후 데이튼 평화협정을 통해 종결되었다. 미국의 개입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42) 아마도 미국은 보스니아내전에 대한 방관이 클린턴행정부와 미국 외교정책 전반의 실패로 인식되는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힘을 시위했을 것이다. 또한 1996년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강력한 비판과 도전을 견제하기 위한 국내정치적 포석으로도 보스니아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스니아내전에서 “인도주의적 개입”은 얘기하기 어려워 보인다. 극도로 잔혹한 만행에 대한 3년 3개월 동안의 침묵과 방관, 그리고 터무니없이 무력한 군대를 전쟁의 한복판에 파견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은 인도주의와 전혀 무관한 행동이었다.
데이튼 협정이 발효되면서 이제 원래 의미의 평화유지 역할이 가능해진 1995년 12월 유엔보호부대는 결국 해체되고 만다. 보스니아에서 유엔의 임무는 나토의 국제집행부대(International Implementation Force, IFOR)에 위임되었다. 보스니아내전은 나토의 갈등해결능력을, 그리고 유엔의 무능력을 만천하에 시위한 셈이다. 그러나 유엔의 무능력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대국들 및 미국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물론 보스니아내전은 급작스럽게 일어난 사태이긴 했지만, 상황이 학살과 만행으로 치달을 때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헌장에 명시된 집단자위권을 발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합의가 어려울 경우 최소한 제2차 걸프전쟁에서와 같이 국제연합의 위임에 의해 미국과 나토가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유럽연합의 국가들이 군사적으로 나토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던 서유럽동맹(WEU)을 통해 나토의 신속한 인도주의적 개입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 보스니아내전은 1991년 나토의 “새로운 전략구상”이 명시한 전형적인 종족갈등이었고, 또한 1992년 서유럽동맹의 “페테스부르크 선언”이 강조한 인도주의적 개입에 가장 부합되는 사태였다. 그러나 이 두 기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잔혹한 인도주의적 재앙을 치른 이후에서야 나토가 사후적으로 개입하였다. 그리고 이 개입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아니라 미국이 결정하였고, 나중에 안전보장이사회에 통고되었을 뿐이다.
유엔이 아닌 나토를 통한 보스니아내전의 종식은 그렇지 않아도 땅에 추락한 유엔의 문제해결능력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엔의 주변화는 일정하게 강요되고 있었다.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들과 미국은 유엔과 같은 다자주의적 기구가 무력의 직접적인 사용권한을 갖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이 권력이 배타적으로 자신들의 손안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탈냉전 시대 유엔이 강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강대국들은 스스로 집단안보 실현의 장애물이 되었다. 유엔에 독자적인 상비군을 갖추려는 당시 사무총장 부르토스-갈리(Bourtos Bourtos-Gahli)의 계획은 강대국들의 집요한 반대에 부딪쳤으며, 결국 미국은 자국 보수정치세력들의 압력 아래 원대한 비전을 지녔던 유엔의 이 여섯 번째 사무총장을 갈아 치운다. 또한 미국의 지속적인 분담금 미납의 결과 1995년 유엔은 창립 50주년을 맞아 심각한 재정위기에 빠졌다. 유엔은 자신의 권한과 기능이 확대되어야 할 바로 그 역사적 시기에 사무국을 축소하고 기타 계획들의 예산을 줄여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2) 코소보전쟁과 유럽 안보구조의 재편
냉전체제 종식 이후 유럽의 안보체제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1990년 11월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으로 표현된 유럽안보협력회의에 대한 기대도 그것이지만, 또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붕괴로 존재이유를 상실한 나토 역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나토는 1991년 11월 로마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새로운 “동맹의 전략구상”에 합의하였다. 나토의 신구상은 과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방향들로부터 오는” 도발과 위험을 정의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중요한 자원들의 공급중단”, “테러 및 사보타지행위들”, 그리고 “종족갈등과 국경분쟁들”이 포함되고 있다.43) 한때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막으로 존재했던 나토는 이제 이론상으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위험에 간여할 수 있는 군사기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유럽연합의 국가들도 나토로부터 독자적인 안보제도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8년에 결성되었지만 냉전시기 그 존재의미를 상실했던 서유럽동맹(WEU)이 부활한다. 서유럽동맹은 향후 유럽연합의 안보조직으로 발전될 것이 전망되었고, 이는 미국이 주도해 온 안보정책에서 탈피하여 유럽연합이 독자적인 안보정체성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해석되었다. 서유럽동맹은 1992년 6월 이른바 “페터스베르크 선언”을 통해 자신의 안보구상을 드러냈다. 이 선언은 서유럽동맹의 위상을 강화하고, 나아가 동맹의 활동반경을 “역외(out of area)”로 확장할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선언은 또한 서유럽동맹의 새로운 과제로 “인도주의적 임무 및 구호목적의 출동, 평화유지적 과제, 평화를 유도하는 조치들을 포함한 위기관리를 위한 전투들”을 설정함으로써,44) 나토의 신구상에
버금가는 광범위한 개입을 지향함은 물론, 서유럽동맹이 나토로부터 독립적인 정치․군사기구로 존립할 것임을 표명했다.
물론 서유럽동맹은 나토를 대체한다는 의도를 내세우지는 않았다. 이는 당연히 미국이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서유럽동맹은 오히려 나토와의 밀접한 협력 아래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나토의 군사적 자원을 활용하는 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 자구(字句)의 의미로는 서유럽동맹의 인도주의적․평화유지적 차원의 개입이 나토의 신구상을 보충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토의 “중요한 자원들의 공급중단”에 대한 이해는 현실정치에서 얼마든지 서유럽동맹의 “인도주의적 개입”으로 포장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구상이 강조하는 “테러 및 사보타지행위들” 그리고 “종족갈등과 국경분쟁들”에 대한 개입은 “페터스베르크 선언”이 지향하는 “평화를 유도하는 조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나토와 서유럽동맹은 매우 유사한 과제의 수행을 전략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는 나토와 같은 군사동맹이 아니라, 유엔의 지역조직으로서 유럽안보협력기구가 수행하기에 보다 적합한 과제임은 물론, 국제사회가 바로 유엔에 기대하고 있는 역할이기도 하다.45)
포괄적 안보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띄었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군사적 수단에 의존한 안보정책에 익숙한 나토는 그렇다 치고,46) 그러나 유럽연합은 나토에 대한 대안으로서 유럽안보협력회의를 발전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럽연합의 회원국들보다 여전히 비회원국들이 더 많은 유럽의 현실에서 “페터스베르크 선언”이 설정하는 과제들은 서유럽동맹보다는 강화된 유럽안보협력회의의 틀에서 수행되는 것이 보다 적합해 보였다. 더욱이 1992년 프라하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회의의 각료이사회(Ministerrat)47)는 인권보호, 민주주의, 법치국가의 원칙에 대해 명백하고 심각한 침해가 일어날 경우 “필요하다면 해당국가의 동의 없이도”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이 유럽안보협력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제도적 개선을 의미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92년 7월 유럽안보협력회의 정상회담에서도, 인권의 영역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가 규정한 의무들은 모든 참여국가들의 직접적이고 당연한 관건이며, 해당국가의 배차적인 내부적 문제가 아니라는 선언을 채택하였다.48) 역사에 있어 가정은 불필요한 상상일 수 있겠지만, 만약 유고슬라비아 사태가 유럽안보협력회의의 틀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더라면, 보스니아내전도 코소보전쟁도 회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역사는 1990년대를 지구화 시대 새로운 안보정책의 시작으로 기록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서유럽동맹의 “페터스베르크 선언”은 현실정치에서 나토의 신구상과 거의 동일하게 해석되는 전략적 목표를 내세움으로써, 나토와 서유럽동맹은 일정한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그 결과 유럽의 안보구조는 ① 포괄적․협력적 집단안보체제를 지향하는 유럽안보협력기구 ② 전통적 군사동맹으로부터 포괄적 안보협력으로 변신을 시도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군사적 성격이 강하며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나토 ③ 유럽통합의 심화와 함께 그 정치․군사적 의미가 보다 격상될 서유럽동맹이 존재하는 다소 복잡한 구도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나토와 서유럽동맹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유럽안보협력기구가 주변화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예정된 수순은 1994년 여름 클린턴행정부가 나토를 동유럽으로 확장시키는 것으로 대외정책을 선회함으로써 현실이 되었다.
위의 세 안보조직들의 경쟁은 군사적 차원에서는 이미 결정이 난 승부였다. 미국은 정보기술의 우위를 바탕으로 군사분야혁명(RMA)을 주도해 왔고, 현대적 무기체계를 동원해 혼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지닌 국가이다. 반면 “페터스베르크 선언”을 주도한 독일은 재래식 차원의 전쟁에 있어서도 더 이상 독자적인 방위능력이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유럽연합 국가들 전체의 국방비 지출은―안보정책적으로 미국에 훨씬 더 근접해 있는 영국을 포함하더라도―미국의 절반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신무기 구입 및 첨단무기 개발비용을 고려한다면 격차는 훨씬 더 꺼진다.49) 그러나 국가세계의 논리인 군사적 차원이 아닌 사회세계의 논리로부터 접근한다면, 유럽연합이 승산 없는 승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경제적으로 미국과 유럽연합은 거의 대등하다. 유럽연합은 또한 경제화폐연합(WWU)의 성공적 실현을 통해 단일시장은 물론 단일화폐까지 창출하였으며, 유로는 달러에 대한 대안적 세계화폐로 자리 잡고 있다.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라는 군사적 이유에서 나토를 선호하지만, 그러나 동유럽의 사회세계는 압도적으로 유럽연합에 근접해 있다. 네오그람시안적 접근과 같이 헤게모니 개념에서 물리적 강제의 측면보다는 자발적 동의의 차원을 강조한다면, 미국과 유럽연합은 “새로운 유럽”(동유럽)에서 치열한 헤게모니 경쟁을 하고 있으며, 지구화와 결부된 교역국가의 역동성 및 지역화의 경향을 고려할 때 후자의 승리를 예측해볼 수 있다. 물론 경쟁이 아니라 협력의 측면에서 안보문제에 접근한다면, 그리고 현대적 안보정책에 상응한 안보체제를 구축하려했다면, 당연히 유럽안보협력기구가 강화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토든 서유럽동맹이든 이 기구의 지붕 아래 자기 위치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1994년 여름 나토의 동유럽으로의 확장은 위와 같은 안보체제의 경쟁상황에서 일어난 결정이었다. 그런데 집단안보체제와 달리 나토와 같은 방위동맹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강도 높은 위협의 존재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그 결과 유럽은 급작스럽게 새로운 위협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50) 유럽안보협력회의를 통한 장기간의 협력이 가져온 상호신뢰는 후퇴하였다. 이전까지 클린턴행정부가 보여주었던 “적극적 다자주의(assertive multilateralism)”는 점차 “강제적 외교(coercive diplomacy)”로 변질되어 갔다.51) 보스니아내전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결정한 배경에는 나토의 확대 및 위상강화를 결정한 미국의 전략선회가 주효했다.52)
유럽의 안보구조를 나토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미국의 전략은 코소보사태라는 분규에 개입하면서 보다 공세적인 성격을 띤다. 보스니아내전의 개입 이후 클린턴행정부는 대외정치의 수단으로서 무력을 복귀시켰으며, 최소한 세르비아와 이라크에 대해서는 협상․협력․검증보다는 일관되게 군사력 사용을 선호했다. 클린턴행정부는 비행금지구역을 강제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이라크를 폭격하였으며, 1998년 12월 이 폭격은 수일간에 걸쳐 지속되기도 했다. 독일 평화연구의 지대한 공헌자인 쳄필에 따르면, “코소보전쟁은 1999년 3월에 일어났지만, 미국과 나토는 세르비아에 대한 공격을 1997년부터, 그리고 1998년이 시작되면서 체계적으로 준비하였고, 클린턴은 1999년 1월 이미 전쟁에 동의하였다”고 한다.53)
물론 이 시기―보다 정확히 1987년54)부터―코소보에서 유고슬라비아 군대와 경찰이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해 지속적인 인권훼손과 억압을 해왔지만, 그러나 보스니아에서와 같은 일방적인 학살과 만행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또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1998년 이후 코소보해방군(KLA)과 유고경찰은 내전과 유사한 상태에 돌입하였고 서로 인명피해를 내고 있었지만, “인도주의적 재앙”으로 부를만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유고경찰이나 코소보해방군의 주장으로서만 존재했다. 그런데 1999년 1월 15일 라차크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40구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 다음날 유엔안보협력기구의 “코소보검증임무(Kosovo Verification Mission)” 단장을 맡았던 워커(William Walker)는 이 사태를 유고군대에 의한 민간인에 대한 “학살”로 규정했다. 보스니아내전에서는 미국과 서구의 방관과 무관심이 사태를 확산시켰지만, 역설적으로 코소보사태에서는 이들의 너무 많은 관심이 상황을 악화시켰는지도 모른다. 사태의 정확한 판단은 뒤로 하고 서방의 언론들은 이 “학살”을 세르비아의 범죄로 연일 크게 보도했다.55) 코소보사태의 군사적 해결에 회의적이었던 독일 외무장관 피셔(Joschka Fischer) 역시 라차크사건이 전쟁에로의 결정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고 진술한다.56)
이후 라차크사태는 핀란드의 검시전문가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조사단에 의해 다시 조사되었다. 이 조사단의 단장을 맡은 란타(Helena Ranta)는 세르비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 검시결과를 발표하면서, 라차크사태를 “인류에 대한 범죄“로 묘사했지만, 그러나 철저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의 구체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란타의 애매하고 혼돈스러운 진술은 그녀가 서방의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이 조사단에 참여했던 세 명의 검시관들(Juha Raino, Kaisa Laul, Antti Pemttilä)은 국제법의학(Forensic Science International)이라는 학술지에 한 논문을 발표한다. 그들의 주장은 “라차크에서 그 마을주민들의 한 집단이 세르비아 부대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57) 그러나 이 주장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코소보전쟁의 잔혹한 파괴―미국과 나토의 폭격기들이 세르비아에 1만5천 톤의 폭탄, 즉 인구 일인당 1.5킬로그램의 폭탄을 퍼부었다58)―가 이미 잊혀진 뒤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코소보전쟁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들이 상당히 제출된 상황59)에서 코소보전쟁의 배경․원인 및 결과를 여기서 다시 언급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아래에서는 코소보전쟁 이후 유럽 안보구조의 재편과 관련해 몇 가지 주목할 상황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코소보전쟁에서 미국의 무력시위는 누가 유럽안보체제의 주역인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코소보전쟁의 수행은 워싱턴에서 결정되고, 브뤼셀에서 승인되어, 나토의 개별국가들에 통고되는 방식을 취했다. 서로의 역할에 대한 명백한 합의 없이 세 개의 안보체제가 경쟁했던 유럽의 안보구조는 코소보전쟁을 통해 누가 우선인가가 확실히 가려졌다.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신속하고 강력한 관철능력을 지닌 나토였다. 1994년 여름, 클린턴행정부가 나토의 동유럽으로의 확장을 결정한 이래 예측되던 나토의 부상(浮上)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이 한참 진행되던 1999년 4월 24일 워싱턴에서는 나토설립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19개의 나토가맹국들은 물론, 나토와의 “친선국들”이라고 불리는 구소련에 속했던 대부분의 국가들이 참가하였다. 언젠가 나토에 가입할 수 있는 이 예비후보국들에는 러시아․중국․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포함되어 있다.60) 2000년 현재 나토의 “유럽-대서양친선위원회(EAPR)”에는 19개의 나토 회원국들 이외에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모든 동맹국들, 러시아를 포함한 구소련의 모든 후계국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2001년 부시는 바르샤바를 방문하는 기회에 나토를 흑해까지 확대하리라는 구상을 피력했다. 나토의 동진정책을 비난했던 러시아조차 2002년 5월 로마에서 “나토-러시아위원회”에 조인했다. 나토의 성공적인 확대는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주변화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 기구의 존폐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과연 나토가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 유럽안보협력기구와 같은 집단안보체제로 변신할 수 있을지는 지켜볼 문제이다. 현재로서는 부정적인 전망이 우세한데, 우선 그러한 변신에 성공하기기에 나토의 조직과 활동은 너무 군사일변도이며, 또한 부시행정부 출범 이래 극적으로 강화된 미국의 일방주의는 나토조차 미국의 행동을 제약하는 부담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2003년 이라크전쟁을 통해 미국의 의도는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이는 나토의 미래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을 암시한다.
둘째, 코소보전쟁을 통한 나토의 부상은 불가피하게 경쟁관계 있는 안보체제, 즉 서유럽동맹을 약화시킬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99년 6월 4일, 종전협상을 위해 쾰른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향후 일어날 위기들을 예방하고 처리하기 위해 나토로부터 독자적인 군사적 수단을 강구할 것임을 공표했다.61) 1999년 12월 유럽연합의 헬싱키 정상회담은 공동외교안보정책(GASP)의 실현을 위해 서유럽동맹을 유럽연합 내부로 통합시킨다. 이라크문제를 놓고 미국으로부터 여러 번 수모를 당한 “구유럽(old Europe)”의 독일․프랑스․벨기에․룩셈부르크는 2003년 4월 29일 브뤼셀에서 4자회담을 갖고 궁극적으로 유럽안보방위동맹(ESVU)의 실현을 목표로 이 네 국가간에 군사적 협력을 강화할 것을 결의한다. 4자회담은 군사적 통합을 위한 7개 항목의 카탈로그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독불여단의 토대 위에 벨기에의 지휘부대와 룩셈부르크의 정탐그룹이 첨가되는 독자적인 전투부대의 구성(이 부대의 목표는 적의 지역에 첫 번째로 진격하는 것이다), 2004년 중반까지 공동의 계획과 공동의 임무수행에 기반한 일종의 “유럽전략공군지휘부”의 창설(브뤼셀 근교의 테르부렌으로 기지가 확정되었다), 공동의 핵생화학(ABC) 방어능력, 공동의 장교양성 등이 포함되어 있다. 4자회담은 “사령부”라는 단어를 회피했지만, 카탈로그의 내용들은 그 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62) 1999년 헬싱키에서 결정된 신속대응군이 회원국들이 갹출로 구성될 일종의 모자이크식의 부대에 불과했다면, 이번 4자회담의 결의는 공동의 군대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유럽연합 군사협력의 새로운 도약에 비유될 수 있으며, 영국의 반대,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은 이미 화폐통합에서도 두 가지 속도(선행그룹과 후발그룹)를 경험한 적이 있으며, 유럽안보방위동맹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로를 거칠 것으로 보인다. 4자회담은 이 군사통합이 미국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지만, 유럽의 독자적인 안보정책을 향한 초석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코소보전쟁에서의 미국의 무력시위, 그리고 이라크전쟁에서의 미국의 일방주의는 역설적으로 유럽연합의 군사적 통합을 가속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유럽연합의 군사적 통합이 미국에 대한 경쟁에 자족할지, 아니면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 불행한 현실에서 평화를 향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셋째, 코소보전쟁은 다시금 유엔과 유럽안보협력기구를 주변화시켰다. 코소보전쟁은 무력사용 금지에 관한 유엔헌장 제2조 4항을 위배했으며, 1945년 이후 최소한 규범적으로 존재했던 전쟁방지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깨뜨렸다. 그런데 유엔헌장의 공동화는 심각한 세계질서적 문제를 야기한다. 특정 국가와 동맹이 자의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장한다면, “정당한” 전쟁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으며, 세계질서는 국제법 이전의 힘의 논리로 복귀할 것이다.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위신 역시 실추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예방적 조치에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8년 10월 미국의 유고특사 홀부르크(Richard Holbrooke)와 밀로세비치의 협약이 진지하게 실행되었던들 전쟁은 충분히 회피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협약에서 유고는 코소보해방군의 무장을 해제하는 조건 아래 코소보에서 일부 병력의 철수를 약속했고, 유럽안보협력기구의 평화감시단에게 정전상태의 감독을 위임하기로 합의했다. 코소보와 보스니아의 상황은 사뭇 달랐고, 보스니아내전에서 유엔보호부대가 당한 수모가 유럽안보협력기구의 평화감시단에게 우려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미국과 나토가 전쟁준비를 거의 마친 상황에서, 그리고 스스로를 구속하는 최후통첩을 여러 번 반복한 상황에서, 이 정치적인 중재노력에 기회가 주어질 수 없었다. 예방적 조치를 통한 분쟁해결이라는 유럽안보협력기구의 구상은 다시금 무력화되었던 것이다.
4. 부시행정부의 군사적 일방주의: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
클린턴행정부 아래서 치러진 두 번의 전쟁을 통해 유엔과 유럽안보협력회의는 주변화되었고, 나토가 유럽안보체제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그런데 어쨌든 이 두 전쟁은 인도주의적 재앙의 상황에서 인권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당사자가 전쟁을 정당화하는 명분은 어떤 경우에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평화운동의 오랜 경고는 이 두 전쟁에도 해당된다. 앞에서 살폈듯이, 발칸지역에서 인권은 방기되었으며, 인도주의적 재앙은 미국의 세계질서구상을 관철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보스니아내전에의 개입과 코소보전쟁은 새로운 형태의 세계질서전쟁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린턴행정부는 이후 부시행정부와 달리 전쟁의 명분을 보다 강조하였고, 또한 동맹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다.
새로운 대통령 부시(George W. Bush)는 논쟁적인 당선을 통해 드러난 취약한 국내정치적 지지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취임 초기부터 대단히 적극적인 대외정치적 공세를 벌인다. 그러나 이 공세는 우방과 동맹에게조차 심히 우려스러운 사태의 돌출로 인식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2001년 부시행정부는 기후변화에 대한 교토의정서에의 참여를 철회하였고, 소형무기의 불법거래를 제한하려는 유엔의 노력을 방해하였다. 또한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국제형사재판소에 미국이 협력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인권과 세계주의적 법을 실현하려는 중대한 시도가 초강대국의 참여 없이 출발하게 되었다.63) 2002년 부시행정부는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을 위해 탄도미사일방어제한협정(ABM Treaty)에서 탈퇴하였다. 2002년 3월 언론에 보도된 미국의 핵전략검토(NPR)는 핵보유국인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 비핵국가인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북한 등 7개 국가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공식화했으며, 또한 벙커파괴를 위한 소형 전술핵무기의 개발을 위해 이미 예산이 확정된 상태이다.
또한 9․11 테러64)라는 지구화된―그러나 균열된―사회세계로부터 등장한 극적인 사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행정부의 안보정책은 군사적 수단에 전적으로 의존한 전통적 안보구상으로 복귀하고 있다. 9․11 테러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원인을 완화시키는 정책들을 모색하기는커녕, 부시행정부는 온 세계에 “우리 편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이라는 마니교적인 선택의 강요로 일관했다. 문제는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테러에 대한 차별화된 분석은 물론 이를 차단하는 어떠한 효과적인 전략도 등장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부시행정부는 미국의 내부에서 19명의 민간인들이 민항기를 납치해 저지른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가공할 공격을, 테러리스트에 의한 외부로부터의 위협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이 테러는 국가들에 의해 지원되는 국가세계의 문제로 채색되었으며,65) 2001년 9월 20일 부시의 연설은 테러조직들이 존재하는 약 60여개의 국가들을 미국이 잠재적인 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내비쳤다.66)
2001년 10월 8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적 공격의 시작은 테러조직과 이를 지원하는 “국가들을 끝장내겠다(ending states)”는 펜타곤 수뇌부의 발언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시위하였다. 오히려 이 발언은 나중에 점차 드러나듯이 21세기에 미국이 수행하려는 전쟁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파시즘과 20세기 후반의 공산주의가 그랬듯이, 테러조직과 이를 지원하는 국가들은 21세기에 미국이 상대할 주적으로 부상하였다. 새로운 가상적(Feindbild)을 발견함으로써 9․11 테러를 통해 미국이 당했던 엄청난 정신적 충격은 치유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러나 테러조직과 국가를 결합시키는 사고는 테러가 등장한 원인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테러의 사회적 원인과 배경은 외면한 채, 테러조직이 활동하는 국가들을 ”끝장냄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부시행정부의 발상인데,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이 테러를 완화하기는커녕 훨씬 악화시키고 있음은 지난 수년간 이스라엘 군대의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에서의 경험이 익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탈리반(Taliban)정권의 주요 인물들과 빈 라덴(Osama Bin Laden) 사이에 밀접한 가족적․정치적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많은 테러리스트들이 아프가니스탄에 은둔해 있는 것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탈리반정권이 테러리스트의 산물은 아니었다. 탈리반의 부상에는 탈리반의 “전사”들을 인도와의 카시미르분쟁에서 활용하려는 파키스탄 정보부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67) 즉 탈리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용병인 빈 라덴보다는 파키스탄의 회교정권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68) 그러나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전쟁의 수행을 위해 파키스탄의 핵실험 이후 이 나라에 부과된 무역봉쇄를 해제하였고, 9․11 테러 이후 미국 쪽으로 선회한 무자라프(Pervez Musharraf) 정권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미국의 대응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적 동맹을 맺는 전형적인 국가세계의 논리, 즉 전통적인 안보정책으로부터 한발자국도 벗어난 것이 아니다. 만약 궁극적인 테러리즘의 완화가 문제되었다면 미국은 무엇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파기스탄의 정권이 교체될 수 있도록 이들 사회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했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전쟁을 통해 빈 라덴을 잡지도, 또한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가져오지도 못했지만, 그러나 중앙아시아에 대단히 중요한 군사적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에 성공한다. 2002년 2월, 삼천여명의 인력과 수십 대의 군용기를 배치할 수 있는 규모의 공군기지가 키르기즈스탄에 건설되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계기로 삼천여명의 미군이 우즈베키스탄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과도 공군기지 사용을 위한 군사적 협상을 진행했다.69) 미국은 중앙아시아 지역에 매장된 풍부한 석유와 가스 자원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통제에 한걸음 더 다가선 것이다.70)
테러조직과 이를 지원하는 국가들을 “끝장내겠다(ending states)”는 펜타곤의 21세기 세계질서 구상은 2002년 1월 부시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에서 보다 확실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부시대통령은 공통점이 거의 없는 국가들인 이라크, 이란, 북한을 한데 묶어 “악의 축”71)으로 지목하면서,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무력사용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 연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 한데, 우선 “악의 축”으로 지목된 국가들이 테러와는 거의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테러활동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이란 역시 오히려 카타미(Mohammed Khatami) 정권의 지속적인 개혁노력이 국제적 관심을 끌고 있다. 따라서 부시행정부가 이라크를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은 속이 뻔히 드러나는 계산이었다. 다른 한편 “악의 축”에 대한 무력사용의 언급은 이후 “부시독트린”으로 알려진 안보전략의 핵심적 내용인 “예방적 전쟁”을 암시하고 있다.
오늘날 부시행정부의 수뇌부를 구성하는 신보수주의자들은 이미 클린턴행정부 시절부터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요구해 왔으며,72) 부시행정부 초기부터 후세인정권의 전복은 미국의 중요한 대외정책 목표들 중의 하나였다. 여러 분석들이 지적하고 있는 정황에 미루어 부시행정부는 이미 9․11 테러 직후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73) 물론 후세인이 폭악한 독재자인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이 사실이 한 주권국가를 공격할 명분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라크에서 과거 보스니아에서처럼 인도주의적 재앙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라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명분을 만들어내야 했는데, 부시행정부로선 이 작업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라크전쟁의 명분이 수차례 바뀐 사실은 부시행정부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9․11 테러 직후 미국은 이라크가 국제 테러리즘, 특히 빈 라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최첨단 정보수집체계에 매년 300억 달러라는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 있는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그러나 이와 관련된 하등의 신빙성 있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전쟁의 명분은 이라크가 주변국가들에 대한 위협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10년 동안의 무역봉쇄의 결과 극도로 쇠진한 이라크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어떻게 중동지역의 위협이 될 수 있는지는 부시행정부만이 아는 비밀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역시 별 설득력 있는 명분으로 보이지 않자 후세인 정권의 독재와 폭악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어이없게도 후세인은 종종 히틀러와 비교되었다. 수백만 명을 체계적으로 학살한 히틀러의 만행과 후세인의 범죄를 동급에 놓는 것은 역사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에게나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2002년 1월 부시행정부는 결국 “악의 축”을 찾아내었고,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이라는 새로운 전쟁명분을 내걸었다.74)
잘 알려져 있듯이 유엔의 무기사찰단은 전쟁 시작 이전 수개월 동안 후세인의 대통령궁을 포함한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우려했던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하지 못했다.75) 더욱이 유엔 무기사찰단단장 블릭스(Hans Blix)가 지적했듯이, 사찰에 대한 이라크의 협조는 고무적인 방향으로 돌아섰었으며, 사찰의 연장을 통해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라크의 무장해제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었다. 즉 사찰과 검증을 통해 대량살상무기―만약 그것이 이라크에 존재했다면―의 폐기가 가능한 역사적 순간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상황에서 미국이 전쟁을 시작한 것은 전쟁의 목표가 전쟁의 마지막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위험과는 무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온 세계의 비난을 무릎 쓰고 전쟁을 통해 후세인정권을 전복시키려 하는가?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이 주목되어야 한다.
첫째, 미국의 석유자원에 대한 이해관계이다. 이 이해관계가 지정학적으로 정의되든76) 아니면 문명론적으로 포장되든 간에,77) 오늘날 미국인들의 석유소비는 유감스럽게도 심각한 마약중독자의 마약소비에 비유될 수 있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이려는 교토의정서에 미국이 반대하는 이유도 미국의 석유소비방식에 그 일차적 원인이 있다. 헤로인을 얻기 위해 공격적 행동을 취하는 마약중독자처럼, 미국은 저렴한 석유자원의 지속적 확보를 위해 대단히 공세적인 지정학적 전략을 취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군사기지를 건설한 것도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78) 특히 이라크는 개발되지 않은 압도적인 석유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나라일 뿐만 아니라―연간 석유산출량 대 전체 매장량의 비율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에서 1:50, 쿠웨이트에서 1:115인 반면 이라크에서는 무려 1:500에 이른다―, 지표면에 근접한 유정 덕택에 가장 저렴한 채굴비용이 드는 곳이기도 하다.79)
둘째, 전쟁을 통한 후세인 정권의 교체는 9․11 사태 이후 미국의 새로운 대(對)중동정책의 핵심을 구성한다. 주지하듯이 미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점령정책―유엔에서 이미 수차례 국제법을 위반한 범죄로 규정된 바 있는―을 지지해왔고, 이는 아랍인들의 미국에 대한 적개감이 고취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그 결과 중동지역에서 미국은 동의에 기초한 헤게모니는커녕 심각한 반미 분위기에 직면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충복 역할을 수행한 것은 무엇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패한 왕조였는데, 문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더 이상 신뢰할만한 파트너로 비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마도 북한만큼 강력하게 미국의 문화적 침투에 저항하는 나라이며, 또한 전투적인 이슬람주의(와하비즘)를 세계에 수출하고 있는 나라이다. 빈 라덴만이 사우디의 용병이 아니라, 9․11 사태에 연루된 대부분의 테러리스트들 역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다는 점 역시 미국에게는 불안스러운 점이다. 더욱이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점차적인 반대로 인해 그곳의 미군 공군기지를 카타르로 옮겨야 했다. 따라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지축의 확보는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시대적 과제로 부상했다.80)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석유매장량 때문에 눈독을 들여온 이라크가 “영순위”로 부상할 것은 이미 예정된 사실이었다. 요컨대 미국은 이라크 국민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는 후세인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키고, 어느 정도 대중의 지지를 받는 친미적 정권을 수립한 뒤, 기존 사우디아라비아를 대체할 수 있는 영향력의 축을 중동에서 구축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부시행정부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얘기하는 이라크 “민주화”의 내용이며, 이번 전쟁의 핵심적 목표이기도 하다.
5. 결 론
클린턴행정부가 치른 두 번의 전쟁은 다자주의적 제도와 틀에 구애받지 않고 미국의 독자적인 활동영역의 폭을 넓히려는 목표를 가진 세계질서전쟁이었다. 미국의 보스니아내전의 개입은 냉전체제 종식이후 유엔에 걸었던 기대가 무참히 무너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코소보전쟁에서는 유럽안보협력기구와 특히 서유럽동맹을 주변화하고, 나토를 유럽안보질서의 중심으로 부상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두 전쟁에서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분을 강하게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구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코소보전쟁에서 미국과 서유럽의 긴장은 눈에 띄게 드러났지만,81) 클린턴정부는 전통적 우방과의 충돌을 가능한 회피하였다. 코소보전쟁은 나토의 이름으로 치러졌고, 군사적 임무는 대부분 미국이 수행했지만, 그러나 나토의 회원국들의 형식적 재가를 거쳤다.
부시행정부가 치른 두 번의 전쟁은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를 무력을 통해 제압해서라도 미국의 이해에 상응한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목표를 드러낸 세계질서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마샬 플랜 등의 경제적 지원, 그리고 미국식 생활방식(American way of life) 등 미국식 사회발전모델의 매력에 기반해 등장한 반면, 21세기 부시 행정부가 구상하는 팍스 아메리카는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은 이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켰다. 이 두 전쟁은 설득력 있는 명분을 내세우기 어려운 전쟁이었고,82) 따라서 전쟁의 배후에 놓인 미국의 이해가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또한 미국은 이 두 전쟁에서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의 참여를 배제하였다. 아프가니스탄전쟁은 나토의 협조 제안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 영국군이 포함되었을 뿐 전적으로 미군이 혼자 치렀다. 이라크전쟁 역시 미군의 독자적 전쟁수행에 영국군이 보조하는 형식이었다. 미국이 나토를 배제한 것은 당연히 전후 질서의 구축을 염두에 둔 것임은 물론이다. 중요한 석유자원이 존재하는 중앙아시아와 이라크지역의 미래를 다자주의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전쟁을 통해 미국의 이해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이상 부시행정부에게 불필요한 요식행위였을 것이다.
미국의 21세기 세계질서 구상은 그러나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미국의 전략은 오늘날 변화된 세계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너무 전통적이다. 자국의 이해에 따른 미국의 선택적 동맹관계는 19세기 유럽회의(Concert of Europe)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국가가 대외정치를 독점했던 19세기에 이러한 전략은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이미 다양한 비정부단체가 국제정치의 주체83)로 부상한 21세기에 이런 식의 접근은 시대착오일 뿐이다. 요컨대 사회세계로부터 등장하는 문제를 국가세계의 논리로 대응하는 것은, 군사적 무력과 억압을 통해 단기적인 미봉책을 가져올지언정 결코 중․장기적인 문제해결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 더욱이 오늘날 군사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전지구적 문제들―난민문제, 환경문제, 전지구적 불평등문제 등등―을 고려할 때, 미국 대외정치의 군사화는 심히 퇴행적인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효과적인 테러와의 싸움 역시 장기적으로는 테러가 등장하는 사회적 균열을 완화하는 것이지만, 단기적으로도 테러집단의 재정원천을 고갈시키는 작업, 첨단감시체계에 대한 일방적 의존보다는 비밀요원을 통한 정보수집, 테러집단의 검거에 있어 민간인들의 협력확보 등에 놓여 있다.84) 테러집단에 의한 대량살상무기의 획득가능성을 과장하며 군사적 수단에만 의존하는 것은 테러에 대한 단기적 대책으로서도 효과가 없어 보인다. 미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테러행위는 부시행정부의 대테러정책의 실패를 반증하고 있다.
둘째, 강대국의 이해와 전략 때문에 전쟁이 허용된다면 21세기의 세계질서는 유엔과 국제법 이전 시기의 “힘의 논리”로 후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이 아무리 지난한 것이었을지라도 인류의 역사는 “권력이 강한 자” 또는 “힘 센 자”의 자의적 지배를 제한하려 노력해온 과정이었고, 사회적 합의와 법에 기초해 권력을 통제하는 것을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정착시켰고 또한 현재도 정착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보다 더디기는 했지만 국제관계에서도 일어났으며, 유엔과 국제법은 그 변화의 소중한 결과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유엔을 무력화하는 미국의 전략은 21세기 세계질서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 것이 유감스러운 현실이라면 무력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포기될 수 없다. 즉 “정당한” 전쟁은 지구적 평화가 현실이 될 때까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보스니아내전과 같은 학살과 만행은―물론 예방적 조치가 선행되어야겠지만 이에 실패할 경우―유엔의 이름 아래 신속히 제압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정의를 미국이 독점한다면 “정당한” 전쟁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음은 물론이다. 다른 국가들 역시 미국을 흉내 내 자국의 이해를 전쟁을 통해 관철하려 한다면 도대체 누가 이를 비난하고 제재할 것인가? 부시행정부의 21세기 구상은 지난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쌓은 인류의 평화에 대한 합의에 심각한 위협으로 등장했다. 부시행정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미국 내부의 사회적 힘이겠지만, 그러나 힘의 논리에 무조건 편승하지 않고 평화와 협력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21세기 세계 전체에 부여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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