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베일에 싸인 지킬 섬 

    - 미연방준비은행의 발원지


2. 월가의 7인

    - 연방준비은행의 막후추진자


3. 미연방준비은행 설립의 전초전

    - 1907 금융위기


4. 금본위제에서 법정화폐로

    - 은행재벌 세계관의 전환


5. 1912년의 대선 열풍


6. B프로젝트


7. 금융재벌들의 꿈이 이루어지다

미국의 중앙은행.

구분 은행

설립연도 1913년

소재지 미국

설립목적 중앙은행의 역할 필요성

주요업무 금융기관 통제 및 지원



8. 연방준비은행의 주인은 


9. 연방준비은행 초대 이사회


10. 베일에 싸인 연방자문위원회


11. 진상은 어디에

미국 정부의 재무 대리기관이며 미국 내 상업은행의 준비금을 관리하고 상업은행들에 대부를 공여하며 미국 내에 통용되는 지폐 발권은행이다. 1913년 발효된 연방준비은행법에 의해 창설된 이 은행은 이사회, 12개 산하 연방준비은행,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연방자문회의 등으로 구성되며 1976년에는 소비자자문회의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수천 개의 은행이 회원 은행으로 되어 있다. 


연방’도 없고, ‘준비금’도 없으며, ‘은행’이라고 할 수도 없다.

시대정신1 (Zeitgeist I Addendum,2007)


“커튼 뒤의 사람들”
1. 베일에 싸인 지킬 섬 : 미연방준비은행의 발원지

조지아 주 지킬 섬은 미국의 백만장자들이 겨울처 휴양지로 즐겨찾는 곳이다. J. P. 모건을 위하한 경제계 거물들이 지킬 섬에 사냥 클럽을 세웠는데, 지구상 6분의 1의 부가 이 클럽 회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다. 1910년 11월 22일 조지아 주의 이 지킬 섬에서‘연방준비은행법’의 초안 작성을 위한 비밀회합이 이루어 졌다.
▲ J.P 모건과 지킬 섬의 건물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이 도금시대의 나쁜 마녀들이었다면, 가장 웅장한 계획을 뚝딱 만들어낸 마녀 잔치는 지킬섬에서 만들어졌다. 조지아의 앞바다에 있는 J. P. 모건 소유의 땅이었다. 잔치는 1910년 로드 아일랜드의 넬슨 올드리치(Nelson Aldrich) 상원의원이 주최했다. 그는 모건 사업의 동반자이자 존 D.(2세) 록펠러의 장인이었다.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인 올드리치는 월스트리트의 상원의원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대기업과 은행의 대변자였다. 올드리치가 모임을 주최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자리를 마련한 사람은 폴 워버그(Paul Warburg)라는 독일계 이민자였다. 그는 로스차일드가 남북 전쟁 이후 미국내의 주요 금융업체로 삼고 있던 쿤ㆍ로브의 공동경영자였다.”

   <출처: 달러(사악한 화폐의 탄생과 금융 몰락의 진실), 엘렌 H. 브라운>
지킬섬 비밀회합의 주요 참석자
ㆍ연방준비시스템 : 중앙은행이라는 명칭을 위장
    - 잉글랜드은행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보유한 주식으로 구성
    - 주식 가운데 20%를 정부 지분으로 차지하던 기존 은행과 달리 순수 민영 중앙은행 
ㆍ의회가 미연방준비은행을 통제하고, 정부는 이사회 대표 자격을 가진다. 그러나 이사회의 구성원은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다.
    - 이사회의 진정한 기능은 ‘연방자문위원회’가 관장하며, 연방자문위원회의 구성원은 연방준비은행의 이사 12명이 결정하는데, 이 점은 의식적으로 대중에게 알리지 않았다. 
ㆍ12개의 연방 준비은행 지점으로 전체 시스템 구성
    - 뉴욕 은행재벌에 대한 대중의 반감 축소 및 지역 의원들의 지지 유도
    - 모든 지역은행의 이사는 의회에서 간여하지 않고 대통령이 임명(올드리치 주장)
        헌법 제 1장 제 8절에 의회가 화폐의 발행과 관리를 담당하는 규정에 의해 허점 노출

“이 법안은 미국 헌법의 분권과 상호견제를 시험한다는 명목으로 출현하였으며,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가 심의하며 독립 인사를 이사로 임명하고 은행가가 고문이 되는 설계”
2. 월가의 7인 : 연방준비은행의 막후 추진자

월가의 7인은 미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한 진정한 막후 조정자들이다. 그들 상호관에 협력과 유럽 로스차일드 가문의 은밀한 도움으로 마침내 미국판 잉글랜드은행이 세워진 것이다.
1) 새롭게 떠오르는 모건가

조지 피바디는 원래 미국 볼티모에서 건제품을 취급하는 영국의 조지 피바디 주식회사(George peabody and Company)를 설립한 상인이었다. 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1835년 영국 런던으로 진출하였다. 금융업이 유망하다고 판단한 피바디는 그 곳에서 일부 상인들과 머천트뱅크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고객은 주로 정부나 대기업과 부자들로 국제 무역 대출을 제공하고, 주식과 채권을 발행하며, 대형 상품을 취급했다.(투자 은행의 전신).
피바디는 볼티모어의 브라운브라더스앤드컴패니(Brown Brothers & co.)의 영국 지사를 통해 영국 금융계에 쉽게 진출했고, 뜻밖에도 네이선 로스차일드과 인연을 맺게되어 로스차일드 가문의 비밀 홍보 대리인이 되었다. 
이 후 비바디의 회사는 순식간에 런던에서 유명한 사교의 중심이 되었으며 1854년 100만 파운드급 은행가에 불과 하였으나 6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2,000만 파운드를 벌어들어 미국의 중량급 은행가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책동한 1857년의 경제위기 가운데 미국 철도 채권과 정부 채권에 대규모로 투자하여 큰 손실을 보아 파산 직전에 있었으나 잉글랜드은행이 80만 파운드의 신용대출을 긴급 제공해 기적적으로 소생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매우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다 모든 재산을 털어 당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던 미국의 국채들을 사들였다. 1857년의 경제위기는 1837년과 같이 10년을 끌던 불황과 달리 1년 만에 불황을 탈출하였고, 결과적으로 피바디 수중의 미국 채권들은 그를 슈퍼급  부호로 빠르게 변신시켜 주었다. (네이선의 영국채권을 사들이던 1815년 상황과 유사)
슬하에 자식이 없던 피바디는 젊은 주니어스 모건(Junius Morgan)을 영입했고, 피바디가 일선에 물러나자 회사의 이름을 주니어서 S. 모건 사로 바꾸었고 런던에서 경영을 했다. 나중에 주니어스의 아들 J. P. 모건이 회사를 물려받은 후 미국 지사의 이름을 JP모건이라고 지었다.
1869년 J. P. 모건과 드렉셀은 런던에서 로스차일드 가문과 만났고, 모건 가는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1880년, JP모건은 철도공사의 구조조정을 위한 비즈니스 활동에 대량의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891년 2월 5일, 로스차일드 가문과 영국의 다른 은행가들이 모여 비밀 조직인 ‘원착회의그룹’을 섭립했고, 미국에도 이에 상응하는 조직인 원탁회의그룹을 만들었다. 이때 앞장선 장본인이 모건 가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의 원탁회의그룹은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 CFR)’으로 개명하였고, 영국은 ‘왕립국제문제연구소(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RIIA)’로 개명하였다. 영국과 미국 양국 정부의 주요 관리들은 대부분 이 두 협회에서 배출하였다.
1899년, J. P. 모건과 드렉셀은 영국 런던으로 가서 국제 금융재벌들의 회의에 참석을 했다. 이 회의에서 모건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쪽 수석 대리인으로 선출되었다. 런던회의 결과 뉴욕의 모건, 필라델피아의 드렉셀, 런던의 모건 그렌펠, 파리의 모건아르제앤드컴파니, 독일과 미국의 와버그가 로스차일드 가문과 완전히 연계를 맺게 되었다.
1901년, J. P. 모건이 5억 달러라는 높은 가격에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시가 10억 달라가 넘는 초대형의 미국 철강회사(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가 세워졌다. J. P. 모건은 당시 세계의 최고의 갑부로 알려졌으나 임시전국경제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자기 회사 주식 가운데 9%의 지문만 보유했다고 한다.
■ U. S. 철강 ( 출처 : 주간한국, 2007년 5월 17일 )
은행가 J.P. 모건과 기업가 엘버트 H. 게리는 1898년에 함께 페더럴 철강 회사를 설립했다. 이 두 사람의 목표는 업계 전체를 자신들의 손 안에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곧바로 수많은 회사를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는 카네기의 회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수 금액은 무려 4억 9,200만 달러였다.) 그런 뒤 아메리칸 스틸&와이어, 아메리칸 틴 플레이트, 내셔널 튜브 같은 회사들이 속속 이들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수많은 기업이 혼효된 거대한 집합체는 1901년 U.S. 철강으로 통합되었다. 자본 가치가 14억 달러에 이르는 이 회사는 그때까지 역사상 최대의 기업이었다. 게리가 이 회사의 초대 회장이 되었는데, 회사의 제1공장이 들어선 인디애나 주의 한 도시는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게리 시로 불리게 되었다.
■ 미국외교협회, 삼각위원회, 빌더버그 클럽

세계를 지배하는 엘리트 집단은 크게 빌더버그 클럽, 미국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CFR),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TC)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단체들은 같은 사람들이 중복해서 가입되어 있고, 비슷한 목적을 추구한다. 미국의 경우, 빌더버그 클럽과 CFR, TC가 미국 양당 출신의 대통령 후보 전원과 미 상하원 의원 대다수, 정치권 주요 요직(특히 외교 분야), 대다수 언론, CIA 및 FBI, IRS(국세청) 전원, 기타 워싱턴의 정부 조직 대다수 구성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를 필두로 한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모두 빌더버그 클럽 회원이었다. 토니 블레어, 리오넬 조스팽, 앨런 그린스펀,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 부부, 헨리 키신저, 로스차일드가(家), 조지 소로스, 유럽 각국의 왕실, 세계 굴지의 언론 재벌들 역시 회의에 참석한다.
국제적으로 빌더버그 클럽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미국외교협회(CFR)에는 미국의 권력 엘리트 3천 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미국 정부에 대한 CFR의 영향력은 매우 크지만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평범한 미국 시민은 그리 많지 않다. 백악관 실무진 대다수는 CFR 회원들이 점령하고 있다. CFR 위원장은 데이비드 록펠러다. 미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민주당원이건 공화당원이건, 보수주의자건 자유주의자건 간에 , CFR의 권능과 목표는 변함없이 지속된다. 
삼각위원회(TC)의 설립자이자 주요 후원자는 록펠러 가문에서 관장하는 체이스 맨해튼 은행의 회장직을 오랫동안 역임해 온 세계적 금융가 데이비드 록펠러다. 유럽 그룹은 현재 회원만 150명에 이른다. 미국 그룹의 상한선은 110명으로, 캐나다에 10석, 멕시코에 10석, 나머지 85석은 미국이다. 2000년에는 85명 정원의 일본 그룹이 일본 회원 75명, 한국 회원 11명,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회원 7명, 동남아시아연합 5개국 회원 15명 등 총 117명으로 이루어진 아시아태평양 그룹을 구성했다. 2004년 TC에는 미국의 전직 대통령 8명과 CIA 전직 국장 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TC 회원들은 하나같이 정치계, 경제계의 유력 인사들이다. 
( 출처: 빌더버그 클럽-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다니엘 에스툴린 )
뉴욕의 제이피 모건과 모건 스탠리, 런던의 모건 그렌펠 등 3개 회사를 아우르는 ‘모건 하우스’의 역사는 은행가 집안인 모건가의 4대에 걸친 역사인 동시에 20세기 금융의 역사다. 금융 외의 철도, 철강, 통신, 영화 등 미국의 핵심 기간산업 부문에서도 독점적 지위를 행사해온 실물경제계의 막후실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막후에서 백악관을 비롯해 국제경제기구를 주물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이상 ‘모건 하우스’는 없다. 150여년 동안 세계금융을 좌우해온 이 금융제국은 2000년 해체돼 다른 은행에 합병됐다. 지주회사인 제이피 모건은 소매금융 전문인 체이스 맨해튼에, 모건 스탠리는 일반 투자자를 상대하는 증권사 딘 위터에, 런던의 모건 그렌펠은 도이체방크에 흡수돼 사라졌다. 
모건 하우스를 대표하는 인물 ‘제이피 모건’은 사실 존 피어폰트 모건 1세(1837~1913)과 2세(1867~1943)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은 100년 가까이 구분없이 제이피 모건이라 불렸다. 대머리에 꽈리코, 배처럼 생긴 얼굴 등 비슷한 생김새다. 그들의 말이 우량 채권이고, 악수는 신뢰의 상징이었다는 점이나 기업을 적대적으로 합병하고 여러 전쟁에서 주머니를 불린 점에서도 흡사하다. 
모건 하우스는 조지 피바디의 런던사무실에서 기원한다. 피바디는 미국 주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중개해 떼돈을 벌었다. 제이피 모건 1세의 아버지 주니어스는 후계자를 찾던 피바디를 만나 1854년 동업자가 되었다. 피바디가 10년뒤 약속과 달리 자본금을 빼고 철수하면서 홀로섰다. 주니어스는 보불전쟁에서 패색이 짙은 프랑스에 베팅하면서 150만파운드를 벌어 일류은행가로 뛰어올랐다. 
피어폰트는 아버지의 회사의 뉴욕 에이전트로 유럽의 증권을 판매 배급하면서 30여년동안 잔뼈가 굵었다. 그는 남북전쟁 동안 낡은 카빈 소통 5천정을 한정에 3.5달러에 사 약간의 손을 본 다음 석달 뒤 22달러에 파는 거래에서 뒷돈을 댔다. 그는 게티스버그 전투 이후 영장을 받았지만 당시 여느 부자들처럼 300달러를 주고 사람을 사서 대신 보냈다. 금을 매집해 가격을 끌어올리는 수법으로 16만달러를 순식간에 벌기도 했다. 모건가 집안은 정치와 경제 사이에 있는 회색지대에서 비즈니스를 했던 것. 목적을 위해서는 기꺼이 손을 더럽혔다. 철도분쟁을 해결하면서 합병된 회사에 자신을 이사로 등재해 미국 은행가들이 기업의 이사회에 진입하는 관계금융의 효시를 이뤘다.
1871년 피어폰트는 드렉셀아르제 앤드 컴퍼니와 동업해 드렉셀모건은행을 설립했다. 드렉셀 2세가 철수하면서 ‘제이피 모건’이 된다. 이 은행은 1873년 월가와 브로드가가 만나는 모퉁이로 이사하는데 이 자리는 ‘더 코너’라 불리면서 미 금융시장의 명소로 떠오른다. 같은 해 검은 목요일로 기록되는 9월18일 제이 쿡 은행이 파산하면서 공황이 발생하는데 이때 피어폰트는 100만달러를 번다. 1907년, 1929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의 역할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이어받았다. 그는 1885년에 끝없이 진행되던 철도전쟁을 대타협으로 선회시켰다. 이 역할은 연방교통위원회가 이어받았다. 모건하우스는 미국 중앙은행이었다. 
<라이프>에 실린 우스개 교리문답. “질문:찰리, 누가 세상을 창조했지? 대답:하나님이 기원전 4004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1901년 제임스 제이 힐과 존 피어폰트 모건, 존 디 록펠러가 세상을 재창조했습니다.” 
초거대 철강기업 유에스스틸, 세계 최대의민간해운회사 인터내셔널 머컨타일 마린(IMM), 미국 농기계 시장의 85%를 장악하게 되는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등 거대 트러스트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급기야 모건은행과 내셔널시티, 퍼스트내셔널은행 등 세 은행의 신디케이트까지. 피어폰트는 금융집중화를 따지는 의회의 청문회 얼마 뒤 사망했다. 그의 유산은 6,830만달러. 예술품 컬렉션은 5천만달러.
아들 잭 모건 즉 제이 피 모건 2세는 아버지를 성공적으로 모방했다. 외양은 물론 모자 양복 시거 차(茶) 등등. 다른 것은 국제시대에 걸맞게 헨리 데이비슨, 토머스 러몬트 등 파트너와의 협조관계를 잘 활용했다는 것. 모건하우스는 1차대전이 터지자 연합국에 30억달러의 전쟁물자를 조달하면서 3천만달러의 수수료를 챙겼다. 전쟁을 계기로 세계금융중심지는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동하고 모건하우스는 전성기를 맞았다. 미국의 100대기업 가운데 96개가 고객이었고 그 은행계좌는 귀족 신분증이었다. 
1933년 은행업과 증권업 겸업을 금지하는 은행법에 따라 제이피 모건은 여수신 전문은행으로 남고, 모건 스탠리라는 이름의 투자은행을 설립하였다. 모건 스탠리는 세계 7대 석유회사중 6개, 미국 10대기업을 고객으로 두었다. “하나님이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면, 모건 스탠리에 맡길 것이다”라는 게 1970년대의 광고카피. 그 이후 공격적인 인수합병 등 기업사냥꾼으로 변신했다. 

( 출처 : “금융제국 제이 피 모건”, 론 치노 ) 
구제금융때 우리 금융기관 여럿을 문닫게 만든 제이피 모건(JP Morgan). 이 은행은 외환위기 초기 반년새 12건의 채권발행 주간사로 선정되어 모두 40억달러어치를 성공적으로 발행시켰다. 또 1998년 1월 뉴욕에서 열린 단기외채 210억달러의 만기연장 협상에서 서방채권은행단의 대표 역할을 했다. 제이피 모건이 확실하게 기억에 남기로는 같은해 4월 국내사상 최대규모의 ‘파생금융상품 사고’ 이후다. 제이피 모건이 97년 봄 주택은행·보람은행·에스케이증권·한국투신·한남투신·제일투신·신세기투신 등 국내 금융기관에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면서 동남아 환율연계 파생금융상품을 사도록 해 16억달러의 손실을 입힌 것. 이로 인해 한남투신과 신세기투신 등은 문을 닫았고, 파생상품의 판매간사를 맡았던 에스케이증권의 모기업 에스케이그룹은 자금난에 빠졌고 보람은행은 하나은행에 합병됐다.
(출처: 한겨례신문, 2007년 2월 15일)
2) 석유 왕 록펠러

록펠러가 석유산업에 뛰어든 역사는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1861~1865년)로 거슬로 간다. 1870년에 아메리카 스탠더드오일 회사를 세울 때만 해도 사업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으나, 클리블랜드 내셔널시티은행의 대출을 받은 이후 사업감각이 돋보였으며, 특히 악의적 경쟁이 판치는 곳에서 보통 사람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몸담은 석유제련업은 단기적 수익이 높았지만 경쟁이 치열하여 악성 경쟁이 심각했다. 록펠러가 여기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힘으로 누르는 것이었다.  이같은 행위는 동종업계에서는 분노를 불러왔지만, 뉴욕 은행가들은 고도의 집행 능력을 높이사 그의 회사에 큰 흥미를 느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점점 강해지는 미국을 제압하기 노력을 다하였다. 금융업에는 모건은행과 쿤롭 사가 있었지만 공업게에서는 아직 적당한 대리인을 찾지 못하던 차에, 록펠러가 눈에 뛰었고 쿤롭 사의 야곱 쉬프를 록펠러에게 보내 1875년, 록펠러의 다음 확장 계획을 자문과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당시 로스차일드 가는 모건은행과 쿤롭 사를 통해 철도운수업의 95%를 장악하고 있었다. 쉬프는 ‘사우스임프루먼트컴퍼니(South Improvement Company)’를 통해 록펠러 스탠더드오일에 운반비를 대폭 할인해주어 상대회사에 비해 경쟁력 강화로 록펠러는 미국 석유산업을 완전히 독점하고, 명실상부한 ‘석유왕’이 되었다.

창업주인 존 데이비슨 록펠러 1세(1839∼1937)는 비밀 카르텔 형성과 수송업계의 리베이트 제공('리베이트'라는 프랑스어가 영어로 대중화된 것은 이때다), 정치권 매수, 경쟁업체 협박 등을 통해 1881년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5%를 독점함으로써 정유업을 장악한다. 문어발식 확장, 중소기업 기술 빼앗기, 주가 조작 등 오늘날 일부 한국 재벌에 쏟아지는 비판은 고스란히 그의 장기였다. 심지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 부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든지 간에 그 부를 쌓으며 저지른 악행을 보상할 수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록펠러는 여느 졸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비즈니스에서는 냉혹했지만 사생활에서는 근검 절약과 근면 성실의 화신이었다. 그는 평생 일기를 쓰듯 개인 회계장부를 썼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수입의 10분의 1 헌금'이란 원칙을 지켰다.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하는 금욕적 삶을 살았으며 가족을 최우선시했다. 그의 문제는 자신이 벌어들인 재산보다 주체 못할 만큼 불어나는 재산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그가 사실상 은퇴한 1897년까지 그의 재산은 2억달러였다. 그러나 1913년에는 그 돈이 10억달러로 불어났다. 자동차산업의 발달로 주가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890년을 기점으로 왕성해진 그의 기부활동은 사실상 돈벼락에 깔려 죽지 않으려는 자구책에 가까웠다.
그의 외아들 록펠러 2세(1874∼1960)는 더 철저한 금욕주의자였다. 그는 대학 2학년 때까지 춤추는 것이 도덕적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40대까지 아버지에게서 용돈을 받아썼다. 그의 평생은 예수의 삶을 연상시킬 정도로 오로지 아버지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종교적 사명감으로 점철됐다.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 자선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문화사업 등에 5억달러를 출연한다. 이는 그가 물려받은 재산과 같은 규모였다.
4명의 손자는 이를 발판으로 미국 정재계를 장악한다. 아시아전문가가 된 형 록펠러 3세(1906∼1978)를 제치고 '패밀리'의 적통을 물려받은 차남 넬슨(1908∼1979)은 대통령보좌관, 뉴욕주지사, 부통령을 역임하며 백악관행을 꿈꾼다. 3남 로렌스(94)는 항공업과 원자력 사업에 뛰어들고 초기 환경운동의 중심적 인물이 된다. 4남 윈스롭(1912∼1973)은 아칸소주지사가 되고 막내 데이비드(89)는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지배자가 된다. 그러나 '공화당의 케네디'가 됐을지도 모를 넬슨은 오히려 그 진보성 때문에 좌절하고 다른 형제들도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로 밀려난다.
수많은 증손자는 록펠러가의 일원임을 오히려 낙인처럼 껴안고 살아간다. 개중에는 록펠러 4세(제이 록펠러)처럼 상원의원(웨스트버지니아주)으로 활약하는 이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정신과를 찾아갔을 정도로 '세습받은 자'로서의 혼란을 경험했다.          (출처: 동아일보, 권재현, 2004년) 

3) 로스차일드의 금융 전략가 야곱 쉬프

로스차일드 가문과 야곱 쉬프 가문의 인연은 17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스차일드는 가족을 이끌고 프랑크푸르트의 한 5층 아파트로 이사해서 쉬프 가족과 몇 년간 함께 거주했는데, 이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같은 독일 유대계 은행가인 양가는 이미 100년 넘게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1865년, 겨우 열여덟 살의 야곱 쉬프는 영국 로스차일드은행에서 얼마 동안 수습행원으로 일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후 미국에 있는 유럽 은행가 대리인 간의 이익을 조정함으로써 미국의 민간 중앙은행 제도 수립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또 다른 목적은 유럽 은행의 대리인이 될 만한 인물을 찾아 양성한 다음 정부나 법원, 은행, 기업, 언론 등 요직에 심어놓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1875년 1월 1일, 야곱은 쿤롭에 입사하고 회사의 핵심 인물이 된다. 강력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지원을 등에 업은 쿤롭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가장 유망한 투자은행으로 성장했다.

4) 철도 왕 제임스 힐

철도 건설은 금융에 대한 의존도가 대단히 높은 인프라사업이다. 거대한 미국의 철도산업은 상당 부분 영국과 유럽의 자본시장에 의존해 발전했다. 유럽에서 발행하고 통제하는 철도 채권이 미국 철도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직접적 수단이었다.
1873년, 국제 금융재벌들이 갑작스레 미국에 대한 금융 긴축 전전을 실시함에 따라 미국 채권의 투매 열풍이 불어오자 철도 채권도 그 태풍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879년, 한차례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미국 철도 최대의 채권자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우뚝 서 있었다. 석탄채굴사업으로 일어난 제임스 힐은 모건이 금융 버팀목이 되어주었으며 1873년의 위기를 겪으며 많은 철도회사가 도산하는 틈을 이용해 인수와 합병으로 규모를 확장하였다.
1893년에 이르러 미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를 보유하겠다는 제임스 힐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하지만 중서부 철도의 통제권을 손에 넣으려 할 때 록펠러재단이 뒤를 봐주는 유니언퍼시픽철도(Union Pacific Railroad)와 경쟁이 붙었다. 유니언퍼시픽철도의 대표 해리먼(Harriman)은 비밀리에 제임스의 노던퍼시픽철도(Northern Pacific Railroad) 주식을 사들여 해리먼이 4만주만 더 확보하면 회사가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모건은 록펠러의 도전에 대해 즉각 역공에 나섰다. 두 호랑이의 거쎈 싸움에 부작용을 염려한 국제 금융재벌들이 중재에 나섰고, 합병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들은 지주회사인 노던증권회사(Northern Securities Company)를 공동 설립해 북부의 모든 철도회사를 손아귀에 넣었다. 
지주회사를 설립하던 그날, 미국의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암살당하고 후임으로 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취임했다. 노던증권회사는 신임 대통령 루드벨트의 강한 반대로 1890년 통과된 반독점법 ‘셔먼법’에 따라 강제 해산되었다. 좌절을 겪은 제임스는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콜로라도에서 텍사스까지의 철도를 사들였다. 1916년에 세상을 떠날 때 제임스 힐의 재산은 5,300만 달러였다.

■ 셔먼법
셔먼법은 1890년에 미국 연방의회에서 각 주간 또는 국제거래에서의 독점 및 거래제한을 금지하기 위하여 제정된 법률이다. 이 법률은 오하이오주 출신의 상원의원 존 셔먼이 1880년에 제출하여 1890년 7월 2일 해리슨 대통령때 제정되었다. ''불법한 제한 및 독점으로부터 거래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의 통칭이다. 8조로 된 간단한 내용의 규정이지만 미국에서의 반트러스트법의 중요한 법원(法源)이며, 그 후에 제정된 클레이턴법이나 연방거래위원회법과 함께 각국의 독점금지규제의 모델이 되었다. 이 법의 실체적 규정은 제1조의 ''부당한 거래제한의 금지''와 제2조의 ''독점의 금지''이며 기타조항은 모두 절차적 규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셔먼법 제1조는 거래와 상업을 제한하는 모든 계약이나 트러스트 및 공모를 불법화하고 있으며, 제2조는 독점 또는 독점의 기도, 그리고 독점을 위한 결합 또는 공모를 불법화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위반행위를 벌금과 징역으로 처벌할 수 있는 형사범죄로 규정되고 있다

5) 와버그 형제

1902년, 폴과 펠릭스 와버그 형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미국으로 이민했다. 은행가 출신 집안의 형제는 은행 업무에 훤했는데, 특히 폴은 당시 금융의 최고 전문가라고 할 만 했다.  폴의 재주를 높이 산 로스차일드는 유럽전략연맹의 와버기은행으로부터 형제를 빼내 인재가 필요한 미국으로 배치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에서 민영 중앙은행을 추진했으나, 100년이 다 되도록 성사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폴이 주요 공략 임무를 계승한 것이다.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폴은 선발대인 야곱 쉬프의 쿤롭사에 들어가 쉬프 처제의 딸과 결혼했다. 그의 동생 펠릭스는 쉬프의 딸과 결혼했다.  

3. 미연방준비은행 설립의 전초전 : 1907년 금융 위기

1903년, 폴은 유럽 중앙은행의 ‘앞서가는 경험’을 미국에 소개하기 위한 행동 강령을 야곱 쉬프에게 전달했다. 이 문건은 곧 뉴욕 내셔널시티은행(오늘날의 씨티은행)의 제임스 스틸먼 행장과 뉴욕 금융계에 전해졌다. 참신한 아이디어이지만 문제는 미국에 민영 중앙은행을 줄곧 반대하는 정치세력과 민간 세력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정세를 뒤엎기 위한 거대한 금융위기는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구상되었다.
먼저 신문과 언론에 새로운 금융 개념을 홍보하는 글을 대량으로 게재했다. 1907년 1월 6일에는 ‘우리 은행 시스템의 결점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폴의 글이 발표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야곱 쉬프는 뉴욕 상공회의소에 “신용 자원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중앙은행을 세우지 않으면 장차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873년, 1857년, 1873년, 1884년, 1893년과 마찬가지로 금융재벌들은 경기가 과열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거품현상을 발견했다. 이러한 현상 또한 시중에 돈을 많이 풀어서 생기는 필연적 결과였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각종 양분을 열심히 흡수해 점점 살이 올를때, 어항의 물을 빼고 고기들을 처분하는 시기는 몇 개의 대형 은행들만 알고 있었다. 한 나라가 민영 중앙은행 제도를 설립한 이후로는 은행재벌들이 물을 대고 빼기가 수월해지므로 수확도 한층 많아질 것이다. 결제의 발전과 쇠퇴, 재산의 축적과 증발은 모두 은행 재벌들이 진행하는 ‘과학적 사육’이 가져온 필연적 결과이다.

모건과 그이 배후에 있는 국제 금융재벌들은 이번 금융위기로 예측되는 성과를 정확하게 계산했다. 첫째, 미국에 중앙은행이 없는 사회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사실’로 증명할 것이다. 둘째, 소규모의 경쟁 금융기업을 도산시켜 합병한다. 특히 자산신탁회사, 즉 투신사는 은행가들의 눈엣가시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오랫동안 군침이 흘려온 중요 기업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당시 잘나가던 투신사들은 은행이 못하는 업무를 많이 다뤘으며, 정부의 규제도 느슨했다. 이런 이유로 투신사들은 사회자금을 지나치게 흡수하고, 리스크가 큰 업종과 증시에 투자했다. 1907년 10월 위기가 터질 때까지 뉴욕의 은행 대출 절반 정도가 고수익을 내는 투신사에 흘러 들어가고, 투신사는 그 돈을 리스크가 큰 증권과 채권에 투자하는 바람에 금융시장에는 극도의 투기 바람이 불었다.
몇 달 전부터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휴식을 취하던 모건은 국제 금융가들의 빈틈없는 계획을 듣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투신사인 니커보커트러스트(Knickerbocker Trust)가 곧 파산하리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 소문은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뉴욕 전체에 휩쓸었고, 돈을 날릴까 걱정하는 투자자들이 인출을 요구하며 몰려드는 바람에 투신사마다 북새통을 이루었다. 은행들은 투신사에 즉시 대출을 상환하라고 독촉했고, 양쪽에서 시달리던 투신사들은 하는 수 없이 증권시장에서 돈을 빌렸다. 그러자 대출 금리는 단숨에 150%까지 치솟았다. 10월 24일, 주식 거래는 거의 중단 상태였다.

이때 모건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뉴욕 증권거래소장이 모건의 사무실로 찾아와 구조를 요청했다. 오후 3시 전에 2,500만 달러의 결제를 막지 못하면 최소 50개의 거래 기업이 파산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증권시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후 2시에 모건은 긴급 금융인 회의를 소집했고, 16분 동안 은행가들은 돈을 모았다. 모건이 즉시 증권거래소에 사람을 보내 금리 10%로 돈을 빌려주었으나 단 하루 많이 긴급 구조 자금은 바닥이 났고, 금리는 미친 듯이 솟았으며 8개의 은행 및 투신사가 이미 도산했다. 모건은 뉴욕 청산은행으로 달려가서, 임시 화폐로 어음을 발행해 현금 부족을 해소하라고 요청했다. 
11월 2일 토요일, 모건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을 신천에 옮겨 파산의 위기에 몰린 무어&실리(Moore & Schley)사를 구제하기로 했다. 2,500만 달러의 채무 때문에 도산을 눈앞에 둔 이 회사는 테네시석탄철강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모건은 뉴욕 금융계의 거물급 인사들을 자신의 도서관으로 불렀다.
모건은 테네시석탄철강회사가 보유한 테네시 주, 앨라배마 주, 조지아 주의 석탄 및 철광 자원이 장차 자신이 창건한 철강의 거두 U.S.스틸의 독점적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해주리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반독점법의 제약 때문에 모건은 이 군침 도는 먹이를 삼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 위기가 모처럼 합병 기회를 가져다 준것이다.
11월 3일 일요일 밤, 모건은 워싱턴으로 사람을 급파해서 극심한 위기를 느낀 루스벨트에게서 승인 문서를 서명받았다. 뉴욕 증시의 주가는 이 소식에 다시 급상승했다.
모건은 겨우 4,500만 달러라는 헐값으로 테네시석탄철강회사를 인수했다. 무디스의 설립자 존 무디의 평가에 따르면, 이 회사의 잠재적 가치는 최소한 10억 달러나 된다고 한다.

1907년 금융위기는 뉴욕에서 가장 큰 신탁회사 중 하나였던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예금 인출 사태가 미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일어났다. 
'무릎 아래 부분을 졸라맨 짧은 바지'란 뜻의 '니커보커(Knickerbocker)'는 미국에서 '뉴욕의 네덜란드계 이민자'를 뜻한다. 네덜란드인들이 17세기에 미국 동부에 건설한 도시가 바로 뉴욕(당시 뉴암스테르담)이다.
니커보커 트러스트 소유주인 하인즈(Heinze)와 동업자들이 무리한 대출을 통해 구리 회사를 인수하고 구리값과 구리 회사 주가를 올리려는 '투기적 투자'에 나섰다가 실패한 것이 화근(禍根)이었다. 불안해진 미국 은행들이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수표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자 이 회사에는 돈을 인출하려는 예금자가 줄을 이었다. 
예금 인출 사태가 다른 기관과 다른 지역으로 번지고 미국 경제가 패닉에 빠지면서 미국 다우지수는 한달여 만에 최고치 대비 37%나 떨어졌고, 니커보커 트러스트 파트너 중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이 위기 당시 뉴욕의 금융기관장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 설득하면서 막혀가는 자금줄에 숨통을 트게 하고 최악의 사태를 피하게 한 주인공이 바로 금융자본가 J. P. 모건(Morgan)이었다.  일종의 중앙은행 역할을 한 셈이다. 그가 사망한 1913년에 비로소 미국은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세웠다
   < 출처: “1907년의 패닉(The Panic of 1907: Lessons Learned from the Market's Perfect Storm) ”, 
미국 버지니아대학 다든(Darden)스쿨(경영대학원) 로버트 브루너(Bruner) 학장 >

1907년 美 금융위기(Financial Crisis)사건의 7가지 
ㆍGROWTH(성장): 경제적 성장은 위기를 동반한다. 좋은 면이 있으면 항상 나쁜면이 뒤따른 법임. Booming 뒤에 파산이 따라오는 것이 일반적인 경제 현상임.
ㆍCOMPLEXITY(복잡성): * INFORMATION PROBLEM(정보의 비대칭성) / PRANSPARECY(투명성)의 감소로 인해 거시경제의 복잡성이 점점 복잡해 짐. 예금자와 투자자가 어떻게 투자를 해야 하는 지가 불투명해 짐. 워렌 버핏의 유명한 인용구가 복잡성에 대해 잘 표현하고 있음. “You don’t know who’s swimming naked until the tide goes out”
ㆍLOW SHOCK ABSORBERS(충격 완화장치의 부재): * INFLEXIBILITY(경직성) / EXPOSURE TO RISK(위험에 노출). 충격에 대한 충분한 안전장치의 부재. 안정장치가 tight linkage 되어 있을 때에 안전장치가 그 구실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충격이 다른 분야에까지 영향 미침.
ㆍMARKET PSYCHOLOGY(시장의 심리상태):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비관적인 심리 상태 발생. 대부분 공포와 탐욕으로 인한 심리적 상황으로 이는 시장의 실패에 대해 이성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을 방해함.
ㆍADVERSE LEADERSHIP(역 리더십): 리더십의 부재 및 잘못된 리더십. 시장의 불안 요소가 증가하는 시점에서 부적합하게 일을 처리하게 됨. 
ㆍECONOMIC SHOCK 발생: 예금자나 투자자들은 현실적이고, 치명적이며, 갑작스러운 경제 현상 등의 발생으로 충격을 받음. 각각의 위기들은 연쇄적으로 더 큰 위기를 초래함.
ㆍCOLLECTIVE ACTION: “Prisoner’s Dilemma”현상과 같이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었으면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음.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모두에게 더 큰 위기를 가져옴.
  < 발췌: 미국 버지니아대학 다든(Darden)스쿨(경영대학원) 로버트 브루너(Bruner) 학장의 특강 자료 >
4. 금본위제에서 법정화폐로 : 은행재벌 세계관의 대전환

19세기 말 이래 국제 금융재벌의 돈에 대한 인식에는 또 한 번의 비약적 전환이 있었다.
기존의 잉글랜드은행 모델은 국채를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고 정부의 채권과 은행의 발권을 연동시켜 채무 규모를 점점 확대시킴으로써 은행가들이 거액의 수익을 챙기는 방식이었다. 이 같은 금본위 체제에서 은행가들은 인플레이션을 극도로 반대했다. 어떤 화폐라도 평가절하되면 은행가의 이자 수입에 직접적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구상은 대출업으로 이자를 챙기는 비교적 원시적 방법으로, 재산의 축적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결함이 있었다. 설사 지급준비금 제도를 사용하더라도 금융재벌들의 날로 커지는 배를 채우기에는 여전히 모자랐다. 특히 황금과 백은이 천천히 증가하기 때문에 은행의 대출금 총량에 상한선을 책정해놓는 셈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할 무렵, 유럽의 은행재벌들은 이미 더 효과적이고 더 복잡한 법정화폐 체제를 모색하고 있었다. 법정화폐(fiat money)는 황금과 백은이 대출 총량에 상당한 제약을 미치는 국면에서 완전히 탈피해 훨씬 융통성 있고 은밀하게 화폐를 통제할 수 있게 했다. 화폐 공급을 무한대로 늘려 얻는 수익이 인플레이션에 따른 대출이자의 손실보다는 훨씬 크다는 점을 알게 되어 법정화폐의 열렬한 제창자로 변신했다.
지폐 발행의 증가에 따른 통화 팽창(currency inflation)의 개념은 오늘날 가격 상승에 따른 통화 팽창(price inflation) 개념에 완전히 묻혀버렸따.
이제 은행재벌의 치부 순단에는 원래의 지급준비금 제도, 화폐와 국채의 연동 외에 또 하나의 강력한 도구인 인플레이션이 추가되었다. 
통화 팽창에 대해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스(Hohn Keynes)는 따끔하게 꼬집었다. “정부는 이 방법을 이용해 눈에 띄지 않게 국민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 100만 명 가운데 한 사람도 이러한 절도 행위를 발견해내기 어렵다.”
엄밀히 말해 미국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는 기관은 미연방준비은행이지 정부가 아니다.
■ 금본위제(金本位制, Gold standard)
통화의 표준단위가 일정한 무게의 금(金)으로 정해져 있거나 또는 일정량의 금의 가치에 연계되어 있는 화폐제도

1) 금본위제의 장점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금의 해외유출이 초래되었을 때 통화당국은 화폐공급을 줄이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금본위제는 과도한 지폐 발행으로 물가 상승을 일으킬 수 있는 정부나 은행의 힘을 제한한다.
금본위제하에서는 각국이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해 국제무역에 명확성이 부여된다.

2) 금본위제의 단점
금본위제는 화폐 공급에 충분한 유연성을 보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새로 캐내는 금의 공급량이 화폐공급에 대한 세계경제의 점증하는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국가가 세계적인 경기침체나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차단하고 자국 경제를 완전히 분리시켜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업률이 증가하고 경제성장률이 감소하는 현상이 발생할 때마다 지불능력이 없는 나라에서는 경기조절 과정이 길고 고통스러워질수 있다.

 < 출처: NATE 백과사전 >
■ 브랜튼우즈 체제
① 1944년 6월 미국뉴햄프셔주 브래튼우즈
    - 2차 세계대전 후 경제상황 타계하기 
       위한 국제통화제도 
    - 영국 경제학제 케인츠
       ㆍ금 1온스 = 35$ (금환본위)
       ㆍ각국통화는 달러에 대해 고정환율
       ㆍIMF와 IBRD 창설

② 1960년대까지 달러화 중심 거래
    - 미국의 막대한 국제수지 적자
    - 달러에 대한 신인도 하락
        ㆍ 유동성 감소 딜레마 

③ 1971년 8월 15일 
    - 미국 닉슨대통령 금태환 정지
    - 변동환율체제시행

④ 1973년 스미소니언협정
    - 세계 실질 변동환율 체제: 킹스턴체제

⑤ 신브래튼우즈 체제
    - 영국의 고든브라운총리와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 주창
    - 세계경제위기, 브래튼우즈체제 한계
    - 노벨 경제학상 조셉 스티글리츠 동조    - 금융위기 대처 위한 감독과 조율기능
5. 1912년의 대선 열풍

국제 금융재벌들의 예상대로 1907년의 금융위기는 미국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국민은 투신사에 분노를 품었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월가 금융 세력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은행 파산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했다. 금융 독점을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전국을 휩쓸었다.
프린스턴대학의 우드로 윌슨 총장은 금융 독점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금융계의 대변인인 올드리치를 반길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학술적 열정과 이상주의만으로는 금융업에 대한 부족한 지식을 메울 수 없었다. 윌슨은 월가의 은행가들이 돈을 벌어들이는 수법에도 완전 문외한이었다.
은행가들은 윌슨의 단순하면서도 이용하기 쉬운 특징에 주목했다. 게다가 그는 사회가 인정하는 금융 독점 반대 운동가였다. 은행가들은 윌슨에게 자금을 쏟아 부으면서 그를 이용할 날만을 기다렸다.
1902년 윌슨이 순조럽게 프린스턴 총장에 임명된 것은 동기였던 뉴욕 내셔널시티은행의 클리블랜드 도지 이사가 뒤에서 도운 결과였다. 이렇게 조금씩 관계를 다진 다음 책략대로 윌슨이 대통령감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얼마 후 윌슨은 월가 큰손들의 지원에 힘입어 1910년 뉴저지의 주지사로 당선된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윌슨은 여전히 정의감에 불타는 어조로 월가의 금융 독점을 비난했지만, 사적으로는 자신의 자리와 정치적 미래가 완전히 은행가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윌슨의 명성이 날로 높아질 즈음, 은행가들은 발 빠르게 움직여 그의 대통령 경선 비용을 모았다. 도지는 뉴욕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윌슨 선거 자금 모금 사무실을 차리고 은행 계좌를 개선했고, 자신은 1,000달러짜리 수표 한 장을 헌금했다. 그 후 은행 직접 송금 방식으로 은행가에서는 많은 정치 자금을 모았는데, 그 중 3분의 2가 월가의 큰손 7인이 내놓은 정치 헌금이었다.
대통령 경선 후보에 나선 이때부터 윌슨은 금융재벌들의 품으로 뛰어들었으며, 몇 년간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민주당의 염원도 실려 있었다.
윌슨이 넘어야 할 산은 현직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였다. 당시 전국적 지명도에 윌슨보다 태프트가 앞서 있었으나 같은 공화당 소속의 전임 대통령 루스벨트가 경선 참가를 선언을 하여 돌풍을 예고했다. 루스벨트는 노던증권회의 해산으로 명망이 높아졌고, 반독점법 추진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의 출현은 태프트의 표를 상당 부분 잠식했다.
사실 이들 세 후부자는 모두 은행재벌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은행재벌들이 가장 통제하기 쉬운 윌슨 쪽으로 암암리 기울 뿐이었다. 월가에 계획에 따라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큰 타격을 입히면서 윌슨은 가볍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는 19992년 조지 하버트 워커 부시가 로스 페로에게 지지표를 많이 뺏기는 바람에 신예인 빌 클린턴에게 패한 경우와 비슷하다. 
이 선거인단 수는 인구 비례를 따져서 주 별로 할당됩니다.
그리고 50개 주의 총 선거인단의 수는 538명입니다.
이 규모를 책정하는 근거는 미국 상, 하원 의원 수를 합친 535명에 워싱턴 DC 대표 3명을 더한 것이죠.
그리하여 오늘 뽑힌 총 538명이 추후에 다시 모여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를 진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국민 득표율에서 앞선다고 해도 최종 투표에서는 뒤바뀔수가 있습니다.
6. B프로젝트

금융게 거물들은 지킬 섬에서 두 가지 계획을 준비했는데, 하나는 올드리치 상원의원이 양동작전을 주도해 반대파의 주의력을 그쪽으로 집중시키는 계획으로 공화당의 지지를 받았다. 또하나는 b프로젝트라고 부르는 작전인데, 공격의 핵심은 사실 이쪽에 있었다. B프로젝트가 바로 ‘연방준비은행법’이며, 주요 추진 세력은 민주당이었다.
사실 이들 두 계획은 이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었다.
대통령 선거도 이러한 핵심 목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당시 월가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팽배한 가운데 올드리치가 내세우는 금융 개혁 법안이 부결될 것은 확실했다.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오랜 시간을 보낸 민주당은 그동안 줄곧 금융 독점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여기에 참신한 이미지의 윌슨이 가세하니, 모든 것이 민주당이 지지하는 연방준비은행법을 관철할 좋은 기회였다. 1907년의 금융위기로 금융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에서 양당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민의에 ‘순응’한다며 은행재벌들이 공화당을 희생시키고 민주당 쪽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는지도 모른다.
금융재벌들은 대중을 좀더 미혹하고자 내용이 별반 다를 바 없는 두 방안을 따로 내놓고 서로 공격하게 하는 고단수를 썼다.
올드리치는 민주당의 제안이 은행에 대한 적의를 드러낸대고 지적하고, 이는 정부에도 불리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금본위제에 어긋나는 법정화폐 정책은 은행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올드리치의 제안에 대한 민주당의 비난은 국민의 눈을 뜨게 했다. 그들은 올드리치가 수호하는 것은 월가 금융재벌의 이익과 독점적 지위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제시한 연방준비은행은 이 같은 독점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취지에서 비롯되었으며, 지역이 나뉘고 대통령이 임명하며 의회가 심의하고 은행재벌이 전문자의 의견을 제공하는 상호 제약 및 분권 분립 체제의 완벽한 중앙은행 시스템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 사무에 어두운 윌슨은 순진하게도 이 방안을 통해 금융재벌들의 독점적 금융 구조를 깰 수 있으리라고 굳건히 믿었다.
올드리치와 밴더리프, 그리고 월가의 총력을 기울여 반대한 덕분에 민주당이 내세운 연방준비은행법은 오히려 대중에게 호감을 얻었다. 은행재벌들이 겉으로는 반대하는 척하면서 안으로는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교란 작전은 어찌나 교묘한지 무릎을 칠 정도였다.
윌슨 대통령이 당선됨과 동시에 B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윌슨이 백악관에 입성한 지 겨우 석 달이 지난 1913년 6월 26일, 버지니아 하원의원인 은행가 카터 글래스(Carter Glass)가 정식으로 B프로젝트를 하원회의에 부쳤다. 이른바 ‘글래스 제안(Glass Bill)’이었다. 그는 중앙은행 같은 자극적인 용어를 피하면서 연방준비은행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했다. 9월 18일, 글래스 제안은 대부분 하원이 제대로 살펴볼 틈도 없이 표결 결과 287대 85로 통과되었다.
상원에 제출된 이 제안은 ‘글래스-오언제안(Glass-Owen Bill)’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원의원 로버트 L. 오언(Robert L. Owen) 역시 은행가였다. 글래스-오언 제안은 상원에서 12월 19일 통과되었다.  당시 상황으로 이듬해나 돼야 재토론이 가능했으므로, 이 법안에 반대하는 주요 의원들이 대부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워싱턴을 떠나고 없었다.
이때 의회에 임시 사무실을 차리고 현장에서 직접 지위하던 폴 와버그는 때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날치기 통과를 계획했다. 12월 20일 토요일 밤의 연석회의에서 의견이 다른 몇몇 부분을 일치시켰으나 20일 밤이 되도록 몇 가지 핵심 부분에서는 여전히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지역은행의 숫자, 황금 준비금의 비율, 국내의 국제 무역 거래 시 화폐 결산, 준비금 수정 제안, 미연방준비은행에서 발행한 화폐가 상업은행의 준비금이 될 수 있는지 여부, 정부 채권의 연방준비은행 화폐 발행 담보물 비율, 인플레이션 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가운데 21일 하루를 보낸 이튿날, 22일 새벽 1시 30분에서 4시 사이에 모든 미국인이 하루하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중요한 법안은 이렇게 시간에 쫓겨 졸속으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의원은 수정한 부분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고, 당연히 수정안은 제출할 엄두도 못냈다.
국제 금융재벌들이 미국 정부와 100년에 걸쳐 벌인 치열한 힘겨루기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고 미국의 화폐 발행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으로 끝났다. 잉글랜드은행 모델이 미국에서도 성공적으로 복제된 것이다.
잉글랜드은행과 마찬가지로 미국 연방준비은행도 주주의 상황에 대해서는 엄격한 비밀을 유지했다. 하원의원 라이트 패트먼(Wright Patman)은 하원의 은행 및 통화위원회 위원장을 40년이나 맏아왔다. 그중 20년 동안 그는 연방준비은행의 해체를 계속적으로 요구하면서, 연방준비은행의 소유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차후 비밀이 밝혀졌는데「미연방준비은행의 비밀」이라는 책의 작가 유스터스 멀린스가 거의 반세기에 걸친 연구 끝에 연방준비은행 최초의 기업영업허가증을 찾아냈다. 
연방준비은행 시스템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것은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이다. 이 은행이 1914년 5월 19일 통화감사원에 보고한 문건에 적혀 있는 주식 지분 총 발행 수량은 20만 3,053주로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록펠러와 쿤롭 사의 뉴욕 내셔널시티은행이 3만 주로 최다 보유
▪ J. P. 모건의 퍼스트내셔널은행이 1만 5,000주 보유

8. 연방준비은행의 주인은 누구인가

8. 연방준비은행의 주인은 누구인가

8. 연방준비은행의 주인은 누구인가

1955년 이들 두 은행의 합병으로 씨티은행이 탄생함으로써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 지분이 전체의 거의 4분의 1에 달하게 되고, 그 후로 사실상 연방준비은행의 총재 후보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의 임명 절차 청문회는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 폴 와버그의 뉴욕 내셔널 상업은행이 2만 1,000주 보유

▪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사로 있는 하노버은행이 1만 200주 보유

▪ 체이스은행이 6,000주 보유

▪ 케미컬은행이 6,000주 보유


이상 6개 은행이 40%의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 주식을 보유했다. 1983년 이들의 지분은 53%로 늘어났다. 이들 각자의 지분은 조정을 거쳐 씨티은행 15%, 체이스맨해튼 14%, 모건신탁 9%, 하노버 7%, 케미컬 8%로 확정되었다.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의 등록 자본금은 1억 4,300만 달러인데, 이들 은행이 그중 얼마나 출자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 

1978년 6월 15일, 상원 정부사무위원회(Government Affairs)는 미국 주요 기업의 상호 이해관계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앞서 소개한 은행들이 130개 주요 기업 내에 470갱의 이사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요 회사별로 평균 36명의 이사가 은행가들로 채워졌다고 한다.

그 중 씨티은행이 97석의 이사직을 차지했으며, JP모건이 99석, 케미컬은행이 96석, 체이스맨해튼은행이 89석, 하노버은행이 89석이었다.

1914년 9월 3일, 연방준비은행이 지분을 판매할 때 <뉴욕 타임스>가 주요 은행의 지분 구성을 발표했다.


▪ 뉴욕 내셔널시티은행이 25만 주를 발행했으며 제임스 스틸먼 4만 7,498주, JP모건 사 1만 4,500주, 윌리엄 록펠러 1만 주, 존 록펠러 1,750 주

▪ 뉴욕 내셔널 상업은행이 25만주를 발행했으며 조지 베이커 1만 주, JP모건 사 7,800주, 메리 해리먼(Mary Harriman) 5,650주, 폴 와버그 3,000주, 야곱 쉬프 1,000주, J. P. 모건의 아들 1,000주

▪ 체이스 은행, 조지 베이커 1만 3,408주

▪ 하노버은행, 제임스 스틸먼 4,000주, 윌리엄 록펠러 1,540주


연방준비은행이 설립된 1914년 이래 은행가들에 의해 미국 금융과 상공업계 및 정치적 운명이 조종되어왔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월가의 금융재벌들과 런던 금융시티의 로스차일드 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뱅커스트러스트(Bankers Trust)의 벤저민 스트롱 총재가 초대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 이사로 선출되었다. “벤저민 스트롱의 통제 아래 연방준비위원회는 잉글랜드은행 및 프랑스은행과 겸임 관계가 성립되었다. 벤저민 스트롱은 뉴욕 미연방준비은행 이사로 재임 중이던 1928년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의회는 연방준비은행의 이사와 유럽 중앙은행의 거두들 간에 열린 비밀회의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이 비밀회의가 1929년 경제대공황을 가져온다.”




9. 연방준비은행 초대 이사회

훗날 윌슨은 자신이 연방준비은행 이사 가운데 단 한 명만 지명할 수 있었고 나머지 모두 뉴욕의 은행가들이 선출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폴 와버그가 이사로 임명되는 과정에서, 상원은 그에게 1914년 6월 의회에 출석해 연방준비은행의 기획 과정에 대해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폴은 이를 거절했다. 폴은 당연히 연방준비은행 시스템의 핵심 인물이었다. 당시 그를 제외하면 연방준비은행이 어떻게 운영될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강경한 태도 앞에 의회는 어쩔 수 없이 한발 양보해서 모든 문제의 리스트를 사전에 제시하고, 만약 폴의 입장에서 ‘그의 역할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판단되면 대답을 안한다는 조건에 비공개 회의를 통하고 순조롭게 의회의 청문회를 통과하고 연방준비은행 초대 이사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부총재의 자리에 올랐다.
폴을 제외한 이사 네 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아돌프 밀러(Adoph Miller) – 경제학자, 록펠러가 후원하는 시카고대학과 모건이 후원하는 하버드대학 출신
▪ 찰스 햄린(Charles Hamlin) – 재무부 차관 역임
▪ 프레더릭 델러노(Frederick Delano) – 루스벨트의 친척, 철도 은행가
▪ 하딩(W. P. G Harding) – 애틀랜타 퍼스트내셔널은행 총재
윌슨 대통령이 지면한 토머스 존스(Thomas Jones)는 미국 사법부에 기소 중이며, 스스로 이사회 지명자 명단에 물러났다. 나머지 이사 두명은 재무장관과 통화감사원장이었다.
◀ The Federal Reserve Board as they took office on August 10, 1914. From left to right, standing: Paul M. Warburg, John Skelton Williams (Comptroller of the Currency), W.P. G. Harding, Adolph C. Miller; Seated: Charles S. Hamlin (Governor), William G. McAdoo (Chairman), and Frederic A. Delano. McAdoo is wearing a mourning armband to commemorate the death, four days earlier, of his mother-in-law, Ellen Axson Wilson.
10. 베일에 싸인 연방자문위원회

연방자문위원회는 폴 와버그가 회심의 역작으로 설계한 비밀 원격제어 장치로서, 연방준비은행이사회를 조율하는 작용을 한다. 이 기관의 존재와 돌아가는 내막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이에 관한 연구 문헌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연방자문위원회는 12개 지역은행의 대표 한 명씩으로 구성되며, 매년 워싱턴에서 연방준비은행이사회의 구성원들과 네 차례 회담을 가졌다. 은행가들은 연방준비은행 이사들에게 각종 통화 정책에 관한 ‘건의’를 하며, 출신 지역의 경제적 이익을 대표하는 은행가들은 각자 투표권이 있었다.  그러나 12개 연방준비은행 지역은행 중 어떤 중소은행의 생존은 완전히 월가의 5대 은행 거두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이런 마당에 ‘각 지역의 이익을 대표하는’ 중소 은행가들이 5대 은행의 거물들과 한자리에 앉아 미국 통화 정책을 논한다면, 그 결과야 불 보듯 뻔한 일 아니겠는가.
우러가의 5대 거두는 매년 네차례 거르지 않고 워싱턴으로 달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무엇보다도 모건은 무려 63개 회사의 이사를 겸한 슈퍼급 인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건의’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그렇게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는 것은 뭔가 수상쩍다.
11. 진상은 어디에

많은 대통령이 금권과 위협에 대해 되풀이해서 경고했으며, 이렇게 많은 의회 기록과 법률 사례들이 연방준비은행이 민간 소유임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윌슨 대통령은 세상을 뜨기 전에 자신이 연방준비은행 문제에서 ‘사기’를 당했다고 털어놓았다. 가책을 느낀 그는 “나는 무의식 중에 내 나라를 망쳤다.”라고 고백했다.
1914년 10월 25일, 연방준비은행이 정식적으로 출범할 때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또한 절명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연방준비은행의 주주들에게는 또 한 번 큰손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시대정신2 (Zeitgeist II Addendum,2008)


“지급준비율과 통화팽창”
■ 글로벌 로스차일드 가문

오늘날 세계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도 유럽국가들의 식민지로 출발했으며, 식민지를 국가의 모습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자금은 유럽의 투자금융가들이 지원했다.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는데 필요한 자금은 유럽의 투자은행가들로부터 조달했다. 
유럽의 주요 5개국에 진출한 로스차일드가의 금융가들은 모든 국가에서 성공을 하고, 각자 독립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거대한 프로젝트에는 연합하여 참여한다.이들은 독일금융을 장악하는 로스차일드(Rothschild banking family of Germany), 오스트리아의 금융을 장악하는 로스차일드(Rothschild banking family of Austria), 영국의 금융을 장악하는 로스차일드(Rothschild banking family of England), 프랑스의 금융을 장악하는 로스차일드(Rothschild banking family of France), 이태리의 금융을 장악하는 로스차일드(Rothschild banking family of Naples), 그리고 바티칸 제국과 연합하여 투자가들의 비밀을 철저하게 지켜주는 스위스의 금융을 장악하는 로스차일드(Rothschild banking family of Switzerland)로 가지를 뻗게 된다.
특히, 스위스의 금융을 장악한 로스차일드는 전세계 독재자들의 은닉재산을 숨겨주는 사업을 진행해 부패한 권력자들의 비리를 숨겨주는 대가로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 세계 금융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영국과 독일의 로스차일드가는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고, 일본의 전쟁자금을 지원하여 일본의 고리대금업 시장을 현재까지도 장악하고 있다.
또한, M. A. 로스차일드는 미국이 독립하자 미국에도 손을 뻗쳤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자기 집에서 같이 살던 랍비의 손자 야콥 시프(Jacob Schiff)를 뉴욕으로 보내 미국총책을 맡겼다. 야콥 시프는 금융 회사인 쿤롭사와 동업을 한 후 동업자인 솔로몬 롭(Solomon Loeb)의 딸 테레사와 결혼하였다. 그후 철강산업의 카네기(Andrew Carnegie), 철도산업의 해리먼(Edward Henry Harriman), 석유산업의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등에게 자금을 대준 J. P. 모건(John Piermont Morgan)도 야콥 시프의 지휘 아래 움직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꾼이었다. 그의 소유로 알려져 있던 재산 중 19%만이 그의 것이었고, 나머지는 로스차일드의 것이었다. 
1802년 M. A. 로스차일드는 독일계 유대인인 와벅 3형제중, 둘째 폴 와벅(Paul Warburg)과 막내 펠릭스 와벅(Felix Warburg)을 미국으로 보내 야콥 시프의 뒤를 잇게 하였으며 첫째인 맥스 와벅(Max Warburg)은 독일에 그대로 남아 화벤(I. G. Faben: Hoechst, Bayer, BASF의 전신)이란 화학회사의 대표가 되어 나치 독일의 재벌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1800년대 중반 로스차일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되었다. 이 가문은 각 나라 중앙은행의 주도권뿐 아니라 산업 분야의 주도권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을 대표하는 ‘시프, 와벅, 쿤롭’가문, 미국 출신의 은행가를 대표하는 ‘모건, 록펠러, 올드리치’가문 등이 혼인관계를 맺어 금권주의 황족을 이루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에는 세실 로드(Cecil Rhodes)를 보내 다이아몬드 광을 위주로 막대한 돈과 정치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남미에는 미국 사업가들을 앞세워 각국의 중앙은행을 모두 차지하게 하였다. 나머지 지역은 자원을 공급하고 생산품을 소모하는 지역이 되었다.
( 출처 : “그림자 정부”, 이리유카바 최 )
또한, M. A. 로스차일드는 미국이 독립하자 미국에도 손을 뻗쳤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자기 집에서 같이 살던 랍비의 손자 야콥 시프(Jacob Schiff)를 뉴욕으로 보내 미국총책을 맡겼다. 야콥 시프는 금융 회사인 쿤롭사와 동업을 한 후 동업자인 솔로몬 롭(Solomon Loeb)의 딸 테레사와 결혼하였다. 그후 철강산업의 카네기(Andrew Carnegie), 철도산업의 해리먼(Edward Henry Harriman), 석유산업의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등에게 자금을 대준 J. P. 모건(John Piermont Morgan)도 야콥 시프의 지휘 아래 움직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꾼이었다. 그의 소유로 알려져 있던 재산 중 19%만이 그의 것이었고, 나머지는 로스차일드의 것이었다. 
1802년 M. A. 로스차일드는 독일계 유대인인 와벅 3형제중, 둘째 폴 와벅(Paul Warburg)과 막내 펠릭스 와벅(Felix Warburg)을 미국으로 보내 야콥 시프의 뒤를 잇게 하였으며 첫째인 맥스 와벅(Max Warburg)은 독일에 그대로 남아 화벤(I. G. Faben: Hoechst, Bayer, BASF의 전신)이란 화학회사의 대표가 되어 나치 독일의 재벌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1800년대 중반 로스차일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되었다. 이 가문은 각 나라 중앙은행의 주도권뿐 아니라 산업 분야의 주도권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을 대표하는 ‘시프, 와벅, 쿤롭’가문, 미국 출신의 은행가를 대표하는 ‘모건, 록펠러, 올드리치’가문 등이 혼인관계를 맺어 금권주의 황족을 이루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에는 세실 로드(Cecil Rhodes)를 보내 다이아몬드 광을 위주로 막대한 돈과 정치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남미에는 미국 사업가들을 앞세워 각국의 중앙은행을 모두 차지하게 하였다. 나머지 지역은 자원을 공급하고 생산품을 소모하는 지역이 되었다.
( 출처 : “그림자 정부”, 이리유카바 최 )
로스차일드가는 혈연과 전문적인 능력을 가진 집단을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지배구조는 Astor family, Carter family, Disney family, Drexel family, Du Pont family, Huxley family, Krupp family, Fairchild family, Forbes family, Ford family, Gould family, Guggenheim family, Hilton family, Johnson family, Kennedy family, Lee family, McCormick family, Mellon family, Morgan family, Rockefeller family, Roosevelt family, Vanderbilt family, Von Erich wrestling family, Washington family, Whitney family, Bush family, Gates family, Warburg family 등의 뿌리를 추적하면 모두 연관되어 있음을 분석할 수 있다.


로스차일드의 잔재기업
 셀 석유, 로스차일드 은행(금 가격 결정), 골드만삭스 증권, 로이드 보험, 필립모리스 담배, 필립스 전기, 레슬러 식품, 프랑스 최고급 포도주 “샤토 무통”의 제조사 베이론 필립페, 파리안과 평원,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터, 월스트리트저널, 로이터통신, ABC, CBS, 삭슨 자디 기네스, 제네바 아돌스 로스차일드 재단 등 




Posted by VIEWQ 트랙백 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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