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과학 사조
베이컨의 경험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의 수학 연역적인 자연 철학 사고 방식을 비판하면서 실험 기구를 사용하거나 실험적 방법을 활용해 자연의 본질을 알아내는 귀납적 방법을 주장했다. 과학자들이 관찰과 실험을 바탕으로 사실들을 축적한 후 그 지식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이끌어내는 진정학 과학자의 자세로 보았다. 이러한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과 경험주의 철학은 보일을 비롯한 영국의 과학을 이끈 왕립 학회의 많은 실험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과학 사조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절대적 지식의 근거에 대해 고심했고 명징성이 확보된 명제에서부터 자연의 존재를 하나씩 증명해 나가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주관적인 감각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류를 없애거나 줄일 수 있는 논리적인 연역의 방법을 생각했다. 연역이라는 논리적 방법은 참다운 진리로 인도하는 확실한 방법이므로 연역적 전개가 가능한 것을 참다운 지식이라고 여겼다. 데카르트는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관념을 모두 말한 것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 설명 가능한 기본적 관념을 논리적 연역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연역적 철학으로 인해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많은 이론 물리학자가 배출되었다.
1838년 영국의 페러데이는(Michael Faraday, 1791 1867)는 다양한 기체로부터 스파크의 형태로 나타나는 전기 방전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대기압 하에서의 기체 방전뿐만이 아니라 압력을 낮추었을 때 나타나는 방전의 모습도 관찰했다. 그는 기체의 기압이 낮아지면서 양극에서 음극까지 다소 지속적인 발광이 나타나다가 기압이 아주 낮아지면 전극의 중간 지점에서 어두운 지역이 나타나면서 발광이 중단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을 흔히들 패러데이 암부(Faraday dark space)라고 부른다.
가이슬러 관
유리공이었던 독일의 기술자 가이슬러가 만든 방전관, 진공 실린더 속에 전극을 넣고 저압 상태(1Torr 이하)에서 아르곤이나 네온 등의 기체를 포함하는 관이다. 높은 전압이 걸리면 전류가 기체를 타고 흐르면서 기체를 이온화 시키고 기체에서 방출된 전자가 다시 이온과 결합하면서 빛을 내게 된다. 전자가 기체 분자와 충돌할 정도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음극선을 만들지 못한다. 네온 사인의 원리로 알려져 있다. 독일의 율리우스 플뤼커는 가이슬러 관을 이용하여 자기장이 방전관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였다. 가이슬러는 수은 진공 펌프를 개발하고 물의 최고 밀도 온도를 측정하기도 하였다.
캐서드
음극 또는 전지의 음극과 연결한 부분, 전기 분해에서는 환원 반응이 일어나는 부분을 말한다.
골드스타인의 음극선
플뤼커의 제자였던 빌헬름 히토르프는 가이슬러의 진공 펌프와 고전압 발생 장치를 이용하여 고전압 방전관을 이용하여 음극에서 양극으로 이동하는, 자기장에서 휘는 광선을 발견하였고 이를 글로우 방전 또는 글로우 광선이라고 불렀다. 골드스타인은 더욱 정밀한 실험을 통해 이를 확인한 후에 이 광선을 음극선(Cathod Ray)라고 불렀다.
크룩스의 암부
가이슬러관보다 현저하게 압력이 낮아 10-2Torr 이하로 낮아지게 되면 밝게 빛나는 곳은 없어지고 음극의 반대 쪽 유리관의 벽이 녹색 빛을 내게 된다. 이 상태의 방전관을 크룩스관이라 한다. 1878년 영국의 크룩스(William Crookes, 1832 1919)는 방전관의 음극 가까이에서 소위 '크룩스의 暗部'(Crookes dark space)의 두께가 방전관 내의 분자의 압력이 감소함에 따라 넓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이듬해까지 계속된 실험에서 크룩스는 음극선이 고체를 통과할 때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자장에 의해서 휘어지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일련의 연구를 종합해서 크룩스는 1879년 왕립학회의 강연에서 자신이 관찰한 것을 기초로 음극선이 음으로 하전된 분자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고, 이것을 보통의 기체, 액체, 고체 상태와는 다른 물질의 '제 4 상태'라고 불렀다.
음극선이 하전된 분자의 흐름으로서 물질의 제 4 상태에 해당한다는 크룩스의 주장에 대해서 음극선을 에테르적인 파동으로 해석했던 독일의 과학자들은 강한 비판을 가했다. 우선 1883년 킬 대학에 있던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1857 1894)는 글로우 방전에 관한 정확하지 않은 자신의 실험을 바탕으로 해서 음극선이 정전기장에 의해서는 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헤르츠의 실험
J.C.맥스웰에 의해 예언된 전자기파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실시하였다. 발진기로서 유도 코일을 사용하여 그 양끝에 불꽃을 일으키고, 간극이 있는 고리 모양의 철사를 검출기로 사용하여 그 양끝에도 전기불꽃이 생기는 것을 발견하였다. 헤르츠는 이 장치를 사용하여 전자기파가 빛과 같이 회절(回折)이나 편향을 나타내고 빛과 같은 정도의 속도로 직진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또 전자기파가 실험실의 벽에서 반사되며, 단단한 피치의 프리즘에서 굴절된다는 것도 실험으로 밝혔다. 헤르츠의 실험은 맥스웰의 전자기파설을 실증함과 동시에 라디오통신이나 기술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었다
뢴트겐 X선
오늘날 의학의 없어서는 안될 기본적인 기술이자 방사선 과학의 태동이 된 사건이며 톰슨의 전자의 발견의 계기가 되었고 톰슨의 전자 발견은 상대성 이론의 배경이 되었다. 또한 X선을 통해 빛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져 물질파 이론과 양자 역학 요람이 되기도 한, 20세기 과학의 전면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된 놀라운 사건이 1895년 겨울에 일어났다.
1850년대부터 독일과 영국의 과학자들은 전기 방전관에서 나오는 음극선을 이용해서 다양한 실험을 해나가고 있었다. 초기 이들의 실험은 주로 음극선 자체의 성질에 대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음극선의 성질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과학자들은 음극선을 다양한 물체에 충돌시켜 여기서 나타나는 모습을 분석하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X-선의 발견은 바로 이런 실험 과정에서 얻어졌다.
1892년 본 대학의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 1857 1894)는 음극선이 얇은 금박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새로운 현상을 발견한 헤르츠는 그의 제자인 레나르트(Philipp Lenard, 1862 1947)에게 이 실험을 계속해 볼 것을 권유했다. 레나르트는 음극선 관의 한쪽 끝에 얇은 알루미늄 판('레나르트 창문')을 대어서 여기에 음극선을 쏜 다음 이 금속 창문을 통과해서 나오는 광선의 성질을 여러 기체들 속에서 면밀하게 점검했다. 이 실험에서 레나르트는 음극선에 관한 여러 가지 성질들을 관찰했다. 만약 레나르트가 여기서 금속판을 투과해서 나오는 음극선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반대편에도 감광판을 대었더라면 레나르트는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50세가 넘은 1895년초까지 뢴트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48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발표한 논문 하나로 그는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1894년 5월 5일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서 음극선을 금속 박판에 쏘기 위한 실험장치에 관한 문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때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 '레나르트 창문'에 사용되는 금속 박편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레나르트의 도움을 받아 뢴트겐은 레나르트가 했던 실험을 반복해 볼 수 있었다. 그 때 히토르프와 크룩스가 만든 향상된 진공관과 륌코르프가 만든 고전압 장치로 발생한 음극선이 유리관의 금속박에 빠른 속도로 충돌해서 새로운 종류의 광선이 나왔다. 새로운 광선 X-선이 검은 종이를 뚫고 나와서 백금시안화바륨으로 이루어진 감광지를 감광시켰던 것이었다. 이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 뢴트겐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실험을 계속해나갔다. 12월 22일 그는 자신의 처를 실험실로 불러서 그녀의 손을 X-선으로 찍어보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12월 28일 뢴트겐은 그간의 실험을 정리해서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 학회지에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관해서'라는 논문을 접수시켰다.
의학자들은 X-선의 의학적 중요성을 발 빠르게 알아차리고 뢴트겐에게 강연을 요청했다. 학계뿐만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의 언론들도 이 놀라운 발견을 대서특필해서 뢴트겐은 일약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인간의 뼈가 찍힌 뢴트겐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회람된 후 얼마 있지 않아서 베크렐은 강한 투과성을 지닌 우라늄 화합물의 감광 현상 즉 방사선의 발견에 대해 발표하게 된다.
X-선 발견은 영국 과학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J. J 톰슨은 X-선 발견의 소식을 듣고 이에 관련된 실험을 하다가 X-선 이온화 현상을 발견했다. 그 뒤 톰슨은 음극선의 본성에 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음전하를 띤 미립자, 즉 전자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X-선의 발견은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뢴트겐은 발견 당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의 물리학 분야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X선은 뢴트겐 이전에 여러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었을 것이다. 1879년 크룩스 자신도 음극선 주변에서 사진 건판이 흐려지는 것을 불평하곤 했었다. 더구나 레나르트를 비롯한 몇몇 독일 물리학자들은 크룩스 관 주변에서 발생하는 발광현상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음극선의 성질을 연구하는 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는 바람에 발견의 기회를 놓쳤다. 특히 레나르트의 창문 실험은 X-선 발견에 가장 근접했던 실험이었으며, 실제로 레나르트는 뢴트겐이 히르토프-크룩스 관을 제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레나르트는 자신이 이 중대한 발견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으며, 특히 뢴트겐이 X-선 발견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도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X-선의 본성에 대한 초창기의 해석
우선 초창기 유행하던 X-선 본성에 대한 해석으로는 1900년까지 주로 독일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선호되던 해석으로 X-선을 매우 높은 진동수를 지닌 통상의 빛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뢴트겐이 발견한 새로운 광선은 빛과 같이 직진을 하며, 자기장이나 전기장에 의해 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뢴트겐 자신은 X-선을 19세기를 통해서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왔던 에테르의 압축에 의해서 생기는 종파(longitudinal wave)로 해석했다. 당시에 빛은 압축 가능한 매질에서 전파되는 소리와는 달리 횡파(transverse wave)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만약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압축이 불가능한 완전탄성체라는 극히 이상적인 매질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그런데 만약 에테르가 조금이라도 압축이 가능하다면 소리와 같이 빛의 종파 성분이 존재할 수 있고, 바로 이것이 뢴트겐이 발견한 X-선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스톡스는 X-선이 기본적으로는 아주 높은 주파수를 지닌 횡파로서 개별 음극선이 아주 빠르게 충돌함으로써 생기는 일종의 충격파라는 설을 제안하였다. 맥스웰 전자기학의 대가인 J.J. 톰슨마저 스톡스의 가설을 인정한 이후 X-선의 편광 실험까지 밝혀지면서 충격파 가설은 1905년까지 X-선의 본성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견해가 되게 된다.
레나르트의 방아쇠 가설
1905년경부터 우선 X-선의 이온화 성질에 관한 이해가 진전되면서 X-선에 대한 충격파 해석에 문제가 있음이 서서히 제기되었다. 우선 X-선이 모든 기체 원자들을 이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만을 이온화시킨다는 것이 설명되어야만 했다. 또한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크다고 하는 특이한 성질도 설명되어야만 했다. 1902년 레나르트는 광전효과에 관한 실험을 하던 중 자외선에 의해서 방출되는 전자의 속도가 빛의 강도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이런 광전효과 현상을 원자 속의 전자는 이미 원자 속에서 퍼텐셜 에너지에 해당하는 속도를 얻고, 빛은 단지 전자를 방출시키는 방아쇠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방아쇠 가설(triggering hypothesis)를 제기했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큰 이유도 이 방아쇠 가설로 설명했다.
광양자 가설의 등장
한편 1905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1955)이 광양자 가설에 입각해서 광전효과를 설명한 이후부터는 독일에서 X-선에 대한 다양한 양자론적인 해석들이 나타났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광양자라는 국소적으로 독립된 에너지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레나르트가 방아쇠 가설로 설명했던 광전 효과 설명을 이 새로운 광양자 가설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양자 가설에 의하면 빛에 의해 튀어나오는 광전자의 최대 속도는 빛의 세기와 무관하고, 빛의 진동수만이 전자가 받는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이 광양자 가설은 당시의 과학자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과학자들에 의해서 널리 수용되고 있었던 빛의 파동설은 빛과 관련된 아주 많은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광전 효과는 잘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빛의 간섭 현상을 비롯한 몇몇 현상들을 당시 과학자들에게 납득이 갈 정도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1905년 양극선에서 나오는 양이온선(canal ray)의 도플러 효과를 발견한 슈타르크는 이 양이온선에서 관찰된 현상과 연관하여 광양자 가설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X-선의 성질을 광양자 가설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테르 파동설'과 광양자 가설을 동시에 적용해 본 슈타르크는 전통적인 연속체 물리학의 무비판적인 적용을 반대했으며, 광양자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이유를 독일의 과학자들의 구미에 맞게 제시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에서 빛에 대한 양자론적 해석이 서서히 수용되면서 레나르트에 의해 제기된 방아쇠 가설은 점차로 힘을 잃어갔다.
X-선 회절 실험: 라우에 반점과 브래그 부자의 실험
광양자 가설이 등장하고 X-선에 대한 입자론적 가설이 대두되었지만 1911년까지도 X-선이 전자기파인가 아니면 입자인가 하는 것은 좀처럼 분명한 형태로 결판이 나지는 않았다. 한편 X-선 발견으로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뢴트겐은 1900년 뷔르츠부르크를 떠나 뮌헨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 소장 겸 물리학 교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뢴트겐은 이 뮌헨에서 대학의 엄청난 지원 속에서 거대한 연구 시설을 갖춘 연구소를 꾸려나갔다. 이 거대한 연구소 옆에는 이보다는 규모가 작은 이론 물리학 연구소가 하나 있었는데, 1906년 좀머펠트는 뢴트겐의 추천으로 이곳의 교수로 오게 되었다. 결정격자에 의한 X-선 회절 실험에 성공해서 X-선이 파동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밝힌 곳은 X-선을 발견한 뢴트겐이 꾸민 거대한 연구소가 아니라, 바로 이 거대한 연구소 옆에 있었던 좀머펠트의 작은 이론 물리연구소였다.
좀머펠트 역시 X-선의 본성에 대해 연구한 학자였는데, 그는 특히 우수한 학생들을 발굴, 교육, 육성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좀머펠트 연구실에는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 1960)라는 강사가 있었다. 그는 베를린 대학의 막스 플랑크 밑에서 상대성 이론과 광학에 대한 연구를 한 뒤 1909년부터 이곳에서 강사 생활을 하는 이론 물리학자였다. 또한 좀머펠트의 연구소 내에는 이론 물리학 분야 이외에 작은 실험 분과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조교로 일하던 사람이 바로 발터 프리드리히(Walther Friedrich, 1883 1968)였다.
라우에는 만약 X-선이 아주 짧은 파동이라면 아주 규칙적인 원자 배열로 이루어진 결정 격자를 통해서 나오는 밝고 어두운 회절 무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막스 폰 라우에의 이 같은 생각에 대해서 정작 뢴트겐과 좀머펠트와 같은 뮌헨 대학의 물리학 교수들은 강한 의문을 내비치며 회의를 표명했다. 막스 폰 라우에는 자신의 이 생각을 실험실에 있던 발터 프리드리히에게 개진해 보았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실험실의 한 젊은 박사과정 학생과 함께 이들 3명은 X-선 회절 실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황산구리 결정격자에 X-선을 쏘는 실험을 통해서 좀머펠트 연구소의 젊은 과학자들은 X-선이 결정 격자를 통과할 때 회절과 간섭을 일으켜 사진 건판에 소위 라우에 반점이라는 여러 반점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으로 그들은 X-선이 아주 짧은 파장을 지닌 전자기파라는 것을 밝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격자의 존재를 실험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X-선 회절 소식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6월 10일 아인슈타인은 막스 폰 라우에에게 "당신의 실험은 물리학이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합니다."라는 내용의 축하 엽서를 보냈다.
뮌헨의 젊은 과학자들이 얻어낸 놀라운 실험은 곧 영국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이와 관련된 실험을 하도록 자극했다. 특히 영국의 윌리엄 H. 브래그와 그의 아들 W. 로렌스 브래그(William Lawrence Bragg, 1890 1971)는 선택적 반사 방법을 활용하여 X-선 회절 법칙을 얻어냄으로써 결정 격자를 매우 간단한 수학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리하여 이들의 실험은 X-선결정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생명 현상에 대한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분자생물학의 성립에도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2년에서 1913년에 걸쳐 이룩한 X-선 회절 실험에 대한 노벨상 위원회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1914년 막스 폰 라우에는 자기의 스승 막스 플랑크보다 먼저 노벨상을 받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브래그 부자도 X-선 회절 실험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베크렐
방사능 물질이 방사능을 방출하는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방사능의 국제단위(SI)로 베크렐(Bq)로 표시한다. 종전에는 방사능 단위로 큐리(Ci)를 사용하였다. 베크렐선을 발견한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투안 앙리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1908)의 이름에서 붙였다.
방사선의 양을 측정하기 위하여 방사능 단위와 방사선량 단위를 사용하며, 방사선량의 단위는 흡수선량 단위와 등가선량 단위로 나눌 수 있다. 방사능 단위는 국제단위(SI)로는 베크렐(Bq=/s)을 사용하고 종전단위로는 큐리(1Ci = 3.7 × 1010 Bq)를 사용했다.
방사선량 단위 중 흡수선량 단위는 종전단위로는 라드 (1rad = 0.01Gy)를 사용했고 국제단위(SI)로는 그레이(Gy=J/kg)을 사용한다. 등가선량 단위는 종전단위로 렘 (1rem = 0.01Sy)을 사용했고 국제단위(SI)로는 시버트(Sv=J/kg)을 사용한다.
X-선 법석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프랑스의 과학자 베크렐은 우라늄염을 올려 놓았던 사진 감광지에 우라늄 광물의 자국이 찍힌 것을 보고 우라늄에서 X-선과 비슷한 광선이 나온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를 베크렐 선이라고 불렀다. 베크렐이 그 원리의 해명을 대학원생 마리 퀴리에게 맡겼고 마리 퀴리는 마리는 남편 피에르의 도움으로 베크렐선의 세기는 우라늄 원소의 함량에 비례하고 우라늄의 물리적 화학적 상태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마리는 자신의 박사 논문 <베크렐선의 해명>에서 방사선은 원자 내부에서 베크렐 선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우라늄뿐만 아니라 토륨이라는 물질에서도 베크렐선과 비슷하지만 훨씬 세기가 강한 광선이 방출됨을 발견하여 이를 방사선 또는 방사능(radioactivity)라고 명명한다. 이에 우라늄 토륨 이외에도 방사능 물질이 있을 거라 추측하고 찾던 중 우라늄보다 330배다 강한 방사능을 내는 물질을 찾아내고 인류가 파악하지 못한 새로운 원소임을 직감한다. 자신의 조국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 이름 붙였다. 퀴리 부부는 연이어서 라듐까지 발견하여 제 3회 노벨 물리학상을 스승 베크렐과 함께 공동 수상하였다. 후에 마리 퀴리는 라듐 염화물에서 순수한 라듐 금속을 얻어내는 실험 방법이 갖는 가치를 인정받아 11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로써 마리는 최초의 여성 노벨 수상자에 이어 최초의 2회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로렌츠 변환
네덜란드의 수학자겸 물리학자 헨드릭 안톤 로렌츠가 전자기학과 고전역학 간의 모순을 해결해 낸, 맥스웰 방정식을 보존하는 변환식을 발견했다. 로렌츠는 허황된 에테르 가설을 믿었고,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로렌츠 변환 식의 의미가 재해석 되었다.
로렌츠의 주요한 목표는 전기·자기·빛의 관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맥스웰의 이론에 따르면 전자기 복사는 전하의 진동에 의해 생겨나지만 빛을 내는 전하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훗날 로렌츠는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도 하전 입자로 구성되어 있을지 모르며, 원자 안에 있는 이 하전 입자들의 진동이 빛의 원천일 것이라고 가정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한 자기장은 반드시 진동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따라서 생겨나는 빛의 파장에도 영향을 미쳐야 했다. 1896년 그의 제자였던 제만이 '제만 효과'로 알려진 이 현상을 증명해 1902년 그들은 이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다.
제만 효과
광원을 강력한 자기장 안에 두고, 거기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을 조사했을 때, 관측되는 스펙트럼선이 여러 개로 갈라지는 현상이다. 이 스펙트럼선의 개수에 따라 정상 제만 효과와 이상 제만 효과로 나눌 수 있으며, 정상 제만 효과는 스승인 로렌츠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었으나 이상 제만 효과는 후에 양자 역학이 확립된 후에야 전자의 스핀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분자의 내부 구조를 들여다 볼 수 있게끔 한 기술 핵자기공명(NMR)의 이론적 바탕이 된 이론이다.
밀리컨의 기름 방울 실험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10년을 전후해서 물리학계에서는 자연에 존재하는 최소 전하량의 존재를 둘러싸고 두 물리학자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 이후 여기에 참가했던 두 물리학자들은 과학계에서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 논쟁에 참가했던 두 논객 중 한 사람은 전자의 기본 전하량을 측정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으나, 다른 한 사람은 전자의 최소 전하량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정신적으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밀리컨이 전자의 기본 전하량을 측정하는 실험을 계속 개량하고 있는 동안 유럽 대륙에서도 이와 유사한 실험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곧 전자의 기본 전하량의 존재 유무를 놓고 밀리컨과 평생 동안 논쟁을 하게 되는 펠릭스 에렌하프트였다. 에렌하프트는 밀리컨에 비해 11살 아래의 젊은 과학자였지만, 적어도 과학적 연구 경력과 명성에 있어서는 밀리컨에 비해 훨씬 앞선 인물이었다.
밀리컨이 물방울을 이용하여 기본 전하량을 측정해서 이를 발표한 것을 본 에렌하프트는 1910년 4월 갑자기 자신이 전자의 전하량보다 더 작은 전하량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1910년 5월 12일 에렌하프트는 빈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전자 이하의 하전입자'(subelectron)하는 단어를 만들어냈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자연계에서 나누어지지 않는 전하량은 1× 10-10(esu) 혹은 그 이상의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그는 금 입자의 전체 전하량이 5×10-11에서 1.75×10-10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에렌하프트와 그의 학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자의 절반, 50분의 1, 100분의 1, 심지어는 1000분의 1의 양까지 발견했다. 에렌하프트가 이렇게 전자의 기본 전하량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 이면에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었던 반원자론적 분위기가 부분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다. 경험비판론이라는 상대주의적 지식관을 주장했던 마흐는 죽을 때까지 원자의 존재를 부정했다.
에렌하프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 전하량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 개선해나갔다. 이미 밀리컨은 1909년 가을부터 1910년 봄 사이에 물이나 알코올 이외에 기름방울에 의한 전하량 측정 실험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동차 엔진오일로 사용되는 기름은 상대적으로 휘발성이 낮기 때문에 기름 방울이 오르내리는 것을 30분에서 4시간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측정할 수 있었다. 물 이외에 기름 방울을 선택한 것은 밀리컨이 기본전하량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이룬다.
많은 오차 요소를 제거해나간 끝에 마침내 1913년 6월 2일 밀리컨은 4년에 걸친 그의 실험의 결과를 『피지컬 리뷰』에 발표했다. 당시에 그가 발표했던 기본하전량은 4.774 ± .009 × 10-10(esu)였다. 밀리컨은 자신이 얻은 값을 페랭(Jean Baptiste Perrin) 등이 브라운 운동을 이용해서 얻은 값, 플랑크의 열복사 이론에서 얻은 값, 레게너가 방사선 방법으로 얻은 값과 비교해서 이들의 평균값이 기름 방울 방법에 의해 얻은 값의 오차의 한계 내에 있음을 보였다. 더 나아가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 전하량이 정확하게 측정됨으로써 분자의 기체상수, 플랑크 상수, 볼츠만 상수 물리학에 기본이 되는 여러 기초 상수들도 새롭게 계산될 수 있었다.
유적 실험이 마무리되는 동안 밀리컨은 그 동안 자신이 미루어 놓았던 광전 효과에 관한 실험에 새롭게 착수하였다. 광전효과에 관한 실험은 밀리컨이 이미 1906년부터 하던 실험이었는데, 당시에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관한 논문도 알지 못했으며, 실험 자체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12년 이제는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대한 논문을 알게된 밀리컨은 광전 효과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당시까지 입사선의 진동수와 광전자의 속도와 관련된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의 유효성을 실험적으로 정확하게 입증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오히려 1914년 독일의 람사우어(Carl Ramsauer)가 측정한 실험에 의하면 입자 진동수에 따르는 광전자의 최대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고, 속도 분포도 입사광의 파장과는 독립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1915년까지의 주의 깊은 실험을 통해서 밀리컨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의 유효성을 실험적으로 분명하게 입증해낼 수 있었다. 그는 입사광의 진동수와 퍼텐셜 에너지 사이에 선형적 관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그래프를 통해 보여주었으며, 이 선의 기울기가 플랑크 상수를 전자의 전하량과 나눈 값이라는 것도 확인함으로써 플랑크 상수를 아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이 나타내는 다양한 모습을 다각도로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자체는 믿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빛의 파동론을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배제한 채로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관한 방정식만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던 것이다.
밀리컨은 과학 발전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더욱 중요시하는 보수적 유형의 물리학자였다. 그는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과 같은 혁명적 이론이 출현하는 것을 과학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본 것이 아니라, 실험 장치를 개선하고 물리량을 될 수 있으면 정확하게 측정하는 과정이 곧 과학 발전에 가장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광양자론을 부정하면서 광양자 방정식은 입증하기도 했다. 우주선(cosmic ray) 연구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시켜 양전자를 발견한 칼 앤더슨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에디슨 효과
700 ~ 2700℃로 가열된 금속이나 금속산화물 반도체 표면에서 전자가 방출되는 현상이다. 열에 의해 에너지를 얻은 전자가 전자를 속박하는 정전기력을 이겨내어 분리되어 고체 표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으로 진공관, 방전관 등에 응용된다. 어떤 금속에서 전자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일 함수(속박에너지)만큼의 에너지가 가해져야 한다. 넓은 의미의 에디슨 효과는 열전자 방출을 뜻한다. 가열에 의해 금속표면을 이탈한 전자는 (-)전하를 띠므로 나머지 한 극에 (+)극을 연결하면 전기력에 의해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극을 연결하면 같은 극이므로 척력이 작용해 전자가 이동하지 않고 전류가 흐르지 않게 된다.
플레밍은 에디슨 효과를 이용하여 진공관을 개발하여 다이오드를 만들어 무선전신의 검파에 이용했다. 1906년에는 미국의 드 포리스트가 2극진공관에 다른 전극을 넣어 전류의 흐름을 제어하여 증폭작용을 하게 했으며, 이를 보완한 4극관 5극관 등이 만들어지게 된다. 오웬 윌란스 리차드슨(Owen Willans Richardson)은 열전자방출에 관한 연구로 1928년 노벨상을 받았다.
리처드슨의 법칙
금속에는 자유전자 즉, 금속 내에 비교적 속박 없이 움직이는 전자들이 있다. 이 자유전자의 속력은 일정하지 않고 통계분포를 따른다. 한 전자가 금속 표면에서 튀어나올 때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일함수(work function)라고 한다. 이 일함수는 금속의 특성이며 수 일렉트론볼트이다(eV: 전자가 1볼트의 전위차를 지날 때 얻는 에너지).
그리드
한 번에 한 곳만 연결할 수 있는 기존의 월드와이드웹(WWW)과 달리 동시에 여러 곳과 연결해 마치 신경조직처럼 작동하는 인터넷망(網) 구조를 말한다.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포스터(Ian Foster) 교수가 창시하였고, 1998년부터 구축계획에 들어갔다. '그리드'는 진공관의 음극과 양극의 중간에서 전류의 흐름을 통제하는 '격자(格子)'에서 유래한 용어로, 기존의 웹과 차세대 인터넷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적게는 수십 대에서 많게는 수백만 대의 퍼스널컴퓨터(PC)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어 제어할 수 있어 가상 슈퍼컴퓨터로도 불린다. 인터넷은 이용자가 모든 정보를 담은 서버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는 수직 구조인 반면, 그리드는 동시에 여러 사이트와 연결해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수평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컴퓨터와 연결해 동시에 같은 연구를 수행할 수도 있고, 한 사람이 찾은 자료를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보면서 서로 의견을 나눌 수도 있다. 나아가 한 대의 컴퓨터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컴퓨터를 원격 조정해 복잡한 계산을 나누어 시킨 뒤 이들을 다시 하나로 합칠 수도 있다. 또 슈퍼컴퓨터처럼 고속연산과 많은 양의 데이터 처리가 가능해 정보기술(IT)·나노기술(NT)·생명과학(IS) 등 다양한 분야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네트워크로 평가 받는다.
백열전구
진공 속에서 금속을 가열하면 전자가 방출되고 필라멘트 주위에서 무리 지어 존재하게 된다. 필라멘트가 녹는 것을 방지하고, 진공관 내부가 고온을 유지하게끔, 기체를 넣어 주어야 하는데 공기를 넣으면 필라멘트가 산화되는 문제점이 있어서 아르곤과 질소의 혼합 기체를 넣어준다. 단 고열에 의해 팽창과 수축을 크게 하는 것을 감안하여 저온에서 0.8기압을 유지하게끔 넣어준다.
2극 진공관 에디슨 효과를 이용하여 플레밍이 만든 진공관. 정류 작업이 가능하여 교류를 직류로 바꿀 수 있고 원론적인 다이오드이다.
3극 진공관(Audion) 리 드 포레스트가 플레밍 진공관을 개선하여 그리드를 첨가한 진공관 RF파를 검출하여 본격적인 라디오와 TV의 시대를 여는 직접적인 촉발이 되었다.
컴퓨터의 시작
1835년 영국의 찰스 베비지는 고속의 연산 기계를 설계한다.
1933년 미국의 뉴딜 정책으로 인해 기업들은 방대한 규모의 통계적 연산을 필요로 했다. 그때까지 IBM의 전신 CTR사는 타자기 제조 업체에 지나지 않았다. CTR은 펀치 카드를 이용한 테뷸레이팅 머신을 개발하여 미국 연방 인구 센서스국에 납품하였다. 8년에 걸쳐 분석되던 통계처리 수개월 만에 마무리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최초의 입출력 프로세싱이 이룬 쾌거였다. 그 후 100년에 걸친 컴퓨팅 산업의 중심에 IBM이 서게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에 IBM의 테뷸레이팅 머신은 사람들 사이에 슈퍼 컴퓨터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1950년대부터 메인 프레임 분야를 독식하던 IBM은 1981년 PC의 시대를 연다. IBM은 1990년 IT 서비스 회사로 변신을 하고 PC 사업부를 중국에 팔았다.)
1941년 IBM의 자금 지원을 등에 업은 콘라드 추제(독)가 기계식이지만 프로그래밍이 가능하고 실제로 작동하는 컴퓨터 Z3를 소개한다.
1942년 아이오와 대학의 아나타소프 교수와 제자 베리는 진공관을 이용한 최초의 컴퓨터를 소개했다. 계산과 메모리가 분리되어 있었으며 단일 목적을 위한 단일 계산에만 쓰이는 10진법 연산 컴퓨터로 프로그래밍은 불가능했다. 뒤이어 나온 영국의 콜러서스가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최초의 진공관 컴퓨터가 되었다.
애니악의 의미
본격적인 전자 컴퓨터 시대를 연 컴퓨터는 누가 뭐래도 1946년에 선을 보인 애니악이다. 애커트와 모클리에 의해 개발된 애니악은 단연 세계 최대였으며 최고였다. 2만개에 가까운 진공관이 사용되었고 27톤이나 나갔으며 1초에 17만J의 에너지를 먹어 치우며 1초에 5000번의 덧셈을 할 수 있었다. 미분과 적분을 덧셈과 뺄셈으로 해내는 괴물이었다. 노련한 수학자들이 20여 시간 매달려야 해결했던 미사일의 탄도 계산을 30초 만에 끝내는 기염을 토해내기도 했다. 애니악 이전에도 수 많은 컴퓨터가 있었지만 가공할만한 속도의 계산력은 불가능으로 여겨졌었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것은 애니악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애니악의 등장은 현대 컴퓨터사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일대의 사건이었다.
탄도 계산 이외에도 애니악은 날씨 예측 수소 폭탄의 제조, 우주선(cosmic ray) 등 여러 계산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도시의 전력 사용량과 맞먹는 에너지 식성, 수명이 짧고 고장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진공관 문제, 잦은 고장과 유지 보수 문제, 수 주에서 수 개월까지 걸리는 리프로그래밍 문제, 10진법 연산 등 많은 문제점을 숙제로 남기고 1955년 벼락 맞아 죽는다.
현대적 의미의 컴퓨터
앨런 튜링은 컴퓨터 연산 방식으로 2진법을 주장했고 폰 노이만은 프로그램 내장형 방식을 제안했다. 현대의 모든 컴퓨터는 아직까지 2진법과 프로그램 내장 방식을 쓰고 있기 때문에 현대적 컴퓨터의 특징은 언제나 2진법과 프로그램 내장 방식이 꼽힌다.
특히 폰 노이만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애니악의 문제점을 개선코자 애니악 개발자들과 함께 2진법과 프로그램 내장형 컴퓨터인 EDVAC을 기획한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실험 수학자 윌크스는 EDVAC 보고서 초안을 읽고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컴퓨터에 폰 노이만 방식을 적용한다. 윌크스의 컴퓨터 EDSAC이 EDVAC보다 3개월 정도 먼저 개발되었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최초의 컴퓨터라는 영예는 EDSAC이 차지 하지만 프로그램 내장형을 제안한 사람이 폰 노이만인 점을 감안한다면 폰 노이만이 애커트, 머클리와 함께 에니악을 개선한 EDVAC을 현대 컴퓨터의 시조로 보아도 무방하다.
초기의 진공관 컴퓨터들은 탄도 미사일의 궤적 계산이나 암호 해석과 같은 군사적 요구로부터 개발되었고 국방성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지만 애니악은 군사적 목적 말고도 다른 용도로 많이 쓰였다. 최초의 다목적 컴퓨터나 범용으로 쓰인 컴퓨터는 애니악일지 모르지만 범용 또는 상업용으로 처음부터 개발되고 공장에서 양산이 된 최초의 컴퓨터는 UNIVAC(1951)이 최초이다. 특히 UNIVAC은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예측을 CBS와 상반되게 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물론 선거 결과는 UNIVAC의 예상대로 아이젠하워의 압승으로 끝났다.
벨 랩의 3총사
기업가 정신의 총 본산이자 벤처 기업 경의 모델로 여겨지는 곳, 모든 공학도들에게 꿈과 현실을 이어주는 곳, 많은 투자자들에게 대박과 쪽박을 모두 안겨 주는 곳이 캘리포니아 남부 뜨거운 태양 아래에 있다. 그 곳은 땅바닥에 2번째로 많은 원소 실리콘 밸리라고 불린다.
빌 게이츠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장 가 보고 싶은 순간이 1947년 12월 23일이라고 한다. 에디슨 효과에서 시작된 진공관 문명이 고체 반도체 문명으로 쉬프트 되는 순간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1947년 12월 23일 벨 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 윌터 브래튼, 존 바딘 3명은 포레스트가 만든 3극 진공관이 아닌 고체 물질을 통해 100배나 커진 ‘Hello’를 회사 중역들에게 들려 주었다. 연구소 소장은 그 고체 물질을 반도체 또는 트랜지스터라고 불렀다.
진공관은 인류에게 전자를 알려주었고 인류는 진공관을 통해서 전자를 제어했다. 그것이 2극 진공관 3극 진공관이었다. 하지만 진공관은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거추장스러울 정도의 덩치와 부담을 주기에 충분한 전기 에너지 식성, 그러면서 ‘톡하고 건들면 깨질 것만 같은 그대’였다. 인류에게 큰 선물을 주기는 했지만 차가운 외면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 당시 과학자들 사이에는 유리와 같은 부도체적 특성과 구리와 같은 도체적 특성을 모두 가진 물질을 찾기만 하면 전기와 자기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팽배해 있었다. 또한 이런 믿음을 가장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던 사람이 윌리엄 쇼클리였다.
벨 연구소의 모기업이자 미국 최대의 통신 회사인 AT&T사는 이러한 반도체의 출현에 목말라 하고 있었고 반도체라는 신소재 개발을 위해 최고의 고체 물리학자 3명을 묶는다. 그들은 회사의 기대에 부응했으며 노벨 물리학상까지 수상했다.
사실 크리스마스 전전 날 회사 중역들이 반도체를 통하여 증폭된 소리를 들을 때 윌리엄 쇼클리는 없었다. 최초의 반도체는 우정이 돈독한 브래튼과 바딘의 연구 결과였고 그 둘 만이 개발자로 언급되었다. 하지만 셋 중 나이가 가장 어린 쇼클리는 일주일 만에 브래튼과 바딘의 반도체가 갖는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샌드위치형 반도체를 만들어내고 뉴스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회사에서 반도체 개발팀은 3명이었고 동급의 대우를 해주었으나 이에 불만을 가진 쇼클리는 나머지 2 사람을 배격한다. 신사 브래튼마저 그 후 평생 쇼클리를 보지 않았을 정도로 쇼클리의 악행은 저질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바딘은 초전도체 분야로 관심 분야를 바꾸어 후에 다시 한번 노벨상을 수상한다.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다.
고위 관리직으로 승진시켜주지 않은 회사의 대우에 불만이었던 쇼클리는 회사를 떠날 것을 결심하지만 어떠한 회사도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쇼클리는 투자를 받아 자신의 회사를 차리기로 마음을 정했다. 쇼클리가 세운 회사의 주소는 캘리포니아 주 산 안토니오 391번지 살구 저장 창고였다. 현재 그곳에는 실리콘 밸리가 시작된 곳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8인의 배신자와 실리콘 밸리
회사를 차린 쇼클리는 젊고 유망한 과학자들을 모았다. 그 중에는 인텔의 창립자인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도 끼어 있었다.
쇼클리의 괴팍한 성격과 게르마늄 고집에 불만을 품은 8명은 반란을 시도한다. 투자자(엔젤)에게 쇼클리의 경영권 제한을 요구했다. 하지만 투자자는 쇼클리의 손을 들어 주었다. 고립된 8명은 회사를 나와 페어차일드 그룹의 지원을 받아 페어차일드 반도체란 이름의 회사를 차린다. 그리고 8인의 배신자들은 실리콘 소재를 사용한 트랜지스터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이는 그 동안 불가능했던 트랜지스터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하였고 8인의 배신자가 당시 최고의 기술력을 가졌음을 증명해주는 사건이었다. 그 후 페어차일드는 시대의 기술 선도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페어차일드 그룹은 8인의 멤버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도 않았고 회사 본사 사람들을 낙하산식으로 페어차일드 반도체에 보냈다. 이에 불만을 느낀 8인의 배신자들은 하나 둘씩 회사를 그만두었다. 멤버중 리더 역할을 한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만이 최후까지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페어차일든 본사에서 보낸 사장과의 불화가 커지면서 로버트 노이스는 회사를 그만둘 결심을 한다. 회사를 그만둔 로버트 노이스는 고든 무어에게 함께 회사를 창업하자고 제안한다. 원래부터 단짝 사이였던 고든 무어는 로버트 노이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페어차일드 그룹과 연결시켜준 뉴욕의 금융가인 아서 록에게 투자자를 모집해달라고 부탁한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가 새로운 사업을 한다고 하자 미국 전역에서 투자자들이 줄을 섰다. 당사자만 몰랐을 뿐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그 동안의 여러 실적 덕분에 반도체 분야에서 슈퍼스타와 같은 존재였다. 둘이 작성한 사업 계획서라고 해봐야 냅킨에 적어둔 메모밖에 없음에도 불과하고 단 하루 만에 250만 달러나 되는 돈을 투자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고 하자 언론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그 둘은 업계에서는 유명인사였다.
처음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는 회사이름을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노이스-무어 일렉트로닉스(Noyce-Moore Electronics)로 정했다. 하지만 노이즈가 많다(Noise Moore)라는 소리로 들린다는 의견에 따라서 통합을 뜻하는 Integrate와 전자를 의미하는 Electronics 두 단어를 조합해서 회사이름을 인텔(INTEL)이라고 결정한다. 인텔의 첫번째 직원은 앤디 그로브이다. 앤디 그로브는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출중한 실력으로 명성을 드높였던 직원이었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 그리고 앤디 그로브는 완벽한 삼두체제를 이루며 인텔의 성공을 이끌었다. 로버트 노이스는 하나의 기판에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는 기술에 있어서는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는 이런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까지 없었던 제품을 개발하려 했다. 이러한 고민 끝에 등장한 제품이 바로 메모리이다. 로버트 노이스가 인텔이 만들어야 할 제품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면 실제의 시제품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고든 무어가 있었다. 로버트 노이스가 설계도를 그렸다면 이를 구현한 건 고든 무어였던 것이다.
우리가 CPU 전문 회사로 알고 있는 인텔이지만 사실 인텔의 시작은 메모리회사였다. 그런데 메모리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대량생산이었다.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대량 생산 과정에서 번번히 좌절되었다. 이때 활약한 사람이 바로 앤디 그로브였다. 1969년 첫 번째 메모리가 개발됐지만 실제 대량생산에 들어간 것은 1970년이었다. 앤디 그로브는 공장의 모든 설비를 직접 세팅하였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뽑고 교육을 시켰다. 초기 메모리의 양산율은 10% 밖에 안되었다. 10개를 만들면 9개가 불량품이었는데 이를 개선시키기 위해서 앤디그로브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나중에는 성공률을 50%로 끌어 올렸다. 이 과정에서 앤디 그로브는 먼지가 반도체 생산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미세 먼지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진복을 최초로 고안한다. 인텔의 광고를 보면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춤을 추는데 이와 같이 방진복은 어느덧 인텔의 상징이 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인텔의 창업자를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로 알고 있지만 앤디 그로브 역시 창업자 대우를 해준다. 앤디 그로브는 그 자신 스스로 창업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만약 자신을 제외하고 창업자를 이야기하면 화를 낼 정도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 그리고 앤디 그로브의 활약 덕분에 인텔은 주식시장에 상장된 후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면서 벤처 신화를 완성한다. 인텔이 실리콘 밸리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실리콘 밸리라는 단어 자체가 사실은 8인의 배신자들을 취재하던 돈 회플러가 탄생시킨 말이다.
CPU에 대하여
ALU CU Register로 이루어진 CPU 코어는 그 자체로 사용이 불가능하여 여러 개의 핀과 캐시 메모리, 버스 등을 연결하여 사용한다. 하나의 CPU에 코어가 여러 개 있으면 멀티 코어, 마더보드에 여러 개의 CPU가 연결되어 하나의 메모리를 공유하고 있으면 멀티 CPU, 멀티 프로세싱이라고 한다.
00011100과 01110000은 모두 8bit이지만 다른 전기 신호이다. 01110은 5bit 크기의 전기 신호이다. 이런 전기 신호를 1초 동안 처리할 수 있는 양으로 CPU의 성능을 표시하는 데 클럭 수라고 부르며 단위는 Hz를 사용한다.
소위 메인 프레임이라고 불리는 중대형 컴퓨터는 개인용 컴퓨터와는 전혀 다른 형식의 CPU를 사용한다. 개인용 컴퓨터가 복잡하고 긴 문장의 명령어를 사용하는 CISC 방식이라면 IBM이 선도하는 중대형 컴퓨터에서나 공학도들이 즐겨 사용하는 워크스테이션에서는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의 명령어를 사용하는 RISC 방식으로 설계된다.
인텔의 CPU는 상품명 8086이 IBM의 5150에 들어가면서부터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다. 오픈 플랫폼을 선택한 IBM이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IBM이 열어 젖힌 8bit 시장을 넘어 인텔은 16비트 시장을 주도했다. 그때부터 AT 또는 286 컴퓨터라는 말이 쓰였으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컴퓨터 형태였다.
32비트 연산이 가능해지면서 386이라고 불렸으며 RISC 방식을 흉내내면서 연산 속도가 빨라져 486이라고 불렸다.
펜티엄은 일종의 586 이라고 부르던 CPU를 말한다. 586이라 부르지 않고 Pentium으로 이름을 바꾼 이유는 미국 정부에서는 이름이 숫자로 된 물건에는 이름에 대한 저작권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Intel의 경쟁사들이 똑같이 386, 486이라는 이름을 달고 CPU를 생산하고 있었다.
소비자는 혼란스러워지고 Intel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이름을 펜티엄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펜티엄(Pentium)은 현재까지도 많은 PC에 사용되고 있는 CPU로, 75MHz∼200MHz라는 높은 동작 클록을 갖추었고, L1·L2 캐시의 확장을 통해 상당한 속도 향상을 가져왔다.
그 후로 멀티 미디어 기능을 강화한 펜티엄 MMX, 소켓 방식에서 슬롯 방식으로 메인보드에 장착되는 펜티엄2, 다시 소켓으로 돌아온 펜티엄3, 하나의 코어에 가상의 코어를 덧붙여 속도를 향상시키는 하이퍼 쓰레딩 기법이 사용되었으나 메인보드가 받쳐 주지 않아서 엄청난 실망감만 안겨준 프레스캇, 싱글 코어로는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노스우드로 대변되는 펜티엄4로 싱글 코어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인텔 사는 클럭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하나의 물리적 CPU에 2개의 연산 장치를 얹어 놓는 듀얼 코어를 시장에 내놓았지만 캐시 메모리를 각각 쓰고 있었기 때문에 성능 향상에 크게 기여하지 못한 채 시장의 냉담한 반응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 후 2개의 코어가 캐시 메모리를 공유하는 코어2듀오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멀티 코어의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인텔에게 숙명의 라이벌인 AMD의 탄생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다름이 아닌 인텔의 창업자 로버트 노이스였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독립한 제리 샌더스와 동료들은 AMD를 창업하기 위해 투자자를 모집하지만 인텔과 다르게 투자를 받지 못했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로버트 노이스는 전 직장의 동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일부러 AMD에 자금을 투자한다. 업계의 슈퍼스타인 로버트 노이스가 투자를 한다고 하자 이 소식이 빠르게 외부에 알려졌고 덕분에 AMD는 쉽게 창업자금을 투자 받을 수 있게 된다.
PC의 시대
1981년 8월12일 출시된 IBM '5150'을 출발점으로 삼는 PC의 역사는 사실 적잖은 논란거리이기도 하다. IBM 모델이 나오기 전에도 PC란 꼬리표를 달고 출시된 제품들이 많기 때문인데 1975년 출시된 MIT의 알테어, 1977년 애플사의 '애플 2' 등이 모두 '집에서 쓰는 작은 컴퓨터'란 이념을 구현한 초창기 PC '전도사'였었다.
그러나 IBM 5150이 진정한 원조 PC라는 것은 시간적 최초를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본체 기술을 개방해 다른 경쟁업체도 유사한 제품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오픈 플랫폼' 제도를 채택, PC를 대중화시킨 첫 모델이란 점 때문에 첫 개인용 컴퓨터라고 사람들 사이에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5150 이후 IBM PC는 독점 체제를 고집하던 '애플' 등 라이벌 컴퓨터를 제치고 빠르게 세계 시장을 장악, 결국 PC를 'IBM 방식의 컴퓨터'와 동의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세계 최대 PC 업체 델(Dell)의 창업자 마이클 델은 최근 인터뷰에서 "IBM PC의 오픈 플랫폼 정책은 컴퓨터의 진화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업계 생태계(ecosystem)'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5150 모델은 세계 최대의 갑부 빌 게이츠를 일으켜 세운 '행운의 여신'이기도 했다.
이 제품에 넣을 운영체제(OS)를 급히 찾던 IBM 개발진이 당시 대학을 중퇴한 컴퓨터 매니아에 불과했던 빌 게이츠를 만나 며칠 안에 OS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했다. 게이츠는 OS 'MS-도스 1.0'을 건네면서 이 소프트웨어의 라이센스 권한을 차지했고 이후 IBM PC가 대박을 터뜨리자 막대한 라이센스 수입을 벌어들이며 '마이크로소프트 신화'의 기틀을 쌓았다. OS 권한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IBM으로는 두고두고 땅을 칠 후회거리가 된 셈이다.
5150 모델은 지금 데스크톱 PC의 기본 틀을 세운 제품이다. 본체만 있어 TV나 모니터에 따로 연결해야 했던 예전 PC들과 달리 본체, 키보드, 모니터가 한 데 묶인 구조였고 외부 저장 장치로는 5.25인치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를 썼다.
MS의 독과점
컴퓨터 시장이 침체기를 걷고 있던 1992년, 일리노이 대학 내 설치된 미국 슈퍼컴퓨터 연구소(NCSA)에서 아르파이트를 하던 마크 안드리슨이 만든 최초의 웹 브라우저 명칭은 모자이크였고 모자이크가 제공되자 웹이 폭발적으로 시장의 활기를 불어 넣었다. 팽 당한 안드리슨은 NCSA에서 퇴사한 후 새로운 브라우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새로 만든 회사의 이름인 Netscape는 Internet과 Virtual landscape를 합쳐서 만든 이름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넷스케이프의 첫 이름은 모질라(mozilla)였는데, 모질라는 고질라와 모자이크를 합친 단어로 모자이크 킬러를 의미한다고 한다.
1994년 10월 넷스케이프가 웹을 통해 무료로 배포되었다. 모자이크를 추월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사용자 수는 곧바로 200만 명을 넘어갔으며 95년이 되자 1000만 명이 되었다. 주식공개로 모두 부자가 된 후 1년여 동안 넷스케이프는 인터넷을 지배했다. MS가 브라우저 시장에 뛰어들기 전까지 31달러로 시작된 넷스케이프의 주식은 174달러에 이르렀고 시장점유율은 80%대에 이르게 되었다.
익스플로러는 애초에 모자이크의 코드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안드리슨의 소스코드는 다시 만들어져 넷스케이프에서 사용되고 개작되긴 했지만 익스플로러에서도 사용된 것이다. MS는 워낙 급하게 브라우저 시장에 뛰어든 것이기에 새로운 기술 유전자를 만들어낼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MS는 거대한 시장으로 변하자 브라우저 시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넷스케이프의 독주를 허용한다면 이 작은 애플리케이션이 하나의 운영체제처럼 변할 수도 있고 MS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넷스케이프의 네비게이터에 대한 준비의 일환으로 MS는 NCSA와 모자이크를 기본으로 한 웹 브라우저의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넷스케이프에 대항하기로 했다. 1995년이 되자 인터넷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중요한 목표가 되고 말았다. 회사의 최우선 전략을 인터넷으로 선정하고, 윈도우 95의 발표가 있은 지 몇 주 후 MS 익스플로러가 발표되었다. 그해 말 빌게이츠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개선이 MS의 핵심 사업이며 이를 무상으로 배포하겠다고 선언했다.
1995년 말 빌 게이츠의 선언이 있고 나서 넷스케이프의 주가는 폭락했다. 시장점유율은 여전히 높았으나 넷스케이프 사용자보다 많은 윈도우 95의 사용자들이 이미 있었고, 이들 중 많은 수기 무상의 익스플로러를 사용할 것은 분명했다. MS는 넷스케이프를 고사시키는 작업을 병행했다. 컴팩이나 HP나 AOL에 압력을 행사해 기본 브라우저로 넷츠케이프가 탑재되는 것을 방해했다. 일부 회사들에게는 익스플로러 채택에 대한 보조금을 제공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8년이 되자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는 익스플로러에게 시장점유율을 추월 당했다. 결국 그해에 넷스케이프는 프로그래밍 소스를 공개하면서 손을 놓아야 했다. 코드명은 다시 모질라(Mozilla)로 되돌아갔다. 넷스케이프는 코드가 퇴물이 되어 완전히 가치를 상실하기 전에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긴급한 결정을 내렸다.
1년도 안 된 브라우저 업체를 상대로 벌인 MS의 가혹한 탄압은 훗날 다른 업체가 중요한 아이템을 선점했을 때 어떤 위험에 처할 수 있는지를 미리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중요한 경쟁자를 몇 번만 처리하고 나면 시장의 지배는 확실시될 수밖에 없다. 나중에 MS는 법무부에 기소되었는데 중요한 혐의점은 다른 기업을 희생시킬 목적으로(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이루어진 정책, 번들링, 배타적인 계약 체결의 강요 등이었다. 수천 명의 변호사가 동원되고 관련 서류의 양도 엄청난 분량이었으나 기소는 MS에 그다지 큰 손실을 주지 않은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이후부터 암묵적으로 MS의 익스플로러를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웹에 대한 거의 모든 무의식과 문화는 MS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익스플로러의 창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분간 이보다 큰 싸움은 없을 것이다.
카피레프트
1980년 MIT 공대의 인공 지능 연구소 팀원들은 제록스사에 자신들이 쓰는 프린터기의 소스 코드를 요구했다. 여러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던 프린터기에 종이가 맞물려 들어가면 어떤 단말기의 인쇄 작업이었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린터의 명령어를 몇 개 수정 하기를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보기 좋게 거절 당했다. 그들 중 한 명이었던 리처드 스톨만은 소스 코드 공유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빌 게이츠가 DOS의 라이선스 권한으로 본격적인 카피 라이트의 기지개를 펼 때쯤에 스톨만은 유닉스의 상용화에 반대하며 자유 소프트 웨어 재단을 설립하고 GNU 라는 캐치 프래이즈를 내건다. 1991년 리누즈 토팔즈라는 핀란드 청년이 이 운동에 큰 힘을 불어 넣는 짓거리를 하게 된다. 분산형 컴퓨팅의 혁신을 가져올 OS를 개발하고 소스를 공개한 것이다. 오픈 소스 운동은 불길처럼 번져서 오늘날 리눅스 사용자는 수천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하지만 사용자 맞춤형 소프트 웨어가 힘들고 사후 관리 업데이트 비용이 상용 소프트웨어보다 비싸다는 점이 단점으로 좀 더 많은 사용자들이 이 운동에 참여를 머뭇거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클라우드 컴퓨팅
클라우드는 인터넷 기반이라는 뜻이다. 컴퓨팅의 무게 중심이 인터넷으로 옮겨 가면서 PC에 대한 제약이 없어지고 있다.
굳이 PC에 소프트웨어를 저장해 두지 않아도 인터넷 상에서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개인 저장 매체에는 기록을 남겨 두지 않기 때문에 보안성이 보장되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 기업들이 선호하고 있다. PC라는 말은 사라지고 단말기라는 말만 남을 것이다. 어떤 PC어떤 프로그램을 CD로 구매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단말기(PC, 씬클라이언트, 노트북, 핸드폰, PDA, 네비게이션 등)에서 어떤 서비스를 받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비슷하게 들리는 그리드 컴퓨팅이란 컴퓨터 자원을 네트워크 상에서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라면 클라우드 컴퓨팅이란 공장이 전기를 쓰기 위해 발전소를 따로 만들지 않고 전력 공사에게서 전기를 빌려 쓰듯이 IT를 위해 데이터베이스와 소프트 웨어를 구매하여 시스템화 하지 않고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빌려 쓴다는 개념이다. 대표적으로 구글의 앱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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