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東洋學) - 중국(中國)’이란 무엇인가?
동양과 아시아
• 東洋과 Orient
• ‘東洋’
– 14세기이후부터 중국사에 나타남.
– 송대(宋代, 960∼1279) , 광저우(廣州)와 수마트라 동부를 연결하는 선(線)의 동쪽 바다 지칭. 원대(元代,1271∼1368)에 때 동양이라고 지칭.
– 명대(明代,1368∼1688)에서는 광둥(廣東)과 보르네오를 연결하는 동경 113° 선의 동쪽 바다를 의미.
동양과 아시아
• ‘Orient’
– 어원 : 라틴어의 오리엔스(Oriens). ‘해돋이’ ‘해가 뜨는 방향’ ‘동방(東方)’의 의미
– 이란•메소포타미아•시리아•팔레스타인•아르메니아•소아시아 및 아라비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지방.
– 로마인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의 동쪽을 오리엔트라고 부름.
– 해가 지는 서방(西方) → 옥시덴트(Occident)
– 유럽과 미국에서는 지중해의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의 의미로 사용.
동양과 Asia
• ‘Asia’
– ‘Asia’ 명칭의 기원 : B.C.11∼B.C.7세기 무렵 페니키아인이 자신들이 사는 땅으로부터 동쪽을 아수(Asu;해가 뜨는 지방-앗시리아어), 서쪽을 에레브(Ereb;해가 지는 지방)라고 부른 것에서 시작.
– 그리스인이 에게해 동쪽의 지역을 막연하게 동쪽지역이란 의미로 사용 →근대 서양인들이 이를 유사음인 Asia로 재생.
– 이후 유럽인의 확대에 따라 Asia 개념이 확대
東洋 개념의 변화
• 명대(16세기이후)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와서 활동.
• 한자(漢字)로 세계지도를 설명 – 동서양을 구분
• 북태평양의 서반(西半)을 대동양(大東洋), 그 동반을 소동양. 인도양 서부를 소서양, 유럽의 서쪽을 대서양이라고 함
• 동양제국 : 루손 •몰루카 •보르네오 등
• 소 동 양 : 타이완 •류큐제도 •일본 등
• 서양제국 : 안남 •자바 •수마트라 •말래카 등
• 소 서 양 : 남인도
• 대 서 양 : 유럽
‘동양’ 개념의 문제점
• The East : 근세이후 정치, 문화적 개념에서 정립. 동양인이 이를 수용.
• The East와 The West.
→ 유럽을 기점으로 동과 서를 구분
← 터키 동쪽에 위치한 아시아 전역을 일괄하여 ¡®동¡¯으로 통칭, 우랄산맥-흑해-지중해-홍해를 연결하는 기준선으로 그 이동은 "동", 이서는 "서"로 대별.
• 문제점 : 기준
• 예) 극동, 원동, 근동, 중동, → 영국중심
'동양학(東洋學)'의 개념과 범위
• 가. 동양학의 개념
– → 실질적으로 동양학은 중국이 중심
• 나. 동아시아 3국에서의 동양학
– → 일본이 성립, 주도.
• 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목표
– 중국 → 동양학 성립과정에서 동양학은 중국 중심이 됨 → 한국에 영향
– ※ 용어 및 개념에 대한 문제점 ※
동아시아사의 의의
• ‘동양사’의 한계
→ 새로운 개념의 필요성 요청 ‘동아시아’
• ‘동아시아 세계’
– 한 나라의 역사를 ‘국가’라는 틀 속에서 고립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문화권’이라는 틀 속에서 제 ‘지역’이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역동적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파악하려는 시점
– 서구중심의 역사관에 대한 반성과 ’80년대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발전으로 본격적을 논의의 대상이 됨.
‘관계사’에서의 유의점
• 객관적 시각을 확보하기가 어려움
– 사료의 취사선택 및 사료 구성 당시 이미 주관이 개입되기 쉬움.
– 사실의 중요도, 가치, 평가 등 주관이 개입되어야 하는 경우 이 문제는 더욱 커짐.
– 예) 미국 : 이슬람, 한국 : 일본
• 모든 관계 유형을 전부 파악할 수 없음.
– 남아 있는 자료의 한계
– 관계 유형의 복잡, 다양성
→ 선택의 문제가 따른다.
‘관계사’에서의 유의점
• 역사는 ‘현재의 역사’.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에는 시대를 초월한 공통성이 있다.
– 그러나 과거의 ‘관계’ 양상을 현대와 같이 취급하는 것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
– 예) 삼국시대의 대중외교교섭과 현재의 대미교섭
중화(중국)적 세계질서
중국인의 세계관
• ‘중국(中國)’이란 무엇인가?
– 국가(國家)로서의 중국(中國)
•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이전에 중국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러나 중국이라는 말은 전통시대 문헌에 자주 등장.
• 과거 사용된 ‘중국’이라는 용어와 오늘날 우리들이 「중국」이라고 하는 용어 사이에는 지리적-공간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 ‘중국’이란 관념은 수천년에 걸쳐 사람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변동하면서 구성되고 재구성된 사상적인 산물.
‘중국(中國)’이란 무엇인가?
• 중국(中國)과 중화(中華)
– 국(國)
• 크기가 시대에 따라 다양. 사방 또는 夷狄과의 대비를 의식하여 사용
• 흥망하는 개개의 왕조를 초월한 시간적 연속성과 문화적 공통성을 가진 공간적 범위 내지는 인간집단의 의미를 지님.(예) 한국이라는 용법)
• 그러나 ‘중국’은 ‘한국’과 같은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세계의 중앙에 위치한 영역’이라는 막연한 의미.
– 전통적으로 ‘중국’이란 ‘이적(夷狄)’에 대비되는 상대적인 관념으로 사용 – ‘中華思想’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듯이 중국을 높이고 이적을 멸시하는 차별의식을 내포하고 있음.
– 이적(夷狄)
• (1) 한족(漢族)이 아니다.
• (2) 보편적인 도리를 모른다. <- 해석에의 유연성이 존재.
중국인의 천(天) 사상과 천하관(天下觀)
• 1) 천(天)과 천하(天下)
• 천(天) : 하늘. 절대자. 인격신은 아님. 백성(民, 生民)은 모두 천에서 유래함.
• 천은 대행자(天子)에게 천하의 생민(生民)을 다스리도록 함)
• 하늘로 부터 명(天命)을 받은 천자는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다스림.
중국인의 천(天) 사상과 천하관(天下觀)
• 2) 천자(天子)의 권위와 역할
– 천자 = 하늘의 아들
–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있는 유일자, 적자.
• → 봉선(封禪) 의식의 특권
– 천하에서 제일 권위있는자. 천하는 실질적으로 모두 천자에게 귀속 (왕토사상)
– 천자는 원칙상 한사람만이 존재해야 한다.
– 중국에서의 천자 : 王 → 皇帝
중국인의 천(天) 사상과 천하관(天下觀)
• 3) 천명(天命)과 혁명(革命)
– 천자는 천명을 받들어 백성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
– 만약 천자가 하늘의 뜻을 거스르거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천은 명을 거두고 새로운 사람에게 천명을 주어 이를 대신하게 한다. → 혁명(革命)
– 맹자(孟子)의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
– 동중서(董仲舒) 의 재이천견론(災異天譴論, 災異論) : 혁명론의 보완.
중국인의 천(天) 사상과 천하관(天下觀)
• 4) 천(天)의 공(公)과 가(家)의 사(私)
– 백성(民)에게 천자는 자신들을 돌봐줄 의무가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 천자(황제) = 국가 = 조정
– 조정은 천자를 보좌하여 맡은바 임무(생민을 보살필 의무)를 하는 곳.
– 국가(國家)는 일개 왕조(=私)이므로 불변이며 절대 충성의 대상은 아니다.
– 유학자들은 이런 이유로 국가의 망(亡) 보다 도(道)의 끊김을 더욱 중요시 하게 되었다.
중국인의 대외관 - 중화사상(中華思想)
• 1. 중화사상의 형성과 전개
– 1) 중화사상(中華思想)이란?
– 중국 문화가 최고, 중심이라는 민족(?)사상. 한족(漢族) 중심의 자민족중심사상. 화이사상(華夷思想). 중국대외관의 기본을 이룸
– 화이(華夷)적 세계관 : 전국시대에서 진-한에 걸쳐 형성.
– 중화(中華) : 중국 문화가 미치는 지역. 결국 전세계(天下)를 의미.
– 이적(夷狄) : 중국 문화의 변경, 외부 지역. 中華(王華)가 계속 확대되어야 할 영역.
2) 중화(中華)란 무엇인가?
• 중화란 전통적으로 이적(夷狄)과 대비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
• 중화사상, 또는 화이사상이라고 하듯이 중국을 높이고 이적을 멸시하는 차별의식을 담고 있다.
• 그러나 그 차별의식을 이적(夷狄)을 배척하고자 하는 배타성과 함께 이적을 포용하고자 하는 포용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 배타성의 예) 明末淸初 大儒 王夫之 : 중국(중화)과 이적의 구분은 군주와 소인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문란해져서는 안 된다-만주족의 중국지배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漢族의 입장
• 포용성의 예) 唐代의 韓愈 : 공자가 春秋를 저술하였을 때 제후라 해도 이적의 禮를 행하는 자는 이적이라 하고, 이적이라도 중화의 禮를 행하는 자는 중화라고 하였다-王化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적을 중국화 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됨-非漢族의 입장
3) 중화와 이적(華夷)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 춘추전국시대 이후 화이관의 두가지 개념
– 1. 실체적 개념 : 한민족(漢民族, 華)과 비한민족(非漢民族, 夷)으로 구분. 즉, 언어•풍습 등(禮 등)이 한민족과 다른 민족은 이적시 되었다.
– 2. 기능적 개념 : 문명(華)-비문명(夷)으로 구분. 즉, 인간의 보편적 도리에 대한 인식여부를 기준으로 화이를 구분하는 것. 이 개념에 따르면 주변국도 중화의 예를 받아들이면 중화에 포함될 수 있다.
3) 중화와 이적(華夷)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 중화와 이적의 구분은 일면적인 것이 아니라 양면성을 띄고 있다.
• 화이의식이 갖는 양면성 : 중국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 중국을 둘러싼 동아시아 제국의 질서체계를 지탱하는 원동력.
• 역사적으로 실체적 개념과 기능적 개념은 중첩되어 큰 문제시 되지 않음.
• → 주변부의 힘이 강성해지면서 양축의 균형이 깨어짐.
• 실체적 개념을 강조(한족의 우위를 고무하는 배외주의적인 경향)하거나 기능적 개념을 강조(주변민족 문명성의 높음을 주장)하는 언설 등 화이이데올로기는 역동적으로 다원화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 주변 제국으로의 영향 : 조선,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각각 자국 중심의 화이관을 전개
유가(儒家)와 중화사상
• 1) 공자(孔子)
– “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 이적에게 군주가 있는 것은 중원제국에 군주가 없는 것보다 못하다.
– “微管仲, 吾其被髮左襟(憲問)” :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이적이 되었을 것이다.
– →이적 멸시관이 보임. 당시는 아직 중국이 통일되기 이전이므로 제하(諸夏), 즉 중원제국의 공통적인 예의 작법을 실천하지 않는 것을 이적시 함.
• 2) 맹자(孟子)
“吾聞用夏變夷者, 未聞於變夷者也. 陳良楚産也, 悅周公? 仲尼之道, 北學中國, 北方之學者, 未能或之先也.” : 중국의 문화가 야만인을 감화시키는 것은 들었어도 야만인에게 감화된다는 것은 들은 바가 없다. 진량은 초나라 출신이지만, 주공과 공자의 도를 즐거워 하며 북방의 중국에서 배웠는데, 북방의 학자들도 또한 아직 그를 능가하는 자가 없다)
– → 주공과 공자의 도란 주(周)의 예의작법을 말하며 그 문명을 하(夏)라고 명시하고 그것이 행해지는 지역을 중국이라고 하는 아직 통일이 안된 환상적 공동체를 상정.
•
• 3) 예(禮)와 중화-이적
– 예: 고대 중국에 결집된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의작법(禮意作法)
– 부자(父子)관계는 효(孝)로서 이는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것
– 효를 행하는 것이 예가 아니라, 효를 행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해야만 하는가라는 세세한 행위규정을 ‘예’라고 한다.
– 장례식 경우의 예(禮) : 죽은 자는 북침(北枕)에서 남침(南枕)으로 옮겨 따뜻한 물로 씻기고, 자손은 큰 소리로 곡을 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예를 따르지 않는 것은 모두 이적(夷狄)이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장례식의 경우 죽은 자를 북침(北枕)으로 하고, 조문객 앞에서는 대성통곡하지 않는 것이 예이다.
– 예(禮)란 감정을 억누르기도 하며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외부로 표출하는 것은 이적(夷狄)의 도(道)이다.(禮記)
송대(宋代) 중화사상의 이론적 재편
• 송대는 이민족의 위협에 처하면서 중화사상의 새로운 전개를 보임
• 주자(朱子)는 성리(性理)의 이론을 가지고 이민족을 멸시
– 예)원숭이는 형상이 인간과 비슷하여 금수 중에서는 가장 영물이나 다만 말을 하지 못할 뿐이다. 夷狄은 인간과 금수의 중간에 위치한다. 그래서 결국 기질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朱子語類』권4, 「人物之性氣質之性」)
• 예를 정점으로 형성된 중화사상은 여기에 와서 이론적으로 재무장됨.
• 이적이나 금수는 천리로 연결되는 이(理)를 가지고 있지만, 기(氣)가 흐리기 때문에 이 기를 깨끗이 하지 않으면 본연의 이(理)를 밝힐 수 없다.
– → 기질지성을 바꾸지 않으면 이적은 결코 중화가 될 수 없다. 주자의 이론형성의 근거.
– → 이적과 중화의 구분은 소인과 군자를 구분하는 근거를 마련해 줌으로서 사회계층의 차등적 질서를 합리화
• 朱子는 예를 정비하기 위해 『儀禮經傳通解』『家禮』를 저술(그의 제자들에 의해 편찬)
중화(중국)적
세계질서
송대(宋代) 중화사상의 이론적 재편
• 송대의 대내적 대외적 상황
• 대내적 : 과거제의 확대와 문치주의(文治主義)로 인한 학문, 사상의 발달. 국방의 약화도 초래.
• 대외적 : 주변의 여러 이민족(異民族)이 성장. 이에 의한 위협이 가중.
→ 중화사상의 새로운 전개
• 이민족의 침략과 위협하에서 중화민족의 높은 자긍심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중화사상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사용됨.
송대(宋代) 중화사상의 이론적 재편
• 주자(朱子)는 성리(性理)의 이론으로 이민족을 멸시
– 예) 원숭이는 형상이 인간과 비슷하여 금수 중에서는 가장 영물이나 다만 말을 하지 못할 뿐이다. 夷狄은 인간과 금수의 중간에 위치한다. 그래서 결국 기질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朱子語類』4, 「人物之性氣質之性」)
– 예(禮)를 정점으로 형성된 중화사상은 여기에 와서 이론적으로 재무장됨.
송대(宋代) 중화사상의 이론적 재편
• 이적이나 금수는 천리로 연결되는 이(理)를 가지고 있지만, 기(氣)가 흐리기 때문에 이 기를 깨끗이 하지 않으면 본연의 이(理)를 밝힐 수 없다.
– →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바꾸지 않으면 이적은 결코 중화가 될 수 없다. 주자의 이론형성의 근거.
– → 이적과 중화의 구분은 다른 한편으로 소인과 군자를 구분하는 근거를 마련해 줌으로써 사회계층의 차등적 질서를 합리화
• 朱子는 예를 정비하기 위해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가례(家禮)』를 저술(그의 제자들에 의해 편찬)
화이질서(華夷秩序)의 구조변화
-화이변태(華夷變態)-
– 송대 이론적으로 완성된 화이질서는 명대(明代)에 실현 – 조공체제(朝貢體制)
• 1) 명청(明淸) 교체
– 17세기 중엽의 대변동을 거쳐 17세기 말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정치질서 형태가 자리잡음.
– 명(明)을 중심으로 한 방사선상의 조공체제는 해체되고 아나키적인 상황하에서 여러 신흥세력이 실력항쟁을 전개하였다.
• → 그 최종단계가 중국의 화이변태(華夷變態)
• 이것은 화이론의 퇴조가 아닌 새로운 형태로 재발전한 것
• -화이론의 다원화현상
화이질서(華夷秩序)의 구조변화
-화이변태(華夷變態)-
• 화이관의 다원화를 촉진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명청교채(明淸交替)
– 중국인 실체개념을 강조해 반청감정을 폭발
– 만주인 기능개념을 강조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시킴
• 청의 강희제(康熙帝) • 옹정제(雍正帝)는 중국지역에서는 황제를 칭하고 북방민족에 대해서는 칸(汗)을 칭하면서 화이(華夷)의 양 측면을 이론적으로 통일하면서 청조정권을 정당화.
소중화(小中華) 조선(朝鮮)
•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
– → 종주국을 명(明)에서 청(당시는 후금)으로 변경.
– 청은 종래 조선이 오랑캐로 멸시하던 여진족의 국가
• 청이 중국 전토를 지배하자 당시 조선의 지식인사이에서 이적(夷狄)의 지배 하에 들어간 중국은 이미 중화(中華)가 아니며, 조선이야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로서 청조보다 문명적으로 우위에 선다고 하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고양.
소중화(小中華) 조선(朝鮮)
• 효종(孝宗) : 존명배청(尊明排淸)의 풍조가 고양 → 북벌론
• 존명양이(尊名攘夷)론 : 실체적인 개념에 가깝다.
– 그러나 당시 조선의 존명양이론은 기능개념적인 화이론에 가깝다.
• 송시열 :『맹자』에 순(舜)도 동이(東夷)요, 문왕(文王)도 서이(西夷). 그들이 성인 현인이 될 수 있다면 우리 조선도 공자가 될 수 없다는 법은 없다.
– 이 논리는 옹정제(雍正帝)가 청조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것.
소중화(小中華) 조선(朝鮮)
• 조선의 반청지식인(反淸知識人)의 논리와 옹정제 논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 → 화이를 나누는 예의의 내용. 즉 변발과 통소매 옷을 입는 청조 사람들에 비해 조선은 정통유학을 배우고 중화의 예, 중화의 풍속을 엄격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점.
• 중국은 배울 것이 없다는 자존의식이 내포 이러한 → 자존의식의 협소함을 비판한 18세기 북학파(실학계통)도 또한 기능개념적인 화이관에 입각하고 있음.
• 조선전통사회의 형태가 탄생 → 주자가례가 향촌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 그 준수가 사회적 위신의 기초가 됨
일본 화이관의 전개
•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상 정식 책봉(冊封)을 받고 중국의 화이적 질서에 편입되었던 기간은 극히 짧으며 거의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
• 1547년 감합(勘合)무역의 중단으로 밀무역은 계속되었지만, 중국과의 공식적인 관계는 중단 .
• 도요토미 및 도쿠가와 정권의 정당성(그 이전의 정권도 마찬가지)은 제 다이묘를 누를 수 있는 군사력과 형식적으로는 천황에게 통치의 위임을 받는 국내적 요인에 존재 → 명 황제와는 관계가 없음.
일본 화이관의 전개
• 도쿠가와(德川) 정권은 중국보다는 조선과 류큐(현 오키나와)의 사절단을 화려하게 알현하는 연출에 의해 정권의 정당성을 과시
• 장군의 국제적인 위광의 연출은 사람들에게 외국의 이미지를 조성
• ‘일본국대군’이라는 칭호는 외교관계의 자주적 편성을 지향한 새로운 자율적인 국내정당성 구조의 수립선언
• 이는 해외에 실질적인 통용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님?도쿠가와 정권 시 만들어진 ‘세계’는 안에서 조작된 세계상으로서 실제 세계와의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야말로 그러한 세계상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 것
• 중국을 부정 -조선과 같음? 그러나 중국에 대신해 중화문명의 엄격한 계승자가 되고자 했던 조선의 지식인에 비해 일본은 중화의 풍속이나 주자학적 의례의 엄격한 실천과는 다른방향으로 일본을 중심으로 보는 논리가 생겨남.(일본적 천(天) 관념의 전개)
• 청조와 조선과는 다른 형태의 화인관을 전개
양무운동(洋務運動)시기의 중화사상(中華思想)
• 1) 중체서용(中體西用)의 논리
• 양무운동
– 1860년부터 1894년까지 약 35년간의 기간.
– 아편전쟁, 애로우전쟁을 통해 서양 병기의 우수성에 촉발되어 태평천국운동 진압 후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이 정치적 발언권을 장악하게 되자 열강의 침략과 국내의 농민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양 근대의 기계문명을 채용해 자강을 도모하고자한 운동
• 풍계분(馮桂芬, 林則徐의 제자) : 천지가 개벽한 이래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울분과 치욕으로 피가 거꾸로 치솟고 머리가 하늘을 찌를 둣하다. 오늘 지구제일의 대국이 하찮은 오랑캐에게 패배하였다.
– 이 울분을 풀기위해서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할 것을 주장, 그러나 중국의 예를 견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술은 모두 중국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 정관응(鄭觀應) : 지금 서양의 학문을 배우는 것은 지금은 쇠퇴해 버린 중국 본래의 학문을 중국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양무운동(洋務運動)시기의 중화사상(中華思想)
• 2) 이적관(夷狄觀)의 변화(變化)
• 그러나 근대중국의 이적관(夷狄觀)은 전통적인 화이적(華夷的) 세계관을 이어받으면서도 그것과의 명확한 단절 위에서 성립.
– 신해혁명의 「멸만흥한(滅滿興漢)」운동은 이민족배제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열강의 압박 하에서 다양한 입장이 서로 경합하면서 형성된 새로운 「중국(中國)」의식의 탄생
• ‘세계(世界)’에 대한 의식의 변화 :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중국의 세계 속의 주권을 가진 많은 나라 중의 하나에 불과. 자국과 타국과의 영역의 경계가 명확해 짐 - 종래의 개방적인 ‘왕화(王化)’ 사상과는 구별되며, 배타적인 화이사상과도 구별되는 새로운 단계.
근대 중국의 과제
• 어떻게 하면 동포라고 하는 정신을 불러일으킬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 - 중국은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신분제적 차별이 있었지만, 배워서 성인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과거제가 그 대표적)점에서 개방적인 평등성의 양면성을 지님.
– 그러나 이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만인의 평등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 여전히 군자와 소인의 차별, 즉 상하관계를 엄격히 인정
• 근대 중국의 내셔널리즘은 중국-이적, 군자-소인이라는 개방성과 차별성에 익숙해 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중국」이라고 하는 형상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정신적 국가통합의 문제가 현대중국에서도 여전히 과제
• 중화민족(中華民族) – 황제(黃帝)의 자손이라고 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속에서 민족, 계층간의 갈등을 해소하면서 중국을 통합
동아시아의 기본국제질서 – 조공(朝貢)
1. 의미 :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보내 예물을 바친 행위.
2.시초 : 주(周)시기, 제후는 방물(方物;지역 특산물)을 휴대하고 정기적으로 천자(天子)를 배알하여 군신지의(君臣之義)와 신례행위(臣禮行爲)를 행하였고, 천자는 이를 통하여 여러 제후들을 통제하고 지배.
동아시아의 기본국제질서 – 조공(朝貢)
3.체계화 : 한대(漢代)이후 황제제도의 정비. 중화사상의 형성과 함께 체계화•제도화
• 한(漢) 이후 중국과 주변국가 사이에 제도화 : 조공(朝貢)과 책봉(冊封)
• 정형화 : 중국에 황제지배체제가 완비(?)된 명대(明代), 이후 청대(淸代)로 이어짐
황제제도와 조공체제
• 황제제도의 시작 : 진(秦) 시황제(始皇帝)
– 주나라의 왕(王) 보다 우위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함
• 제도적으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체제 완성 : 한 무제(漢 武帝)
– 연호(年號)의 제정.
– 주변 각국 및 이민족과 책봉(冊封)관계를 폭넓게 수립.
동아시아의 기본국제질서 – 조공(朝貢)
• 조공의 기본 구조
• 조공체제: 황제지배체제시 중국을 중심으로 한 광역질서의 기본특질. 「중화」와「이적」간의 상하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는 일원적, 차등적인 질서체제
• 그 상하관계가 「책봉(冊封)」즉 중국왕조가 주변제국의 지배자에게 왕호나 관위를 하사해 군신관계를 명확히 위치시키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있음.
• 그러나 조공은 책봉관계가 없어도 존재
조공의 기본 구조
• 좁은 의미의 조공 : 주변제국이 미리 정해진 시기나 루트에 따라 공물을 가진 사절을 중국에 파견해서 황제에 배알하고 중국 측에서는 이를 접대하고 회사(回賜)의 물품을 주어 귀국시키는 일련의 과정
• 넓은 의미의 조공 : 상인들이 사절단과 함께 중국에 가서 중국상인과 거래하는 것을 총칭. 또한 조공시스템은 화이관념에 기초한 차등적인 국제질서관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역을 폭넓게 가리키는 것도 있음
– 예) 청대 광주에 온 유럽 선의 무역 등
동아시아의 기본국제질서 - 朝貢체제
*조공무역제도 : 조공(朝貢)과 회사(回謝)라는 형식이 확대된 것.
• 협의 : 의례에 의한 공품(貢品)과 회사품(回謝品)의 교환
• 광의 : 사절단의 사람들이나 이에 동반한 관허(官許)의 상인들이 수도에 상품을 운반해와서 그 지역의 상인과 교역하는 것.
• 이외 상인들이 사절단과 함께 중국까지 와서 항정(巷町)이나 국경지대에서 중국상인과 거래하는 것.
조공에서의 기본적 요소 및 구조
• 중국과 주변제국의 관계 : 國 對 國의 관념이 아니다
• 조공은 중국 국내의 체제 및 제도를 범위 이상으로 확대한 것(華夷體制)
• **勘合 : 符로 불리다가 당송이후 '감합'의 이름으로 국내 군사문제 등 使者의 왕래에 사용. →명대, 이를 외국에도 적용. 감합 발행소는 예부.
• 예) 1901년이전까지 중국에는 외무부가 不在.
• 조공 업무는 禮部에서 처리 ←국내문제라는 형식상의 인식
• 淸代 華夷體制의 구조 : 중앙에서 외부로의 확장
• 條約은 國 대 國의 관계 : 화이관하에서는 불가능하다
• 청대초 러시아와의 조약 : 중국에서는 조약의 형식이 아님.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경제관계
동아시아 세계의 상호 관계
• 한 나라의 역사를 ‘국가’라는 틀 속에서 고립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문화권’이라는 틀 속에서 제 ‘지역’이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역동적으로 전개해 왔다고 파악하고자 하는 시점이 존재
– 예) 한국사의 형성과 전개는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제 지역의 움직임과 분리해서 이해하기 어렵다.
• 그러나 이러한 시점은 ‘국가’라는 틀을 해체하고자 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중첩 속에서 새롭게 ‘국가’를 재검토하고자 하는 것.
동아시아 세계의 문화적 지표
• 1) 한자(漢字)
• 2) 유교(儒敎) 문화적 요소
• 3) 불교(佛敎)
• 4) 율령제(律令制) : 제도적 요소
• 5) 책봉체제(冊封體制) : 정치적 요소
• →이러한 동아시아 세계는 19세기 유럽 자본주의가 밀려오기까지 자기완결성을 보유.
동아시아 책봉체제의 서막
– 한대(漢代) -
• 책봉(冊封)이 중국의 영역 밖으로 확대되어 대외관계의 기본틀로 시작 -> 한(漢)
• 한은 주변의 여러 민족과 국가들과 책봉관계를 맺고 변경의 안정 및 적대세력에의 견제를 꾀함
– 예) 대흉노 견제를 위해 중앙아시아 지역(실크로드 주변지역)에 사절을 파견, 이들 국가의 조공을 실현. -> 장건의 실크로드 개척.
• 책봉의 기본 성격 : 간접지배(?)
한과 동아시아 제국과의 관계
• 고조선(한반도)
– 중국과의 관계는 주나라 건국시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가서 조선(朝鮮)의 왕이 되어 주왕이 조선왕으로 책봉했다는 것이 최초 -> 진실인가의 여부는 논란(부정하는 견해가 우세)
– 위만조선 때 한과 교섭
– 한과의 관계가 원할지 못하자 한이 무력 정복
– 한 4군의 설치
– -> 중국 문화의 집접적인 전파
• 서한(전한) 말, 한반도 및 만주의 국가들은 한과 책봉관계를 수립했을 것으로 추정
– 예) 고구려
한과 동아시아 제국과의 관계
• 한에 대한 일본(倭)의 교섭
• 漢書 지리지 : 왜국(倭國) 100여국으로 분립. 정기적으로 낙랑군에 사절 파견.
• 後漢書 「東夷傳」 : 57년 왜(倭) 奴國(나노쿠니) 국왕 사자가 광무제(光武帝)에 조공. 인수를 수여.
• → 금인(金印,1784년 발견. ‘漢委奴國王’)
동아시아 문명권의 성립
-남북조시대와 당-
• 동아시아 문화권의 특징인 한자, 유교, 불교 그리고 율령은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전해졌고 당(唐)대에 이르러 각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각자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간다.
• 당대는 이런 동아시아 세계를 하나로 묶는 동아시아 문화권이 만들어졌던 획기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문명권의 성립
• 중국의 분열과 통일
– 강력한 중국 중앙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주변 제국 및 제민족이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
• 남북조시대와 한반도-만주
– 중국의 왕조들은 자신들의 안정을 위해 주변 제국, 제민족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 고구려와 북조, 백제와 남조 : 서로의 필요에 의한 관계의 수립
– 중국의 여러 문화요소가 전파, 수입 – 중국 내부의 혼란과 한반도에서의 경쟁은 이를 더욱 용이하고 적극적이 되게 함.
동아시아 문명권의 성립
• 불교와 유교
– 국가 중심의 종교 설립과 국가를 통일시키기 위한 목적
– 왕(王) 중심의 국가체제를 위한 이념적 기반
• 율령
– 중국의 율령은 황제를 중심으로 한 귀족 국가체제의 기틀
– 삼국 및 일본은 이를 왕(또는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 설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수용 -> 고대국가의 성립.
동아시아 문화권의 성립
• 중국을 중심으로한 동아시아 문화권이 성립(확립)된 시기 : 당(唐)
• 강력한 왕조인 당의 정치적, 문화적 요소는 주변 제국과 민족들을 당의 영향력 안으로 끌어들임 <- 당을 규범으로 하는 정치, 문화체제를 수용.
당대 동아시아의 책봉체재
• 당대 당을 중심으로 책봉체제가 성립
– 당은 주변제국과 책봉관계를 맺고 조공사절을 받아들임 책봉체제(시스템) 성립(?)
– 당대의 책봉관계가 후대와 같은 시스템으로 작용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
– 일반적으로 책봉체제는 명대에 가서 확립된다는 것이 통론
명초(明初)의 朝貢질서
• 14세기 → 15세기 : 동란에서 안정으로
– 중국 : 원말의 혼란상황에서 주원장(명태조 홍무제)에 의한 명 건국(1368)
– 한국 : 고려말의 혼란기에서 태조 이성계에 의한 조선왕조의 성립(1392)
– 일본 : 남북조의 동란후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 북조)에 의한 남북조 합일(1392)
– → 이러한 동란의 시기가 명을 중심으로 한 광역적인 질서 하에 자리잡는 것이 14세기 말~15세기 초 :「조공(朝貢)체제」
15세기 동아시아의 광역적 질서
• 명대 전기(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중엽)는 대체로 경제 침체기. 송대 원대의 사치적인 풍속은 명대에 들어와 검소해 짐.
• 동아시아에서 명과 조선, 일본의 관계가 안정화된 것은 3대 영락제 즉위후.
– 영락제는 정권의 정당성을 어필하고자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취함.
– 조선의 태종이 ‘조선국왕’의 지위를 정식으로 인정받음.
– 일본에서는 아시카가 요시미쯔(足利義滿)가 ‘일본국왕’에 정식으로 책봉됨과 함께 勘合(감합)을 얻음.
16세기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변화
• 16세기 : 세계사적인 변혁의 시기
• 동아시아에서의 16세기
– 명 : 「北虜南倭」(북로남왜 : 북방의 몽고와 동남연안의 왜구) 위기가 극성.
– 일본 :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혼란, 분열기
– 조선
– 서양세력의 출현 :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 명 중심의 조공무역체제가 붕괴
세계자본주의와 동아시아
-동서양 문명의 충돌-
• 1.서양제국의 ‘중화제국’으로의 진출
– 서양제국은 16세기부터 중국에 진출
– 포르투갈 : 1513년, 처음으로 중국상륙.
– 1517년, 안드라데를 特使로 파견
– 1543년, 일본에 철포를 전래
– 1549년, 예수회 선교사 자비에르 일본에서 포교활동
– 1557년, 마카오에 무역거점 확보
– 1682년, 마테오 리치 마카오 도착.
– 16세기, 포르투갈은 독점적 무역 지위를 확보
1.서양제국의 ‘중화제국’으로의 진출
– 스 페 인 : 1571년 필리핀 마닐라에 무역거점을 확보하고 중국과 무역
– 네델란드 : 1601년, 중국에 출현.
– 17세기초 동인도회사 설립
– 영 국 : 1625년, 영국, 대중국무역에 본격 적으로 참여.
– 청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무역이 이루어짐
청조의 무역태도
• 중국 : 지대물박(地大物博)
• 광둥(廣東)체제 : 공행(公行)무역(1757).
• 기본적으로 모든 무역은 조공(朝貢)
• 서양인은 이적(夷狄) = 양이(洋夷)
• 방범이인장정(防範夷人章程) : 유럽인의 생활과 행동을 제약
• 기독교에 대한 입장변화 : 전례문제(典禮問題)로 인한 기독교 금지.
영국의 대중국 무역
• 대중국 교역은 대체로 포르투갈 → (스페인) → 네덜란드 → 영국으로 그 주도권이 이양되어 감.
• 영국 : 18세기말 중국무역을 주도.
• 교역품목
– a) 수입 : 차, 도자기, 생사, 면포
– b) 수출 : 모직물과 일부 사치품
• → 중국인이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막대한 은을 중국에 지불.
• → 광둥무역체제의 장애
• → 1792년에 매카트니(macartney)사절의 파견을 시작으로 중국에 무역의 개방을 요구
영국의 3각 아편무역
• 영국은 대중국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수출품)을 채택
• 인도아편의 대중국 수출 → 삼각무역
• 1801년에 약 4천 상자 → 1823년 무렵 1만 상자 → 10년 뒤 2만 상자
• 중국 은의 지나친 유출(은가 폭등) → 청 국가재정의 위기
• 1839년 아편무역 금지: 흠차대신 임칙서(林則徐)의 아편단속
아편전쟁과 난징조약
• 아편전쟁(제1차 중영전쟁) : 1840~42년. 무력충돌. 중국의 일방적 패배.
• 난징조약(南京條約)
– a) 최초의 불평등조약(치외법권, 협정관세)
– b) 배상금지불, 홍콩의 할양
– c) 5개항 개항, 공행 폐지
– d) 새 국제질서에의 개방
– e) 중국의 반식민지화의 진행
애로우전쟁(제2차 중영전쟁)
• 영국상품의 북방 및 내지로의 진출문제
• 영불 연합군의 북경점령
• 톈진(天津)조약, 베이징(北京) 조약
• → 배상금지불, 내지여행권, 개항장 추가, 외교사절의 베이징 상주
• 이 전쟁으로 중국의 전통적 세계관이 변화 → 동아시아 화이(華夷)사상적 국제질서가 흔들림
아편전쟁의 의미
․불평등조약체제의 확립 과정.
․중화주의에 큰 타격(주변 국가에게도 같은 영향)
․중국의 서양의 상품시장, 원료의 공급지로 전락 → 반식민지화로의 여정의 시작
․서양문화의 본격적인 유입과 이에 대한 중국인의 대응 → 근대화 여정의 시작
4.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 운동
- 성공과 실패?
• 1) 근대화의 정의? - 근대화의 척도
• ①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의 일소(一掃)와 신분적 공동체 및 공동적 의식의 해소
• ② 산업에서의 기계화와 공장제 생산
• ③ 국민 의무교육의 보급
• ④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보급
• ⑤ 시민적 자유의 확립과 대중의 정치참여(사회참여)
• ⑥ 고도의 도시화
• ⑦ 각종 기능집단의 분출과 사회조직의 복잡화
• ⑧ 개인주의의 성숙 등등
2) 중국의 근대화 운동들
(일반적 관념)
양무운동
• 아편전쟁, 애로우전쟁이후 중국의 대외인식 변화
– 새로운 「중국」의식의 탄생
– 이무(夷務)에서 양무(洋務)로
• →추진세력은 曾國藩, 李鴻章, 左宗棠(모두 태평천국의 진압을 통해 등장한 한인관료)
• 양무운동: 서양의 우수한 군사과학기술을 도입:「中體西用」의 원칙
• 군사공업을 중심으로 한 근대산업화의 시작
• 양무운동은 내우회환에 대응하는 근대화정책을 실시한 것.
– 그러나 전통적인 중국체제질서를 개혁하지 않은 채
– →전근대적인 중앙집권국가에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에의 편성은 실현되지 못함. 이 점은 메이지유신과의 비교
• 양무운동의 문제점은 청일전쟁(1894)에서 드러남
일본의 근대화 운동
메이지유신(明治維新)
• 전통에 대한 부정? 인정? : 上 -> 下
• 反幕府派의 武力에 의한 정부구성.
• 구미국가를 모델로한 정부주도의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
• 경제 - 자본주의 성립, 정치 - 입헌정치 개시, 사회
• 문화 - 근대화 추진.
•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분야에서 실현.
• → 이후 아시아 침략의 원인
성공과 실패 – 평가의 정당성
• 청일전쟁 : 일본의 근대화 개혁 성공과 중국의 실패라는 증거
• →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중국은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됨.
• 근대화기에서의 ‘전통(=보수)’과 ‘근대(=개혁)’
• → 누구의 손을 들 것인가?
• 동아시아 근대사의 문제점 : 서양세력의 외부적 작용이 역사진행에 미친 영향이 크다.
– → 우리의 역사를 우리 스스로의 시점으로 바라보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
중-일(한) 개혁운동의 결과
• 중국 : 거듭된 시행착오와 실패 ☞ 서양 열강 및 일본에 의한 반식민지화 상태
• 일본 : 명치유신이후 군사강국으로 성장 ☞ 서양열강과 대응 ☞ 조선-중국으로의 식민지 확장
• 양국의 개혁 운동에 대한 일반적 평가
– 중국(한국) : 실패
– 일본 : 성공
• 문제점 : 성공, 실패에 대한 기준, 근거는?
역사 평가
• 역사는 승리한 자의 역사?
• ☞ 과거 역사 사적과 그 안에 포함된 평가는 보통 승리한자에 유리하게 서술.
• 18세기이후의 동아시아와 유럽-미주 세력의 힘의 균형 ← 서양 쪽에 기울어짐을 부인할 수는 없다.
• 이런 이유로 서양 중심의 역사관이 정립되어진 것도 사실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 문제
•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는 내부, 외부적 요인중 외부적(서양) 요인이 더 중시되어 왔고, 이에 의해 설명되어 왔다.
– 예) 한국의 근대사는 일본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이런 점에 일견 타당성도 있으나, 부정적인 면 또한 존재.
• ☞ 최근 이러한 점에 대한 양 지역 학자들의 문제제기가 이어짐.
근현대사와 우리
• ‘세계화’라는 현실속에서 우리 자체만의 요인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 그러나 모든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것 또한 문제가 된다.
• 과거에는 문제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고(예를 들면 정체론과 같은 것), 그 해결 방법으로 외부적인 것(예를들면 일본의 침략(진출?))을 들었지만, 이제는 그 반대의 경향도 보인다. 즉 내부적인 요인이 아닌 무조건 외부적인 요인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 ☞ 이 두가지는 모두 진실을 가리는 창일 뿐이다.
‘우리 것’이 좋다라는 점에 포함된 문제
• 분명 이전 서양 중심적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 것을 찾고 강조하는 것이 나쁜 현상은 아니다.
• 그러나 이러한 강조가 지나쳐서 무조건 우리 것이 최고라는 인식 자체에도 문제는 내포되어 있다.
• ☞ 이러한 것을 어떻게 조율하면 될까?
• 결국은 좋고 나쁘다라는 가치 판단 문제로 귀결되는데….. 나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각자 해결하시도록!
정당성
• 일본의 근대 vs. 중국, 한국(조선)의 근대
• → 정당성 부여는 가능한가?
• 양무운동 vs. 메이지유신
• 수구파 vs. 개화파
• 보수(우)와 진보(좌)
'myPP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인학대ㆍ폭력에 예방 및 대응 (0) | 2014.11.02 |
---|---|
동아시아의 역사- 동북아 (0) | 2014.10.30 |
포드주의 & 도요타의 포스트 포드주의 (0) | 2014.10.21 |
IT 관리 - SCM 성공사례(Wal-Mart) (0) | 2014.10.19 |
물류의 이해 (0) | 2014.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