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의 아버지: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빛의 화가:클로드 모네 (Claude Oscar Monet)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인물화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마네.
마네의 인물화는 당시 인물화에서 느껴졌던 과장과 미화적인 표현 대신 순간적인 인상을 날카롭고 간략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초상화를 주문했던 사람들 중에는 마네가 그린 자신을 보고 실망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클로드 모네 (Claude Oscar Monet)
[1840~1926]
풍경화에서는 최고라고 칭할 수 있는 모네.
‘그림처럼 아름답다.’라는 흔히 하는 말은
그의 풍경화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네의 풍경화는 너무나 아름답다.
사실적인 세밀 묘사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동안 풍경을 관찰하면서 느낀 인상의 느낌이 묻어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마네 & 모네
마네와 모네는 이름이 흡사해서 동시에 떠올리기 쉬운데
이런 혼란은 꼭 이름에서만 나타나는 것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오랜 세월 유지해온 각별한 우정에서도 떠올릴 수도 있다.
마네는 부유한 집안의 출신으로써 한 스승 아래서 6년 이상 수학하고 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좋은 조건에서 화가로 출발했지만
가난한 상인의 아들인 모네는 스스로 회화를 익히며 역경을 해쳐나가는 불리한 조건에서 화가로 출발 했다.
마네는 올랭피아의 악평 이 후 실제적인 인상파의 산실이 되는 바티뇰 불바드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에 화실을 열었다. 젊은 화가들은 그 카페에 정기적으로 모여 대화를 하면서 의견을 나누었는데,
모네, 세잔, 르누아르, 바지유, 팡탱-라투르,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 온 휘슬러 등이 자주 모였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인 화가들은 동네 이름을 따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불리었다.
모네가 마네를 만난 곳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카미유 피사로
; 카페 게르부아
[퐁투와즈의 외딴집] ▶
마네와 모네의 첫 만남
마네와 모네의 첫 만남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1865년 모네는 <녹색 드레스의 여인>을 살롱 전에 출품 했다. 그 날 사람들은 ‘마네’에게 멋진 그림을 그렸다고 축하를 아끼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사람들이 모네의 <녹색 드레스의 여인>을 마네의 그림으로 착각하고 찬사를 보낸 것이었다. 마네는 이를 곧 알아차렸고 바지유와 그 친구들에게 착각하는 관객들에 대한 불쾌감을 표했지만 정작 마네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 날 바지유의 일행 중에 모네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었다.
모네는 바지유와 함께 전시장을 돌다가 뜻하지 않게 마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만 그때 당시 모네에게 있어 마네는 눈조차 돌릴 수 없을 만큼 높은 존재였기에 사과는 둘째 치고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다.
마네와 모네는 위와 같은 경우로 다시 한번 부딪히게 된다. 다음 해 모네는 자신의 바다 풍경화가 걸린 오베르 가(家)의 화랑 앞에서 우연히 마네를 다시 보게 된다. 정말 우연하게도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모네가 있는 줄 몰랐던 마네는 모네의 면전에서 그의 그림을 비꼬아 이야기 했다.
◀ 클로드 모네
; 녹색 드레스의 여인
마네와 모네 그리고 우정
마네와 모네의 서먹한 관계는 3년 후인 1869년 카페 게르부아에서 모네와 정식으로 인사하면서 급격히 사이가 가까워진다. 서먹한 사이로 시작 된 관계였으나, 두 사람은 곧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임을 알아차렸다.
이후로 마네는 젊은 친구의 재능과 그의 실험정신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모네는 그런 마네를 선배로서 의지하였다.
마네와 모네는 함께 센 강둑에서 그림을 그렸다. 자연광선으로 조명된 <뱃놀이Boating>라는 그림은 마네의 작품 가운데 가장 밝은 그림이며, 이 그림에서 그는 르프티제느빌리에를 배경으로 두 명의 사람이 햇빛을 받으며 배 안에 앉아 있는 광경을 그렸다.
마네가 <아르장퇴유의 배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를 그린 곳도 아르장퇴유였다.
에두아르 마네 ; 뱃놀이 ▶
◀ 에두아르 마네
; 아르장퇴유의 배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이 그림에서 모네는 중고로 사들인 낡은 배 안에서 아내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에 모네는 빈털터리였고, 마네는 그를 돕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모네 가족의 단란한 한 때를 담은 마네릐 작품은 당시 두 화가의 긴밀했던 우정을 짐작하게 한다. 모네는 마네에게 극심한 경제난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였고 그 때마다 마네는 그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모네는 맏형 같은 마네를 정신적인 지주로 따르게 되었다.
불리한 조건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네에게 더 점수를 줄 수 있지만, 작품을 통해 당시 부르주아의 삶을 엿볼 수 잇다는 점에서 부잣집 아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상에 먼저 올라 명성을 독차지하려는 이기심이 그때나 지금이나 화가들에게 있는데, 친구를 부축해서 함께 정상에 올랐다는 것에서 마네의 고상한 인격은 회화와는 별개로 본 받을 만하다.
마네의 죽음과 모네의 편지
1883년 마네가 죽은 후 모네는 몇몇 지인들의 힘을 모아 1890년 <올랭피아>를 구입하여 루브르 미술관에 기증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직접 ‘팔리에르’ 교육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미술사에서 마네가 차지하는 의미, 그의 위대한 작품이 해외에 팔리지 않고 프랑스, 그것도 루브르 미술관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득하였다. 모네의 노력은 자신을 비롯한 많은 젊은 화가들의 새로운 도전에 길을 터 주었던 선배를 향한 존경이었다. 생전에 개인적으로 마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모네는 이렇게 마음의 빚을 갚았다.
에두아르 마네 ; 올랭피아 ▶
“장관님, 우리는 <올랭피아>를 당신께 드립니다.
프랑스의 영광이자 기쁨이었던 작품들이 미국인들의 손에 들어갈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가 <올랭피아>를 사기로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올랭피아>는 화가정신과 통찰력의 스승인 마네의 위대한 승리의 기록입니다.”
<‘르 피가로지’에 실린 장관에게 보내는 모네의 편지 중에서>
--모네 드림-1980년 2월 7일-
두 사람은 친구이자 경쟁자로서, 그리고 서로의 좋은 스승으로서 칭찬과 조언을 아끼지 않고 우정을 쌓아간다. 말년에는 마네도 모네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뛰어난 풍경화를 그리고 모네도 마네의 영향을 받아 뛰어난 인물화를 그려냈다. 흥미로운 것은 마네와 모네의 그림이 너무 닮았고 이름도 이 둘을 ‘마네모네’라고 함께 불리기도 했다.
▲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 풀 밭 위의 점심
클로드 모네(Claude Oscar Monet) ▶
; 풀 밭 위의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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