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재임 중에 한 일이 모두 옳았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그의 정직성과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듬
‘난 옳은 일을 하려는 정직한 사람이다’, 1976년 선거 운동 당시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카터 대통령이 재임 중에 한 일이 모두 옳았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그의 정직성과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데요. 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에 대해 전해 드립니다.
변화의 기로
미∙소 대결의 완화 - 데탕트
제2차 세계대전 후 시작된 미.소 간의냉전은 1950~1960년대 세계질서의 축이 되었다.
핵에 의해 군사적 충돌은 억제되었지만 한국전, 쿠바위기, 베트남 전쟁 등으로 냉전의 위험을 일깨우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냉전의 지속이 도움 되지 않음을 인식했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 중국 유럽연합 등 미.소에 견줄만한 세력이 등장하여 국제질서는 다국화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1960년대 후반 미.소 간의 냉전이 완화되고 데탕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해빙의서막은 1972년 미국과 중국의 화해였다.
미국의 대외정책의 주도권은 닉슨과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헨리키신저가 쥐고 있었다.
그 당시 닉슨행정부(헨리키신저)는 베트남에서 궁지에 몰려있었고, 이를 타개하기위한 돌파구를 모색했는데, 바로 중국과의 관계개선이었다.
중국과의 관계개선은 중국과 소련의 갈등을 점차 심화시켜 간접적으로 소련을 압박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중국 또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소련과의대결에서 유리한 전략적 위치를 확보하고자하는 속셈이었다.
탁구에의한 교류,이른바 ‘핑퐁외교’ 로 어느정도 분위기가 잡히자 닉슨(키신저 )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했다.
이 방문에서 미국과 중국의 화해가 급물살을 타자 소련도 미국과의 대화에 적극나서서, 그해 5월 양국은 역사적인 전략무기감축협정(SALT,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에 서명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1973년 미국과 월맹 휴전협정으로 데탕트는 절정에 달했다. 헨리키신저는 그 공로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테탕트는 미.소간의 전면적 화해나 이념적 대립의 종식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1970년대 말 도덕성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지미카터 행정부가 소련의 인권 유린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양국간에는 “신 냉전”이 시작되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전약무기감축협정을 파기하고 , 모스크바 올림픽불참, 새로운 장거리미사일 개발 등으로 이에 맞섰다.
신 냉전은 카터의 뒤를 이은 레이건, 그리고 부시 행정부에서도 지속되었으며, 1980대 말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 그리고 이것이 몰고 온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비로소 막을 내렸다.
1970년대 초, 데탕트는 그 당시로서는 실패했던 측면이있음에도 불구하고 데탕트는 세계사적의미를 지니고 있다. 데탕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30년 가까이 지속된 미.소를 정점으로 하는 양극체제의 종식을 의미했다
이후 미.소가 대결국면으로 되돌아갔다고 해도 데탕트의 분위기는 각 체제의 내부 분열과 체제간 이념적 대립의 완화를 가져왔다.
데탕트이후, 세계질서가 다극체제로 재편되고, 신 냉전은 두 강대국의 대결일 뿐 전 세계적 범위의 총체적 대결은 아니었다.
데탕트는 결국 미.소가 초강대국이라는 지위를 잃었음을 알리는 공식적인 선언과 같았다.
▶ 1973년의 오일쇼크
“오일쇼크”는 배트남전쟁의 실패와 함께 이 시기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처하게 된 곤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이다
미국에 석유 금수조치가 내려지고, 기름값도 폭등했다. 다른 석유수출국기구(OPEC)국가들이 이에 동조해 원유 수출가를 하루아침에 4배나 인상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1976년 대선에 당선된 지미 카터에게 국민들은 높은 기대를 걸었던 것은 당연한일이다.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기위해 카터는 도덕적 정치를 내걸고 평화와 인권신장을 위한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인권문제를 빌미로 한국, 이란,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의 내정에 간섭해 이들 국가들과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며 소련과 제2차 전략무기감축협정을 체결하고, 중국과도 괄목할 만한 관계개선을 이루었다.
카터대통령의 가장 잘 알려진 업적은 수십 년간 전쟁을 계속해온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화해시킨 것이다.
1978년, 그의 초청으로 이스라엘 수상과 이집트 대통령이 데이비드 캠프 별장에서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따라 이스라엘은 1978년 6월 전쟁 이후 자국이 점령하고 있던 이집트의 영토로부터 철수하고, 이집트는 이스라엘은 외교적으로 인정했다.
But!! 불행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 이란 인질 사태
무비찬적인 친미주의와 독재로 인해 국민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던 이란의 국왕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는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에 의해 정권이 붕괴되자 국외로 도망쳤다. 카터가 팔라피의 미국 입국을 허용하자 테헤란의 시민들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58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이란인들은 팔라비를 이란으로 돌려 보내고 미국에 있는 그의 재산을 내놓아야만 인질들을 풀어 준다고 했지만 카터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카터의 이러한 조치는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카터는 특공대를 보내 인질을 구출하려했지만 요원을 태운 헬기가 사막에 추락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카터는 대내외적으로 더욱 궁지에 몰리게 했고 결국, 그의 정치적 몰락을 초래했다.
1980년 대통령선거에서 예상대로 로널드 레이건에게 참패를 당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란은 화해의 표시로 444일 동안 억류돼있던 인질을 석방했다. 미국도 이란이란 싸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레이건의 당선이 확실해지자 알제리의 중재로 호메이니와 레이건의 참모들이 인질 석방 협상을 벌였다.
이란은 미국 내 팔라비 재산 환수를 조건으로 인질석방에 합의했다. 1980년 1월 20일, 레이건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인질들이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란 인질사건은 미국인들에게 국력의 쇠락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슬픈 소식이었다.
레이건의 보수주의 -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로널드 레이건의 대외정책은 1973년 1차 오일쇼크이후 인플레이션의 해소와 국내정책회복, 그리고 실추된 미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군비강화에 초점이 모아졌다. 이렇게 레이건 행정부가 당행한 일련의 경제개혁들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라고 한다.
▶ 레이거노믹스
-기업과 개인이 내야 하는 세금을 크게 줄이고 사회보장에 대한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것!
이 정책은 ‘공급경제학’이론에 바탕을 둔 것인데, 세금감면을 통해 여유 자금을 기업 활동에 대한 투자로 전환→생산증대, 고용창출, 소득증대를 기대했다.
But 많은 경제학자들은 애초부터 실패한 정책의 재판이며, 현실적으로 작동불가능하다고 평가절하 했다.
→이러한 예상은 경기침체, 예산적자증대로 나타났다
물론 레이거노믹스의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연 4%정도 낮아지고, 기업의 투자가 늘고, 실업률도 4%이하로 떨어졌다.
But, 이 돈이 생산 활동에 대한 투자보단 소비재구매에 집중되고 군사비 지출이 늘어나며 다시 인플레이션을 맞음. 다시세금인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But 소련과의 대결이라는 냉전에 집착하던 레이건은 이를 거부하고 내부적 어려움을 대외적 군사행동으로 극복하려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니카라과의 좌익정부와 엘살바도르의 반군에 무기와 자금을 공급하고 있다고 주장, 이 지역에 군사개입을 했다.
1983년에는 그라나다를 침공해 적대적 태도를 보인 좌익 군사정부를 무너뜨렸다.
→국민들은 이에대해 엄청난 지지를 보내왔으며, 이 지지에 힘을얻은 레이건은 1984년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되었다.
두 번째임기에도 그의 대외정책은 변함없었다.
소련에대한 강경노선을 고수하고, ‘스타워즈’로 불리는 군비증강 계획을 밀고나갔다. 이 계획으로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 될 수도 있었지만, ‘이단자’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제1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미.소관계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 고르바초프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와 퍼레스 트로이카의 기치 아래 국내 정치의 민주적 개혁을 단행, 미국과 제2차 전략무기감축협정을 맺었다.
1986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핵무기감축등 미.소 대결의종식을 위한 협상을 벌였다. 이는 실패했지만
2년후 재차 회동하여 핵무기 회담의 난제였던 중거리 미사일 감축 방안에 합의하였다.
이 회담의 성공을 40년 이상 계속되어온 미 .소 대결의 공식적 종결로 받아 들였다.이로 인해 에리건의 정치적 인기는 급 상승했다.
▶ 레이건의 국내 문제에 있어서의 실정
레이건 행정부는 이미 부작용을 낳고있던 조세감면정책을 계속 추진해 개인소득세율을 50%에서 28%로, 기업에 대한 세율을 46%에서 34%로 인하하는 소득세제안을 통과시켰다. 세율 인하의 혜택은 주로 기업과 부자들에게 돌아가 사회적 빈부격차가 더욱 심각해졌다. 또한 정부의 손실을 막기위해 막대한 공채가 발행되었으며 재정적자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
레이건이 대중의 인기를 영합하여 미국이 처한 문제의 심각성을 외면/심화 시킴. 미국이 아직도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는이유는 레이건의 왜곡된 국내외 정책에서 비롯된 것. | 그가 자칫 나락에 빠질뻔한 미국경제를 어느정도 살려낸것은 사실. 군사행동을 불사하는 강경외교로 소련을 굴보시켜 승리감을 맛보게해줌. 총상으로 병상에 누워있으면서도 치착함과 유머감각을 잃지않아 국민들의 존경심을 삼 |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에게 레이건은 베트남 전쟁 이후 괴락의 길을 걸어온 미국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무기밀거래,음모,독재 - 이란. 콘트라 사건
배경 : 1979년 산디니스타라 불리는 니카라과의 반정부조직이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를 몰아내고 좌익정부를 세우게 된다.
레이건은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항해 무력투쟁을 벌이던 “콘트라”라는 반정부단체를 지원하였고 의회도 1981년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니카라과 인들”에게 무기를 지원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지만 베트남전쟁을 기억하는 미국인들의 반대여론으로 끝내 1984년 볼런드 수정 법안을 통과시켜 콘트라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함
▶ 이란*콘트라사건
후일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알려진 이 같은 음모는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고문 “존 포인덱스터”와 그의보좌관 “올리버 노스”중령에 의해 주도 되었다.
음모의 핵심은 비밀자금을 확보하는 일이 었고, 이것은 1980년에 시작된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이란에 대한 무기 판매를 통해 수천만 달러로 추정되는 막대한 비밀자금을 마련했고 이를 콘트라에 대한 무기 지원에 사용함 -> 볼런드 수정법안의 위반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9년 11월로 제2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까지 비화될 조짐을 보였던 이란*콘트라 사건은 포인덱스터와 노스가 기소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고 레이건은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흑인의 끝없는 좌절 - LA 흑인폭동
▶ 로드니 킹
여러명의 백인 경찰이 흑인 한 사람을 자동차에서 끌어내리고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를 가한 사건.
배경 : 1991년 시내를 과속 질주던 그가 교통경찰의 정지신호를 무시라고 도망쳤고, 뒤쫓아온 경찰들에게 붙잡혔으나 격렬한 몸짓으로 체포에 저항해, 흥분한 경찰들이 구타를 시작했던 것이다.
▶ LA흑인폭동
경찰의 과잉 행동이 명백한 듯했으나 배심원들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로스엔젤레스는 1965년 대규모 흑인폭동이 일어났던곳으로, 마침내 로드니 킹 사건은 LA흑인폭동 사태로 더욱 번지게 된다.
폭동은 점점 고조되어 연방군의 투입으로 진정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고, 44명의 사망자와 엄청난 재산피해를 내고 3일만에 수습이 되었다.
-한계
44명의 사상자중 5명의 백인과 2명의 동양인이었고 대부분이 중남미사람과 흑인이었다.
흑인들의 분노는 백인이 아닌, 다른소수민족과 흑인 자신들에게 표출된 셈이었다.
9.11 비극 - 신세계 질서와 미국의 장래
▶ 무너진 공산권국가들
2차 세계대전 이후 확립된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 간의 대결 또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은 1990년을 전후해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역사의 종말은 아닐지라도,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
1985년 소련의 ‘이단 공산주의자’인 고르바초프 등장 ⇒ 소련은 공상권의 수호자가아니라는 선언 ⇒1989년 11월 4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자체가 무너지는 세계사의 대변혁 일어남.
그 후,
미국이 유일한 강자이라고 생각했지만, 미국국력은 상대적으로 쇠퇴하고있었고,
1970년대 이후 미국은 국내적으로는 재정적자, 대외적으로는 무역적자라는 ‘쌍둥이 적자’에 시달림
약소국의 반란은 공산권 붕괴 이후 더욱 노골화 됨
- 이라크의 쿠웨이 무력 침공. ⇒ UN을 통한 철병요구가 받아들이져지지 않자 미국은 이라크군을 축출하고 사담 후세인의 굴복을 받아냄.
➜ 중요한 것은 미국이 이를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이라크가 일을 벌였다는 사실이며 이는, 미국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이라크는 UN 무기사찰단의 활동을 방해하는 등의 미국에 도발적인 행동을 계속함.
- 거듭된 경고와 경제제재 조치에도 불구북한의 계속적인 핵개발. 등
▶ 9.11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세계 지배를 상징하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테러리스트들의 자살 항공기 공격을 받아 무너지게됨 ⇒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됨.
같은 시간 미국 국방성 건물에도 테러리스트들에게 탈취당한 점보 여객기가 돌진하여 엄청난 피해 발생.
⇓
알카에다 라고 하는 외교 원리주의 테러 집단이 사건의 배후에 있고 아프가니스탄 회교 정부가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 ⇒ 미국의 즉각적인 군사행동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몇 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짐.
1990년대 이후 약소국의 반란을 주도한 이라크와 북한 ⇒ ‘악의축’ 으로 규명
미국의 무장해제요구 → 이라크의 무장해제 거부 → 러시아, 프랑스를 비롯한 각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 미국의 이라크에서의 군사행동 → 사담 후세인정권 무너뜨림
-한계.
미국의 군사행동은 성공한 듯 했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됬지만
* 미국은 열강들의 반대를 무릅 쓰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이는 쉽게 해소되지 않을것으로 보임.
* 이라크 침공으로 고조된 이슬람 국가들의 반미감정
* 북한은 이라크의 교훈에도 불구 핵무기를 담보로 한 줄다리기를 계속 행함.
-미국의 과제.
타협과 협조, 때로는 양보도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