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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의 달인 윈스턴 처칠 처칠의 삶을 통해 본 인생역전 스토리. 낙오자로 업신여긴 삶을 살던 처칠이 마침내 60대에 이르러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고 절망을 이겨내기까지, 그가 들려주는 1..

myPPT 2012. 9. 22. 19:14

리더십의 달인 처칠의 삶을 통해 본 인생역전 스토리. 낙오자로 업신여긴 삶을 살던 처칠이 마침내 60대에 이르러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고 절망을 이겨내기까지, 그가 들려주는 15가지 성공전략을 꼼꼼하게 담아내고 있다. 

 

벼랑 끝에서 만나는 처칠

김형진 지음

기파랑 / 2006년 2월 / 212쪽 / 10,000원


▣ 저자  김형진

변호사 김형진은 역사책을 읽다가 우연히 윈스턴 처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지난 3년 간 처칠에 대해 읽고 생각하고 그의 연설문을 들으며, 처칠이야말로 이 시대 우리가 배워야 할 인생의 전범(典範)임을 절감했다. 그를 알면 알수록 더욱더 처칠에 빠지게 된 저자는 앞으로 우리나라에 조그만 처칠 기념관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애정이 깊다. 이 책도 그에 대한 애정의 일환으로 ‘많은 사람이 처칠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쓰인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형진은 서울대학교를 졸업 후 미국 일리노이 주 법과대학원을 나온 뒤 캘리포니아 주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현재는 서울의 한 법무법인에서 미국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주로 문화산업 분야 법률에 대해 강의를 하고 신문이나 인터넷 매체에 기고하고 있으며, 『미국 상표법』,『미국 영화산업백서』(공저),『논리야 나오너라』 등의 책을 집필했다.


▣ Short Summary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미국은 최대의 국가위기를 맞았다. 그때 부시 대통령은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지치지도 않을 것이며, 비틀거리지도 않을 것이고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며 60여 년 전 처칠의 연설문을 인용하며 외쳤다. 또한 2005년 여름, 런던에서 지하철 테러가 발생했을 때, 영국인들은 간절하게 처칠의 리더십을 갈망하며 그를 그리워했다.


비단 물리적인 테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도처에 만연해 있는 포퓰리즘. 정치가와 지도자마저도 소신 없이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가치관과 이상을 바꾸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있는 이 몰가치의 시대에, 끝내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처칠의 리더십은 이 시대가 본받아야 할 지도자의 모습이며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준다. 1938년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이 전쟁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히틀러와의 화해를 외쳤던 모습은 마치 요즈음의 우리 정부가 ‘평화와 민족’이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300만의 동족을 굶어죽이는 북한 체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당대의 여론은 체임벌린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자세에 대해 처칠은 영국 정부가 믿을 수 없는 약속의 대가로 동맹국을 팔아 넘겼다고 지적하고 앞으로의 일을 우려하면서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무엇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결국 역사는 처칠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도 처칠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하는 건 아닐까? 처칠이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오늘날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처칠이 보여준 원칙과 강한 리더십이다.


▣ 차례

처칠 일대기


I. 20세기 최고의 영웅 처칠

죽을 각오로 싸워라!

세계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처칠의 추억

2006년 한국, 왜 처칠인가?


II. 절망의 바다를 넘어서

가정환경

성적 

돈

외모 

성격

건강

나이

자기관리

대인관계

운 

실수


III. 나도 성공할 수 있다

노력으로 빚어낸 해피엔딩

성공을 위한 WC(Winston Churchill) 15 원칙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벼랑 끝에서 만나는 처칠

김형진 지음

기파랑 / 2006년 2월 / 212쪽 / 10,000원


I. 20세기 최고의 영웅 처칠


처칠은 생전에 수많은 연설을 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이라는 제목의 연설이다. 그가 이 연설을 했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어, 나치 독일이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을 파죽지세로 굴복시키고 유럽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쟁 준비에 소홀했던 영국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고립된 채, 끝이 보이지 않는 파국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거의 모든 자원을 수입에 의존했던 영국에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석유나 고무와 같은 자원도 없었다. 게다가 식량마저 부족했기 때문에 전쟁에 돌입한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영국에게 히틀러가 평화와 안전을 약속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처칠은 피가 끓는 20대나 30대가 아닌 예순다섯 살의 노령으로, 당시의 평균수명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사회에서 은퇴해야 할 나이에 있었다. 그러나 처칠은 “승리하지 못하면, 죽음만이 남을 뿐”이라는 각오로 “어떠한 희생과 공포를 무릅쓰더라도” 싸우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한 처칠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히틀러는 그가 알코올중독으로 정신이상이 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고 전해진다. 히틀러는 처칠을 미치광이로 봤지만 오늘날 세인의 평가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미치광이는 히틀러이고 처칠은 영웅이자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처칠은 생전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던 인물이다. 1950년대 미국의 어느 시골 소녀가 편지겉봉에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분에게’라고 적은 편지가 영국의 처칠 수상에게 배달되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것은 처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평가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인류를 나치의 폭압으로부터 구한 영웅이며 전후 세계평화의 기반이 된 국제연합과 유럽연합을 제창한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많은 전기와 자서전이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제 모습은 언제나 베일에 가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그것은 처칠이라는 인물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상적인 이해의 폭을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순다섯 살이 될 때까지,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지워져 가던 그가 인생의 황혼기를 맞을 즈음에야 드디어 빛을 본 것도, 당시 사람들이 파악하기에는 너무 큰 인물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부터 들어서는 정부마다 정체성의 위기를 언급하며, ‘나라 바로 세우기’, ‘제2의 건국’, ‘과거사 청산’을 부르짖고 있다. 우리의 과거와 과거 속의 인물들을 청산하다보니, 오늘날 우리에게는 지표를 삼고 따를 수 있는 큰 인물 하나 변변히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지난 십여 년간 ‘지지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위대한 대통령’들이 계속 나오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나는 처칠이 귀족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명문대학을 나오고, 부모 덕분에 순탄하게 살았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좌절에 빠져서 인생을 포기했을 만큼의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다. 그는 아무 흠도 없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완벽한 지도자가 아니라, 평생토록 고칠 수 없었던 수많은 결점을 가지고 고단한 삶의 고비를 넘어갔던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그는 결코 행복하게 자라지 못했고, 장년이 되었을 때 항상 위기와 도전의 나날을 보냈으며, 노년이 되어서까지 갈등과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처칠은 실패한 인생의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책에서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처칠이라는 역할모델을 통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비결을 찾아보려고 했다.


II. 절망의 바다를 넘어서


가정환경

처칠의 아버지 랜돌프는 영민하고 유능하다는 평을 받았고 비교적 관운도 좋아서 37세에 영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재경부 장관이 되었다. 랜돌프는 분명 열심히 살았지만, 그의 사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에 대해서도 살갑고 따뜻한 편이 아니었고,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맏아들 처칠에 대해서도 그는 자상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들을 격려하거나 용기를 북돋아 주기는커녕 항상 한심하게만 생각했다. 당시 영국 귀족 집안의 자제들은 목사나 변호사, 혹은 군인이 되어 사회지도층으로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내에게 처칠이 목사가 되기에는 성격이 너무 안 좋고 변호사가 되기에는 머리가 나쁘니 군인밖에는 할 것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아들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다. 나아가 자기 아들을 ‘전혀 쓸모없는 놈’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모든 증거를 검토해 보면 랜돌프는 자식에 대해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냉혹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어린 처칠이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조차 금지하고, 반드시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명령했을 정도였다.


혹시 랜돌프는 처칠을 자기 핏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처칠의 부모는 금슬이 썩 좋은 편도 아니었고 게다가 어머니 제니는 워낙 바람기가 많은 여자였으므로 그런 의혹을 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자기 생활을 즐기기에 너무 바빴던 제니는 아이들의 양육을 유모와 하인에게 맡겨 버린 채,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들이 일곱 살 무렵이 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에 보낸 뒤, 찾아가지도 않았다. 아이들에게 돈을 보내 주고 가끔씩 편지를 쓰는 것으로 어머니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처럼, 아들을 사랑하긴 했어도 평범한 어머니들이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과는 많이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고, 그 때문인지 장남 처칠과는 일찍부터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고 일체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편한 사이로 지냈다. 이미 귀족 사회의 사교모임이 주는 즐거움을 알아 버린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결코 씀씀이를 줄이지 않고 늘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


처칠의 아내 클레멘타인 호지어는 처칠보다 열한 살이나 어렸다. 그녀에게는 정치적 배경도, 재산도 없었지만 처칠은 그녀를 두 번째 만났을 때부터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러나 처칠과 클레멘타인은 애초부터 성격이 달랐다. 처칠은 돈을 헤프게 쓰고 사치스럽고 친구들을 좋아했지만 클레멘타인은 구두쇠에 비사교적이었다. 또 처칠은 섬세하지 못하고 덜렁대는 성격이었지만, 클레멘타인은 매사에 꼼꼼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리고 처칠은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잠들었지만, 클레멘타인은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었다면, 불행하게도 두 사람 모두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는 점이다. 처칠은 가부장적이고 지나치게 남자다운 성격이었고, 클레멘타인 역시 얌전하거나 순종적인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혼 초부터 둘 사이에는 싸움이 잦았다. 이처럼 성격적인 차이가 두드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결혼 초기에 두 사람 사이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사람은 각방을 쓰기 시작했고, 다시는 같은 방을 쓰지 않았다.


냉담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처칠 자신은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했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항상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많지 않았으므로, 자녀문제는 대부분 클레멘타인의 몫이었다. 특히 처칠 가의 사람들은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이 남달리 강했는데, 재능이 있었던 처칠과는 달리 그의 자녀들은 그런 욕망에 부합하는 재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늘 우울증, 알코올중독, 불행한 결혼 생활과 이혼과 같은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았다.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불같은 성격과 추진력, 강한 자존심과 무모함뿐만 아니라, 술과 담배에 대한 탐닉과 같은 단점들도 공통적으로 물려받았다.


성적

위대한 인물의 개인사를 보면, 학창시절부터 뛰어난 능력과 출중한 면모로 주목을 받지만, 처칠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실 학창 시절의 처칠은, 훌륭한 인재를 배양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공교육의 전형적인 실패 사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처칠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성적이 좋지 않았으며 게다가 수업태도마저 좋지 않아서 늘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문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제인스 흄스가 쓴 『처칠』에 따르면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에만 열중했기 때문에 학교 성적이 나빴고, 게다가 교사들에게도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았다. 그로 인해서 자주 교장실로 끌려가 엉덩이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몇 시간 동안이나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체벌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처칠의 학교생활이 그토록 힘들었던 것은 물론 그가 공부에 소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집이 셌기 때문에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던 교사들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당시 학교교육에서는 무엇보다도 규율과 질서가 중요시되었지만, 처칠은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규칙은 지키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칠은 고등학교 성적이 나빴기 때문에 다른 명문가의 청년들처럼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과 같은 일류 학교를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샌드 허스트 사관학교에 지원했지만 두 번이나 시험에 낙방했다. 아버지로부터 “전혀 쓸모없는 놈”이라는 심한 꾸지람을 듣고 난 처칠은 하는 수 없이 고시원에 들어가 6개월 간 과외 선생들로부터 집중적인 교육을 받으며 세 번째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수업의 내용을 전부 외울 수 없었던 처칠은 세 번째 보는 시험에도 합격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사관학교 입시에는 세계의 여러 나라 중에서 하나를 정해 그 나라의 지도를 자세히 그리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처칠은 고민을 하다가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수많은 나라 중에서 뉴질랜드를 찍어서 집중적으로 준비했다. 그런데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입시에서 그 많은 나라 중 뉴질랜드를 그리라는 문제가 나왔던 것이다. 이 행운에 힘입어 처칠은 기적적으로 세 번째 시험에 간신히 합격했다. 만약 이때 처칠이 세 번째 시험에 낙방했다면 아버지가 취직을 주선해 준 런던의 어느 은행에서 평범한 은행원으로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돈

처칠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26세 때부터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인으로 일생을 보냈지만 말년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평생 돈 문제로 고통을 받았다. 처칠은 그 당시 다른 정치인들처럼 병원이나 사회복지 시설에 기부를 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어떤 원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늘 돈 문제로 시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처칠의 문제는 바로 그의 소비성향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수입에 맞추어 돈의 씀씀이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씀씀이에 맞추어 수입을 조절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돈의 씀씀이가 매우 헤펐던 것이다. 수입이 별로 없을 때에도 잦은 국내외 여행, 값비싼 술, 쿠바산 시가 등 사치스럽게 살면서 듬뿍 듬뿍 돈을 써댔다. 뿐만 아니라 사교 파티도 자주 열고 원정 도박에도 빠졌기 때문에, 항상 돈이 모자랐던 것이다. 사실 처칠의 이런 낭비 습관은 집안 내력이다. 낭비벽이 심했던 처칠의 부모도 절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글을 많이 써도, 1931년부터 10년 동안은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실업자로 살았기 때문에 생활은 점점 더 곤궁해져만 갔다. 처칠이 수상이 되기 직전인 1938년에는 빚에 몰린 나머지 그토록 아꼈던 차트웰 저택을 경매에 내놓고, 월급이 나오지 않는 하원의원 자리를 그만두고 무슨 일이든지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다. 이때 만약 돈 문제 때문에 하원의원직을 그만 두었다면 1940년에 그는 결코 수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수상으로 재직한 동안에는 빚 문제가 그토록 심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1945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다시 실업자가 되자, 빚 독촉이 더욱 심해졌고 다시 차트웰 저택을 경매에 내놓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세계를 구한 영웅 처칠이 집 한 칸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를 딱하게 여긴 독지가가 차트웰 저택을 사서 처칠이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월세로 머물 수 있도록 해주었다. 평생 그를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빚 독촉과 돈 걱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여든 살이 넘어서였다. 그제야 비로소 처칠은 책의 판매수입으로 빚을 갚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격

처칠은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정치계에 뛰어들어 숱하게 많은 사람들과 사귀며 항상 사회의 유명인사로서 살았지만 결코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는 내성적이고 외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보수당에서 자유당, 다시 보수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인도, 쿠바, 수단, 남아프리카 등 많은 지역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지만 평생 동안 절친한 친구란 없었다. 처칠이 히틀러나 루스벨트와 같은 그 시대의 다른 지도자와 달랐던 점은 의회 안이나 의회 밖에 자신을 위한 상근 조직도 없었고 맹목적 충성을 바치는 추종자도 없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은 마당발이어서, 아는 사람도 많고 친한 사람도 많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게 드러내놓고 혐오의 감정을 나타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정치인은 붙임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지역구에 형님, 아우가 수백 명씩 되기도 한다. 그런데 처칠은 평생 지역구 의원을 했고 수많은 선거를 치렀지만, 좋고 싫음이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느니 차라리 혼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처칠의 주치의였던 모란 박사는 훗날 회고록을 통해서 처칠이 평생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처칠의 우울증은 이미 서른일곱 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배를 타고 여행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바닷물 속에 뛰어들까 봐 여객선의 난간 근처에 있기조차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 행로가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이가 든 뒤에도 우울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우울증을 치료하려고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 다녔지만 증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세계의 영웅이 된 노년에도 우울증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1945년에 총선에서 패배했을 때는 물론이고 1955년에 마침내 공직에서 완전히 은퇴한 뒤에도 수시로 찾아오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일을 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그토록 열심히 일에 몰두했던 이유도 사실은 언제 닥쳐올지 모를 우울증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처칠은 무척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쉽게 흥분했고, 감정이 격해지면 공식 모임에서도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예나 지금이나 무릇 위대한 지도자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한다. 정치가가 아니더라도 성인 남자가 그처럼 공공연히 눈물을 흘리는 것은 누가 봐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처칠은 영화를 보다가도 눈물을 쏟고, 연설 도중에도 감정이 고조되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성격은 전쟁 중에도 드러나서, 장군들에게 전투개시 명령을 내릴 때에도 사상자들부터 먼저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처칠과 맞서 싸웠던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강한 자는 항상 옳다. 약한 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잊어라.” 외모관리에 철저했던 히틀러와는 달리, 처칠은 세밀한 자기 연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처칠이 누구 앞에서나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달리 말해서 다른 사람의 반응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히틀러가 대중을 면밀히 연구해서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자기 이미지를 세밀하게 만들어 나갔다면, 처칠은 대중이 언젠가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좋아해 주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


처칠은 친절하거나 부드러운 리더가 아니었다. 무릇 위대한 지도자에게는 아랫사람들을 잘 감싸고,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조차 용서하는 아량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보는 정치인들도 뒤에서는 서로 헐뜯고 싸울지언정 앞에서는 언제나 웃는 얼굴에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쓴다. 그처럼 정치인들이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이유는 대중에게서 편협하다는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언제 판세가 뒤바뀔지 모르는 정치판에 훗날을 위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처신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처칠은 위선적인 예의를 차리는 일반적인 정치인과는 달리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먼저 처칠을 공격하면 때로 무례할 정도의 반응을 나타냈다. 물론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 상대방에 대한 원한을 담아 두지는 않았다.


아랫사람들에게 친절하지 않았더라도 윗사람들로부터 믿을 수 있는 후배로 인정받았다면 좋았으련만, 그러지도 못했다. 그는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남의 생각과 자기 생각의 차이를 조율할 줄 몰랐다. 처칠과 히틀러 리더십의 유형을 비교하자면, 히틀러가 비서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반면, 처칠은 그렇지 못했다. 우선 처칠은 전시가 아니라 평화시에도 항상 일에 열중한 만큼 주위 사람들을 들들 볶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일 년 중에서 크리스마스 하루를 빼고는 일요일도 공휴일도 없이 일해야만 했다. 처칠은 잠을 자다가도 갑자기 생각이 떠오르면 새벽에도 부하직원이나 비서를 전화로 깨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비록 전시이기는 했지만, 그는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항상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고, 각료들도 하루 24시간을 전쟁업무의 수행을 위해 바쳐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히틀러가 비서들에게 다정다감하고 사려 깊은 상사였다면, 처칠은 비서나 직원의 기분 따위는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 이상적인 리더라면 그토록 강도 높은 일을 시키더라도, 직원들의 경조사를 챙기고, 개인적으로는 따뜻하게 대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처칠은 직원들이나 부하들에게 별로 친근하게 대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자기와 함께 오랫동안 일한 직원이나 하인들의 이름조차 외우지 못했다.


건강

처칠은 장수했지만 남달리 건강했다고 볼 수는 없다. 더욱이 그의 집안 남자들은 장수하지 못했다. 처칠의 아버지도 마흔여섯 살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떴고 조상들 중에서도 남성들은 대체로 일찍 사망했다. 그래서인지 처칠 자신도 늘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처칠은 평생 여러 가지 병마에 시달렸는데 그를 가장 괴롭힌 병은 폐렴이었다. 의학이 그다지 발달되지 못했던 당시에 폐렴이란 단기간에 완치될 수 없는 아주 중대한 병이었다. 처칠은 그 병을 친구처럼 데리고 평생을 함께 지내야 했다. 그가 처음으로 폐렴을 앓았던 것은 열세 살 때였는데, 그 후에도 종종 재발하여 그를 괴롭혔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전개되던 중에도 처칠은 폐렴과 심장병으로 시달려야 했다. 결국 전쟁이 끝나고 처칠이 다시 수상직에 오른 1953년 6월에는 치명적인 심장발작을 일으켜서 1955년 그가 정치계에서 은퇴한 원인이 되었다.


자기관리

전통적으로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종교적인 지도자가 표를 많이 얻기 때문에 유력 정치인들은 고의적으로 종교를 믿고 이를 표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처칠은 신앙심도 별로 없었고, 평생토록 교회에도 잘 가지 않았을 뿐더러, 억지로 신앙심이 깊은 체 하지도 않았다. 처칠은 종교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종교에 대해 심한 비난을 퍼붓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처칠이 무신론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와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힘은 믿었으니 교회의 가르침보다는 자신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했던 것이다. 유달리 자의식이 강하고 남의 말 듣기를 싫어하던 처칠이 엄격한 교회의 규범을 싫어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특히 싫어한 것은 종교가 요구하는 무조건적인 복종이었다. 처칠은 평생 자기 외에 다른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사람이 종교나 정치적인 신념에 의해 완전히 개조되어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주장을 경멸했다. 사상투쟁을 통해 국민들을 ‘새로운 인간형’으로 만들고자 했던 나치 독일이나 소련을 싫어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대인관계

원래 정치인들에게는 당연히 정적이란 것이 있기 마련이지만, 돌이켜 보면 처칠은 그 당시 정치인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심한 모욕과 비난을 받았던 정치가였다. 그래도 그는 평생토록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에 초연했을 뿐만 아니라, 별로 상처를 받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처칠은 항상 그 책임을 뒤집어썼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그만큼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조그만 고통에 좌절하여 포기한다면 커다란 고통을 피할 수 있겠지만, 만약 포기하지 않고 분투한다면 점점 더 큰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좌절하고 쓰러질 어려운 상황에서도, 처칠은 잘못을 인정하거나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무리 욕을 하고 모함하고 비웃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살아가면서 더욱 심한 비판과 공격을 받게 되었다.


III. 나도 성공할 수 있다


처칠은 당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파시즘으로부터 세계를 구한 세계 최고의 정치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사후에 인정을 받는 여러 위인들과는 달리 처칠은 생전에 최고의 영예와 존경을 받았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아무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위대한 역사 그 자체’로 대우 받았고 사람들은 그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보냈다. 처칠의 인생에서 예순여섯 살까지의 정말 힘겨웠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 이후의 삶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해피엔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가 받았던 존경과 누렸던 영예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지켜온 기본 원칙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영광이 더욱 더 빛이 나는 것이다. 처칠의 성공비결 뒤에 숨어 있던 그 원칙은 어떤 것일까? 윈스턴 처칠의 이니셜을 따서 WC원칙이라 명명한 15가지 비결을 알아보자.


WC 1 원칙_자신을 사랑하라

사실 그는 성공한 정치인이 되기에는 결점이 너무 많았다. 학벌도, 지역적 기반도, 믿고 따르는 지지 세력도, 모아놓은 재산도 없었다. 특히 장관 시절의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언론이나 국민들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자신을 미워하거나 비하하지 않았다. 만일 주위 사람들의 말 때문에 자신의 신념이 흔들렸다면, 그는 아마도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전역 후에는 연금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처칠이 뒤늦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능력과 운명을 믿었기에 자기 행복이나 성공의 기준을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맡겨 두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은 여론을 따르지만, 영웅은 여론을 만든다. 이 모두가 자신에 대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WC 2 원칙_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오늘날 현대인의 평균수명은 전 세대에 비해 훨씬 더 길어졌지만, 경제활동이 가능한 나이는 오히려 더 줄어들었다. 젊음을 찬미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직장인들은 30대 후반만 되어도 벌써 심적 부담을 갖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이 크겠지만, 사람들이 너무 조급하게 성공하려는 의지를 발산한 탓도 있다. 어떤 이에게는 실제로 아주 이른 성공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무려 66년을 인내하며 기다렸던 처칠을 생각해 보라. 처칠은 결코, “난 이미 늦었어”라는 말로 포기를 정당화하지 않았다. 어쩌면 가장 늦은 때가 가장 빠른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성장을 멈추기로 작정하는 순간부터 늙는 것이다. 그가 일흔여섯의 나이에 다시 수상이 되겠다고 나섰을 때, 사람들은 그의 나이를 들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결국 당선되었다. 이제는 늦었다고 모두가 포기하는 나이에 새롭게 도전하고 노력하여 성공을 이룬 처칠의 인생은 더 나은 삶을 찾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최고의 모델이다.


WC 3 원칙_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처칠은 일찍부터 수상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무모한 야심가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수상으로 갖춰야 할 모든 소양에 대해 철저히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야인으로 있는 동안에도 유럽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정보를 얻는 등 항상 유럽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 정부의 관료들이나 교수들과 교분을 유지하면서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운명적인 기회가 찾아오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기회를 잡을 수 없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세, 꿈을 이루기 위한 줄기찬 노력에 운명의 여신은 미소를 보내는 법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대한 꿈을 품는다. 그러나 그 꿈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 마련이고,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한 이유를 찾아내며 꿈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처칠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강한 의지력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실패가 거듭되어도, 한 번 품은 꿈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좌우명이기도 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WC 4 원칙_운명과 싸워라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불행했던 그의 어린 시절은 어른이 된 뒤 그를 지극히 가정적이고 자상한 가장으로 만들었고, 성적이 썩 좋지 않았던 그의 학창 시절은 훗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진지한 자세의 바탕이 되었다. 세 번의 청혼실패 뒤 결혼한 클레멘타인과 처칠은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폭풍우와 같던 처칠의 일생에 든든한 기둥이 되었고, 마침내는 영웅 처칠을 만들어냈다. 물론 가정을 꾸린 이후에도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지만 바로 그 어려운 경제 사정 때문에 처칠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또한 어떠한 정치적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였지만, 바로 그 독립적인 입장 때문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 학연이나 지연에 구속되지 않고 공정한 전시내각을 구성하고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운명에 순응하며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역사는 처칠을 통해 운명에 맞서 단호하게 싸울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자기 운명의 지배자가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WC 5 원칙_저 높은 곳에 목표를 설정하라

처칠은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터무니없는 비난을 받고 구설수에 올랐을 때에도 항상 문제를 정면돌파했으며 결코 회피하거나 술수를 쓰지 않았다. 인생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은 다다넬스 패전에 대해서조차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패전의 책임이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키치너에게 있다고 말했다. 작전계획을 세운 사람은 처칠이지만 키치너가 계획과는 달리 육군을 파견하지 않았기에 오직 해군의 전력으로만 힘겨운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칠은 키치너의 행동을 전혀 문제 삼지 않은 채,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고 깨끗하게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작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작은 시련에 좌절하지 않는다. 처칠의 60년에 걸친 공직 생활 중, 돈 문제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추문에 휩싸인 적이 없었던 것은 그가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WC 6 원칙_희망의 편에 서라

똑같은 병사와 함선을 가지고 이순신 장군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원균은 참패를 당했다. 그러한 리더십의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뛰어난 리더는 국민이든 병사이든 간에 조직에 속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경멸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긍지를 심어주며 공로를 인정한다. 즉, 평범한 지도자는 오직 자신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려고 애쓰지만 뛰어난 지도자는 평범한 사람들을 뛰어난 인물로 만들고 성공의 열매를 함께 나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처칠은 주위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찬양할 때마다 자기가 영국 국민들을 바꿔 놓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대한 능력을 일깨워 준 것에 불과하다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원대한 꿈을 품고 있다면 현재의 고통은 참을 수 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희망이 바로 행복의 열쇠다. 절망하고 있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미래에 대한 진정한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면, 그리고 오래전에 품었던 큰 꿈을 간직하며 살도록 해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WC 7 원칙_바른 길로 가라

그가 다른 정치인과 확연히 구별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있었다는 점이다. 처칠은 어렸을 때부터 구속 받는 것을 싫어했고, 교조적인 조직에 적응하지 못했다. 평생 종교적이지 않았고, 또 일정한 정치파벌에도 속하지 않았다. 구속을 받거나 예속되는 것을 싫어했던 만큼, 그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했다. 그는 전체주의적인 나치즘을 증오했고 나치 독일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항복 이외에는 어떠한 평화협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전쟁에서 진다면 처칠이 독일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거라는 나치의 선전을 믿고, 끝까지 연합군에게 저항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의 진심을 의심했던 사람들도 마침내 평생에 걸친 그의 노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남들이 당장 알아주지 않아도 항상 크고 바른 길을 가려고 노력했던 처칠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최후의 승리자가 되려면 항상 바른길로 가라.”


WC 8 원칙_정직이 최선의 전략이다

처칠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항상 정직하게 국민들에게 진실을 말해 주었다. 그는 수상이 되자마자 “내가 여러분에게 줄 것이라고는 피와 땀과 눈물과 노고뿐”이라고 말해서 당시의 상황이 최악임을 알렸고 “지금 영국과 다른 나라들은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고 밝혀 영국 국민들에게 앞으로는 더 큰 희생과 고통이 찾아오리란 사실을 정직하게 일깨워 주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했을 때에도, 싱가포르가 함락되었을 때도 그 어두운 패배의 소식을 있는 그대로 국민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위기의 시간에도 변함없이 당당한 자세와 강인한 의지를 보여 줌으로써 항상 주위사람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그는 아무리 나쁜 소식이 있어도 결코 동요하거나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늘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런 긍정적인 힘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주변에 퍼지는 것이다. 처칠에게는 바로 그런 강력한 힘이 있었다.


WC 9 원칙_원칙에 충실하라

전쟁이 시작되자 곤경에 처한 영국에게 나치는 끊임없이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국내에서도 나치와의 협상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지배적이었고, 심지어 처칠 내각에서 외교부 장관을 맡은 핼리팩스 경까지도 그런 주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처칠은 그 모든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오직 “무조건 항복”만을 강경하게 요구했다. 처칠에게 나치는 도저히 남겨놓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범죄 집단이었기 때문에 존속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히틀러에게 양보를 거듭한 체임벌린 수상은 평화애호가이자 유능한 협상가로 칭송을 받았다. 반면에 융통성 없이 원칙을 고집하는 처칠에게는 “전쟁미치광이” 혹은 “파시스트”라는 비난이 퍼부어 졌다. 그러나 역사는 고집쟁이 처칠이 옳았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독일과의 협상을 주장했던 수많은 ‘이성적인’ 지식인들의 이름은 역사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혹은 체임벌린처럼 치욕스러운 이름을 남겼을 뿐이다. 원칙은 왜 중요한가? 원칙은 우리 사회에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여 주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비슷한 두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권위를 잃게 된다. 비록 선거에서 지더라도, 여론의 뭇매를 맞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는 것을 처칠은 말하고 있다.


WC 10 원칙_유연하게 대처하라

처칠은 목적에 부합하는 인물이라면 그가 어떤 파벌에 속해 있든지,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든지 개의치 않고 서슴없이 일을 맡겼다. 반면에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장군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가차 없이 해임했기 때문에 처칠 휘하의 장군들은 항상 긴장하고 있었다. 유일한 목표를 두고 그것을 이뤄가는 데 있어 기본 원칙에는 철저하되, 그 추진 방법에 있어서는 유연함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처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목표를 달성해 나갔다. 처칠은 가장 큰 목표, 즉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는 설사 자기와 의견이 다르거나 자기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과도 손을 잡았기 때문에 오늘날 경영학에서 말하는 ‘목표지향성 관리’를 일찍이 실천한 지도자였다. 만들어 놓은 이미지와 실제의 모습이 전혀 다른 수많은 정치인들과는 달리, 주위의 사람들의 그 인간미에 스스로 탄복하게 만드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WC 11 원칙_현장에 있으라

처칠은 아프리카나 유럽 전장에 불쑥 나타나 전황을 살피곤 했다. 수상이 전장에 나타나면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효과도 있었지만, 현지사정을 파악해야 런던에서 적절한 작전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처칠은 전투가 치열한 최전방에서 요란한 총소리를 들으며 막사 식당에서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현대 경영학에서도 CEO가 가급적 업무현장을 자주 돌아다니는 것이 회사의 능률도 높이고 사원의 사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돌아다니며 경영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자가 귀한 때였으므로 정부가 전선에 있는 전체 병참을 개선하기는 어려웠지만 병사들은 세심한 수상의 배려에 감사하고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노년의 수상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주 최전선에 나타나 병사들과 대화하는 것은 처칠이 택한 자기희생의 방식이었다. 병사들은 처칠을 보고 처칠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꼈다. 늘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현장에 정통했던 처칠의 예는 속도가 곧 경쟁력인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덕목일 것이다.


WC 12 원칙_사소한 일에 인생을 허비하지 마라

처칠은 정적들에 의해 터무니없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고, 괴팍했던 아버지와 바람둥이 어머니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런 쓸데없는 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정치적인 패배, 경제적인 어려움, 신체적 불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칠에게 그런 것들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시대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때가 오면, 모든 비난과 트집을 일거에 잠재우고 실패와 패배를 딛고 일어나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길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마술처럼 그런 일이 일어났다.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 되겠지만 지나치게 과장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문제를 갖고 있으며,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거나 극복할 필요도 없고,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처칠은 자기가 가진 많은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무기력하게 현실에서 도피하지도 않았지만, 현실의 사소한 어려움이 그의 강한 의지를 꺾을 수도 없었다. 쓸데없는 것들에 의해서 자기 인생이 좌우되기에는 한 번뿐인 인생이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이다.


WC 13 원칙_유머를 가져라

처칠은 유머감각을 타고 났던 것이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처칠의 부모가 남을 즐겁게 하는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니 집안 분위기가 화기애애했을 리도 없다. 학창시절에도 처칠은 재미있는 말과 행동으로 반 친구들을 웃기고 주목을 받는 학생이 아니라 늘 조용히 구석에서 혼자 지내는 외톨이였다. 그처럼 처칠의 뛰어난 유머는 타고 났거나, 남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처칠의 유머와 연설은 자연스럽고 즉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고 반복한 연습의 결과로 이뤄진 것이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웃음의 힘을 믿었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웃음을 피어나게 하는 유머의 능력을 믿었다. 그의 낙관론과 유머는 주위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전 국민들 사이에 퍼져서, 전쟁의 비극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으로 작용했다. 유머와 웃음이 자기의 삶은 물론 남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최초의 지도자가 바로 처칠이다.


WC 14 원칙_과거는 묻어 버려라

처칠의 장점은 상대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반대당이 반대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만약 찬성만 한다면 반대당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상대의 공격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항상 치열하게 살아가는 투사였기 때문에, 상대방도 그처럼 전력을 다해 투쟁할 것을 기대했다. 따라서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이 아무리 격렬하게 그를 비난해도 상대방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품거나 언짢은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가 항상 미래를 바라보고 살면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강한 자의식에 있었다. 심지어 자신을 모욕한 사람에 대해서도 그가 증오감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언젠가는 상대방도 자신의 진심을 알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설령 지금 당장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뒤를 보고 걷는 자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우리의 두 눈이 얼굴에 있는 이유에는 뒤가 아니라 앞을 보라는 뜻이 숨어 있음을 새겨야 할 것이다. ‘오직 앞만 보고 산다.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것이 처칠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이다.


WC 15 원칙_약점을 강점으로 만들어라

처칠은 물론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단점들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또 어떤 단점은 고치려고 애를 썼지만, 평생 간직한 것도 있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단점만을 탓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점이나 약점들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처칠과 같은 영웅들도 평생 고치지 못했던 문제이다. 극복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면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울러 그 단점을 전환시키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처칠은 가장 모범적인 예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우리가 처칠을 실패자로 보지 않는 이유는 처칠의 위대함이 그가 가진 많은 단점을 모두 덮어버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처칠이 평생 자기의 단점들을 짊어지고 산 것처럼 우리도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에게 단점이 있을지라도 그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 놓고, 큰 장점들을 살린다면 처칠 같은 위대한 인물의 전례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 |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자다가 갑자기 깨어나 한참을 뒤척여도 쉽사리 잠들지 못한 적이 있는가? 무언가 무거운 것이 가슴을 억누르는 것처럼 답답함을 느낀 적이 있는가? 열심히 살아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나쁜 일만 벌어져서 좌절한 적이 있는가? 애쓰다가 지쳐서 이 힘든 삶의 끈을 이제 그만 놓아버리고 싶은 때가 있었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처칠과 같은 사람이다. 


오늘날 혼탁한 세상에서 처칠의 성공이 유독 찬란하게 빛나는 것은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들과는 달리 처칠은 집안이나 친척, 처가, 학벌 같은 외적인 조력 없이, 주위에서 밀어주거나 도와주려는 사람도 없이 순전히 자기 힘만으로 노력해서 성공을 이뤘기 때문이다. 또 그 어려운 과정에서도 결코 자존심을 굽히거나 개인적인 욕심에 휘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칠은 가혹한 인생길에서 쓰러지면 혼자의 힘으로 일어나고 또 쓰러지면 다시 혼자서 일어나는 지독한 의지력으로 인생을 만들어 나갔다. 날로 삶에 지치고 힘겨운 사람들이 늘어가는 때, 처칠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40년이 되었지만 그가 남긴 역사의 유산은 더욱 크게만 느껴진다. 삶의 무게가 유달리 나를 짓누를 때마다 떠오르는 그의 말이 있다.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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