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3년된 블랙베리 펄 휴대전화를 성능이 더 향상된 블랙베리 볼드로 바꿨다. 당연히 나는 그동안의 기술 발전에 놀랐다. 나는 전화나, 메시지나 이메일을 쓸 일이 없을 때도 나의 볼드를 계속 만지작 거리며 화면의 놀라운 선명함과 트랙패드의 실크처럼 부드러운 움직임, 충격적인 반응 속도, 그래픽의 매혹적인 우아함을 경험하려 했다.
즉, 내 새로운 기기에 푹 빠졌던 거다. 물론 예전 휴대전화에도 지금처럼 푹 빠졌었지만 세월과 함께 우리 관계의 꽃은 시들어 버렸다. 우리 사이엔 신뢰의 문제, 책임의 문제, 호환성의 문제가 점점 불거졌고 나중엔 나의 펄이 제 정신인지 의심조차 생겨 결국엔 더 이상 펄과 관계를 맺기엔 내 머리가 너무 커 버렸다는 걸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전에 쓰던 펄이 나의 시들어 가는 사랑을 슬퍼할 거란 내 심정의 빗나간 의인화된 투사는 예외로 치고) 우리 관계가 전적으로 일방적이었다는 걸 구지 내가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난 지적하려 한다.
더 깊이 생각해보자. “섹시한”이란 말이 최신의 기기들을 묘사할 때 얼마나 널리 사용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사용해 하는 근사한 일들 (음성명령으로 작업을 시키거나, 두 손가락을 벌리는 아이폰 제스쳐로 이미지를 크게 하는 일같은 일들)이 백년 전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마법사의 주문이나 손놀림들처럼 보였을런지, 그리고 완벽한 에로틱한 관계를 묘사하고자 할 때 얼마나 우리가 마법과 같다고 말하는지.
시장이 소비자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찾고 반응함에 따라, 기술은 에로틱한 관계에 대한 우리 환상 속의 이상에 걸맞는 상품을 만드어 내는데 극도로 능숙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사랑을 받는 물건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지만 모든 것을 주며, 즉시 우리를 전능하게 느끼게 하고 더 섹시한 물건이 나와 서랍 속으로 쳐박히는 신세가 될 때도 우리에게 난리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는다.
좀 더 일반화 하자면, 기술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소망들에 무관심한 자연세계 (즉 허리케인과 고난과 상심의 세계, 즉 인간에 대한 저항의 세계)를 우리 소망들에 잘 응답하는 세계로, 사실상 우리 자아의 연장인 그런 세계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술 소비주의 세상의 첫번째 자기방어선은 자신의 적인 사랑을 상품화 하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는 자신이 가장 손꼽는, 가장 혐오스런 사랑의 상품화에 대한 예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들 수 있은 예로는 웨딩산업, 귀여운 아이들이 등장하거나 자동차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증정하는 장면을 담은 텔레비젼 광고, 그리고 다이아몬드 장신구를 영원한 헌신과 동일시하는 특히나 엽기적인 등식 등이다. 이들 각각은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뭔가 사줘야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위와 관련된 한 현상은 “좋아하다”라는 동사가 페이스북 탓에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에서 컴퓨터 마우스를 사용한 하나의 동작으로, 즉 하나의 감정에서 소비자 선택의 공적인 선언으로 변모된 것이다. 그리고 “좋아함”이란 대개 상업적인 문화 속에서 “사랑함”의 대체물이다. 모든 소비자 제품의 놀라운 특징은 (전자 기기들과 응용제품들의 경우 가장 극명한데 ) 엄청나게 호감이 가도록 디자인되었다는 것이다. 이점이 실은 소비자 제품의 정의이며 그런 면에서 다른 제품들, 즉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니며 제조사들이 당신의 호감을 사는데 집착하지 않는 그런 류의 제품들과 구분된다. (예를 들자면, 제트 엔진, 연구실 장비, 진지한 예술과 문학 작품들)
하지만 이런 소비자 제품의 특징을 인간 세계과 연관지어 생각해 본다면, 그래서 호감을 받고자 하는 필사적인 열망을 가진 한 인간을 당신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어떤 사람이 떠오르는가? 신실함이나 중심이 없는 사람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좀 더 병적인 경우라면 아마도 나르시즘에 빠진 사람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즉 호감받지 못했을 때 생길 자기 이미지 손상을 견딜 수 없어 타인과의 접촉을 멀리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기 인격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남의 호감을 사려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삶을 호감을 받는데 헌신하거나 아니면 호감을 사려고 근사한 인격의 가면을 쓰고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당신의 모습 그 자체로 사랑받기를 포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교묘히 머리를 굴려서 남들이 당신을 좋아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했더라도 어떤 면에서는 그 사람들을 경멸하는 맘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당신의 속임수에 속은 것이니까. 어쩌면 당신은 우울증에 걸리거나 알콜중독이 되거나 혹은 당신이 부동산 재벌 도널트 트럼프라면 대통령 후보로 나갈지도 (그러다 중간에 그만둘지도) 모른다.
소비자 기술 제품들은 그렇게까지 추한 짓들을 하진 않을 것이다. 사람이 아니기에. 하지만 그것들은 나르시시즘의 위대한 동맹이자 조력자이다. 이 제품들은 호감을 사려는 기본 디자인 외에도 우리 모습을 멋지게 비춰주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우리들의 삶은 섹시한 페이스북 인터페이스를 통해 걸러지고 나면 훨씬 더 멋져 보이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화 속의 주연이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사진들을 찍어대며, 우리가 마우스를 클릭하면 기계는 우리의 전능함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우리의 기술은 진정으로 우리 자아의 연장이기에 우리의 술수에 넘어간다고 우리가 사람들을 경멸하듯 그렇게 경멸할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하나의 커다란 무한궤도인 거다. 우리는 거울에 호감을 가지고 거울은 우리에게 호감을 가진다. 새로운 한 사람을 우리의 페이스북 프렌드로 올리는 일은 우리들을 돋보이게 하는 거울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개인적인 연회장에 그 사람을 단지 추가시키는 일일 뿐이다.
내가 너무 확대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은. 아마도 분명, 당신은 성질 고약한 한 51세 남자가 소셜미디어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는게 죽도록 실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목적은 기술의 자기애적인 성향과 실제적인 사랑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나의 친구인 앨리스 시볼드는 “진흙 구덩이 속에 들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 논하는 걸 좋아한다. 그녀는 사랑이 필연적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거울에 진흙을 튀긴다는 걸
알고 있다.
단순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완벽하게 호감을 사려 애쓰는 일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와는 병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머지않아 당신은 추잡하고 격한 싸움을 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말들, 즉 공평하고 친절하며 쿨하고 매력적이며 자제심이 있고 재밌으며 호감이 가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깨뜨리는 그런 말들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걸 귀로 듣게 될 것이다. “호감가는 성격”보다 더 진실한 뭔가가 당신으로부터 나오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당신은 실제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게 될 것이다
갑자기 진정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블랙베리냐 아이폰이냐 하는 소비자로서의 가짜 선택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은 “이 사람이 날 사랑하는 걸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누군가의 진정한 모습일찌라도 당신이 그 사람의 모든 면모를 좋아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호감의 세계란 궁극적으로 위선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진정한 모습의 모든 면모를 당신이 사랑할 수는 있다. 그렇기에 사랑이란 기술 소비자적 질서(the techno-consumerist order)에 커다란 존재론적 위협이 된다. 그것의 위선을 들춰내기에.
그렇다고 사랑은 오직 싸움이다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사랑이란 바닥을 알 수 없는 공감이며 다른 누군가가 우리 자신만큼 철저히 실제한다는 마음 속 깊은 깨달음에서 솓아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내가 아는 바로는, 언제나 구체적인 것이다. 전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이 가치있는 노력이지만 공교롭게도 그런 사랑은 언제나 자기 자신, 즉 자기 스스로의 도덕적, 영적인 평안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에 특정한 누군가를 사랑하려 한다면, 그 누군가의 고통과 기쁨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끼려 한다면, 우린 우리 자아의 일부를 내려 놓아야만 한다.
물론 이때엔 “거부”라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린 가끔 남이 싫어하더라도 감내할 수 있다 왜냐면 세상엔 우리를 좋아해 줄 만한 사람들이 아주 많으니까. 하지만 단지 호감이 가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누군가에 완전히 드러낸다면, 그리고서 거부받는다면, 치명적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고통의 전망, 대게는 상실과 헤어짐과 죽음의 고통의 전망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피하고 호감의 세계 속에 안전히 안주하도록 유혹한다.
하지만 고통이란 아프지만 우릴 죽게 하진 않는다. 우리가 고통의 대안, 즉 기술의 도움을 통해 자족(self-sufficiency)을 얻으려는 무통마취의 꿈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고통 없이 삶을 살아간다는 건 살지 않아온 것과 같다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심지어 스스로에게 “사랑과 고통 같은 건 나중에 겪지뭘. 한 30대 쯤에”라고 말하는 건 지구상에서 자리나 차지하며 천연자원들이나 태워써버리는 의미없는 삶, 소비자로써의 삶(난 가장 경멸적인 뜻으로 이 단어를 쓰고 있다) 에 10년간 스스로를 위탁하는 것이다.
대학에 다닐 때, 그리고 그 후도 여러 해동안, 나는 자연을 좋아했다. 사랑하진 않았지만 분명히 좋아했다. 가끔은 참 아름답다, 자연이란. 그리고 세상의 문제점들을 찾으려 애쓰다 보니 난 자연스럽게 환경운동에 매료되었다. 환경에는 아주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더 많은 문제점들을 내가 볼수록 (예를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 폭발적 수준의 천연자원 소비, 상승하는 전세계 기온, 쓰레기장으로 변해가는 바다들, 우리의 마지막 남은 처녀림에서 일어나는 벌목) 난 더 화가 났다.
그래서 결국 90년대 중반에, 난 환경에 대해 그만 걱정하기로 의식적인 결정을 내렸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의미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에 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헌신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난 여전히 내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을 적게 유지하려 했는데 그런 노력이 내가 다시 분노와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러자 뜻밖의 일이 내게 일어났다. 얘기하자면 긴 이야기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난 새들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맘 속에 상당한 갈등도 있었다. 왜냐면 새 관찰자가 되는 일은 지루한 일이니까, 그리고 진정한 열정이 드러나는 모든 일은 원래 지루한 일이니까.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도 모르게 내 열정은 커져갔다, 그리고 열정의 반쪽은 집착이지만 다른 반쪽은 사랑이다.
그래서 난 내가 본 새들의 목록을 꼼꼼이 기록해 왔고 새로운 종들을 보기 위해 애써 수고했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건, 내가 새를 볼 때마다 어떤 새이든 간에, 심지어 그것이 비둘기나 울새일지라도 내 마음이 사랑으로 넘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오늘 말하고자 하듯이, 사랑이란 우리의 고통들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제는 자연을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구체적이고 중요한 한 구성원을 사랑했기 에 난 환경에 대해 다시 걱정할 수 밖에 없었다. 환경문제에 관한 소식은 내가 환경에 대해 걱정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후에도 더 나아진 것이 없었고 실은 상당히 더 나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위태로운 숲과 슾지와 바다들이 이젠 더이상 내가 즐기기 위한 아름다운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내가 사랑하는 동물들의 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모순이 드러났다. 지구에 대한 나의 분노와 고통과 절망은 야생 조류에 대한 내 관심 때문에 더 커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류 보호에 참여하기 시작하고 새들이 직면한 많은 위협들에 대해 배우게 되자 내 분노와 절망과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일이 더 어려워진 게 아니라 더 쉬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내 생각엔 우선 새들에 대한 사랑이 내 속에 존재하는 줄 조차 몰랐던 내 마음 속의 덜 자기중심적인 중요한 부분을 여는 문이 되었던 것 같다. 세계 시민으로서 정처없는 삶을 계속하는 대신에, 좋아하기와 싫어하기 그리고 나의 헌신을 나중으로 미루기 대신에, 나는 어쩔 수 없게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완전히 거부해야 하는 내 자신과 조우하여야 했다.
바로 그런 일이 사랑이 인간에 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본질적 사실은 우리는 잠시 살아 있지만 머지않아 죽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우리 모두의 분노와 고통과 절망의 근본 원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을 회피하거나 혹은 사랑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방에 머물며 분노하거나 냉소하거나 혹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할 때 세상과 그 문제들은 참을 수 없는 좌절감을 준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실제 사람들 혹은 심지어 실제 동물들과라도 관계를 맺게 되면 당신은 그둘 중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게 된다.
그럴 때 우리에게 그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Jonathan Fran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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