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근대의 전쟁
기병시대의 도래
로마 군단의 쇠퇴
카이사르시대 : 로마시민들은 국가방위군인으로 애국적 자부심 보유
제정 로마시대 : 변경의 이민족 징집으로 애국심 결여
기병위주의 주변 부족들의 공격을 격퇴 위해 전통적 보병 중요성 감소, 기병 발전
아드리아노플 전투 후 900년 전통의 로마 중보병 몰락, 1,000여 년의 기병시대도래
★ ‘아’ 전투 : 378, 동로마 “발렌스”황제↔게르만 ‘고트족’, 로마보병 우위 과신 / 열세 기병 좌우분산,구릉으로 분단, 양익 축차 격멸, 퇴로차단, 부족기병이 로마군단 제압, 황제전사
※전법의 암흑시대
이스람의 탄생과 봉건제도 출현
동로마제국이 로마군단 일부 계승
훈련,편제 등, 비잔틴 군사력 역할 (기독교 전통이 이스람 세력에 압도 방지). ★ 330 동 ∙ 서로마 탄생, 476 서로마 멸망
이스람교 세력의 활동과 영향
7세기 초 탄생, 강대한 세력으로 수세기 영향을 미침
711년 이베리아 반도/고올 지방까지 침투, 732년 샤를르 마르텔에 의해 저지, 그로부터 760년 이후 유럽에서 축출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마뉴 : 전법 암흑시대의 등대
800년 황제 등극, 서로마 제국 부활선포, 남북 ; 북해-지중해, 동서; 대서양-카르파티아 산맥까지 팽창. 군사역량에 관한 자료 無
※샤를르마뉴 시대 군대법규 / 편제 ; 무능한 후계자들 왜곡 수정⇒ 중세 기병시대의 특징인 봉건제도와 기사도 출현
봉건제도와 장원의 모습
기독교의 영향과 십자군 전쟁(1)
봉건제도의 발전
소 지주들을 압도할 만한 중앙정부 부재
수적으로 열세한 정복자들이 피정복민을 예속하기 위한 방책
영주와 기사 주종관계, 보호명분으로 농민들로부터 공납 받음, 귀족과 하층민 극한대립
※교회가 대립 중재, 평화운동 전개, 기사 폭력 / 부정 규제
기독교의 영향과 십자군 전쟁(2)
십자군 원정(11세기)
교회의 평화운동에 기사 반발, 밖으로 전환 이스람과 전쟁 유도, 이교도에 대항-경건한 일.교황권한 강화
터키인 세력증대로 성지 순례 곤란, 모하메드인들의 세력확장에 반발 8회의 전쟁(1096~1270년)
※ 기병의 싸움, 돌격과 중량의 크기에만 집착 (공격용 무기,호신용 장구 중량 증대 ⇒ 기동성 상실)
★기동이 없는 곳 전략과 전술 부재
※ 영국 리차드1세 : 3차 십자군 지휘. 1191년 아르소우프 전투 ‘살라딘’ 격파 (정예병력 결정적 지점 투입, 집중돌격 승리)
징기스칸 (Genghis Khan)
몽고군의 특징(1)
몽골민족의 발흥
농경과 목축,1206년 테무진이 징기스칸으로 추대 된 후 평원으로 진출, 대제국 건설 ※유럽의 전법 암흑시대에 중세판 전격전 구사 ★ ‘징기스’ - 절대적인 힘, ‘칸’ - 왕, 군주
몽골군의 특징
전국민이 동원되는 개병제 : 남15~70세 복역, 여자/아이 같이 이동 병참지원, 자급자족
십진법에 의해 편성: 부락,씨족 등이 가구수를 기준으로 십진법 구성. 촌락/ 씨족중심으로 조직⇒ 단결력 높음
※ 토우만(사단)-10개연대(1,000명)-10개대대(100)-기병중대(10)
※ 전군이 기병, “사냥방법=전투방식”, 3살에 말에 태워 15살 사냥군. 병참/치중부대 불필요, “기동력 상상초월”(일일 최대 기동속도128~200km(평균11~12), 2차 대전 독일군-32km(평균6~8))
몽고군의 특징(2)
양마법(養馬法)은 기병전술효과 증대
사육 : 사초를 주지 않고 방목(먹지 못할 상황 대비) - 내성을 길러줌, 수 백km 달려도 땀을 흘리지 않음
훈련 : 생후 1~2년 초원 달리는 훈련 후 기마훈련.
발로 차거나, 물어 뜯거나, 울지 못하게 함 <기도비닉>
하마 후 고삐를 묶지 않아도 도망가지 않게 함.
종마 외 거세 : 온순, 지구력 강함 (안장 위 10주야 매복)
활용 : 출전시 1인당 2~5필 보유 - 필요 시 갈아타기, 돌격 시 새말로 바꿈. 비상시 “피”마시고, ‘젖’ 식사대용, 가죽으로 수통/도하장비
마구 : 나무안장/가죽으로 고정, 등-활 쏠 때 안정, 철제 말발굽.
무기 : 弓矢(궁시), 蠻刀(만도), 斧(부:도끼), 유영갑(가죽옷에 철편 보강), 나권갑(가죽 6겹).
금, 서하 등 정벌시 투석기, 카타풀트(곡사)등 공성무기와 화약무기 도입.
몽고군의 병세와 전술
토우만(기본전술단위) :소수의 경기병 정찰대, 전방의 중기병(40%), 후방의 경기병(60%),
*나이만 정복 시 확장(5군: 정찰대, 전∙중군, 좌∙우수군, 후군)
• 경기병 : 본대의 100km 전,후 사방 정찰(적,지형,식량 등)
輪番衝鋒戰術(윤번충봉) : 후위 경기병이 궁시 이용 수차 공격 적 대형 와해, 필요시 창/검으로 무장한 중기병 돌격
拉瓦(납와)전법 : 한면의 포위를 풀어주어 패주하는 적 공격하거나, 적을 출격케 하여 袋形陣(대:자루)으로 유도 포위공격.
성곽공격 : 부근 촌락 파괴(주민과 재산의 보호 의미 상실케 함), 촌민 강제 편입 축조공사 /공성의 선두.
선전심리전술: 초기전역 무자비한 파괴 살상, 죽기로 항거. 금 멸망 후 “항복하면 파괴행위를 않는다.”소문, 다투어 굴복
몽고(바이칼호 남쪽 카라코룸 지역), 西夏(몽고 남쪽), 金, 南宋(몽고 동남 지역), 吐番, 大理(몽고 서남 지역), 나이만(몽고 서쪽), 西遼(나이만의 남쪽), 花刺子模(오늘의 이란 북부와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나이만의 서쪽, 오늘날 이란 지방)
★유인물 ‘요도’참조
몽고는 바이칼호 동쪽 吉刺部와 서쪽의 克烈部를 멸망→극렬부와 같은 돌궐족인 나이만이 몽고를 경계와 증오
※ 테무진은 나이만 공격 결심
나이만과의 전쟁(1)
징기스칸의 전쟁준비
자기보존 : 정신무장강화, 편제 5군으로 확장
★ 5군 : 전군,중군 →전군, 중군,좌∙우수군,후군
적 파괴방안
적 이웃 부족 → 친 몽고화
간첩파견 적 내부전복공작과 요란 작전 구사
선전 통해 내부 분란 조성
★ 나이만군 5배 이상 우세, 외선 포위작전형세
★ 예) 다르하치움전투(카이사르-폼페이우스)
나이만과의 전쟁(2)
작전경과
나이만군 평야 쪽 공격 유도 (넓게 산개, 낮- 말 여러 곳 방목, 밤- 여러 곳 불, 대 병력 소문)
※ 적에게 포위 작전 무모, 전진에 의한 공격 최상의 방책임을 믿게 함
고지의 적은 몽고군을 대군으로 알고 자기방어 급급 (서로 협력 못함), 병력 집중 중군 돌파‘대양한’군 와해. 돌파 후 고지 적 포위격멸
결과 : 나이만 격파, 남쪽의 서요∙토번 항복.
”기만전술, 과감한 집중 / 돌파로 우세한 적 격멸”
서하 정복
서하의 특성 : 성곽으로 방호된 농경 지역
※유목민 전쟁과 다름 ⇒ 공성전법 터득 , 대제국 건설 관건이 될 곳
23년간 5차에 걸친 공격
1차 (1205) : 나이만 정복 후 회군 중 공격, 60일 동안 2개 성 공략, 주변 지역 약탈/ 회군
2차(1207) : 공성법 몰두, 몇 개의 성 공략에 그침
3차(1209) : 河水 유입 공성, 河水 제방 붕괴로 실패, 서하 강화 요청/급히 강화, 방향 전환 동쪽 金 공격 (만리장성 공략 곤란, 중원(金)얻기 위해 덜 방호된 측방으로 우회 필요 /서하 공략)
4차(1221) : 실패 (西征으로 전환) -제 1차 西征(총 3차)
5차 : 제 1차 西征 후 회군 時 공격, 23년간 전쟁으로 성을 제외한 전 지역 피폐, 방어 존속 이유 말살/ 멸망
제1차 西征
개요
1221년 4차 서하 공격 시 공성 곤란, 서정 전환, 회자자모 정벌 (크레와즘, 카스피해 동쪽 회교왕국)
크레와즘의 왕(모하메드), 상인들을 몽골첩자로 몰아 처형, ‘징’ 정벌 결심 ※크레와즘 : 모후 간 갈등으로 조정이 불안 /지지 받지 못함, 용병중심 군대 / 충성심 부족
작전경과
모하메드 왕 : 30만 시르강 배치,예비 사마르칸트와 보카라 대비
징기스칸: 10만을 4개 부대로 구분, 3개 “모”정면공격, 1개 부대 “징” 통솔 300마일 사막 우회기동 , 보카라 점령 / 병참선 차단
“모”방어에 집중 / “징”우회기동 모름, 보카라 공격 당하자 배후 위협 사마르칸트로 후퇴 도중 각개격파
※일한국을 세우고 회군하면서 5차 서하 공격 감행
金國 정복 / 2차 서정
징기스칸 사망과 유언
25세 민족을 일으켜 북부 통일 완수
1227. 8. 18 육반산에서 운명 (73세)
유언 “假渡於宋” : ‘송으로부터 길을 빌러 남으로 우회하여 金을 치라’ 성곽이 없는 지역(송)으로 우회 金 공격
♣ “하늘이 있고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정벌한다.” 는 세기의 영웅 ‘징기스칸’, 대제국 건설의 기초 닦음 ♣
金국 정복: 우회전략의 대표적 예,1234년 오고타이 金 점령
※야율초재 (요의 관료): 몽골을 대제국으로 다듬은 賢臣
2차 서정:우세한 기동력, 포위우회, 1241년 동유럽 석권
근세 초기의 전쟁
근세 초기의 전쟁(1)
개요
“13세기후반 중세의 특징적인 양상 변화 ”
정치적 : 십자군 원정 이후 교회의 권위 쇠퇴, 봉건영주세력 후퇴, 세속군주 입장 강화,
→ 중앙집권적 연방국가출현
사회, 경제적 : 상공업 / 화폐경제의 발달
→ 장원경제 붕괴
※ 봉건주의와 교회의 몰락으로 군사면 변화 불가피.
근세 초기의 전쟁(2)
백년전쟁(1337~1453)의 크레시 전투(1346)
배경 : 결혼정책으로 많은 봉토 소유한 영국의 에드워드가 프랑스 소유권 주장 / 침입
※ 영군의 장궁 : 정확성과 파괴력 뛰어남.
※ 프랑스: 제노아 용병, 보헤미아군 포함 3:1우세
경과 : 영, 장궁의 위력으로 제노아 용병 격퇴, 후퇴하는 제노아 군과 이를 저지/ 전진하려는 ‘프’ 군과 뒤섞여 혼란 /대패
※전쟁사 상 의미 : 궁수와 보병의 조화로 수적으로 열세한 영군 승리,
※ 크레시 전투 이후 ‘기사시대 종말’고하고, ‘보병이 전장 주역’으로 등장, ‘대포와 화약 최초사용’
화약의 출현(1)
1249년 로저 베이컨 화약 발명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화포 최초 등장 (조잡한 수준)
1418 프랑스 앙리 5세 루헨 포위전시 포병운용, 기동성 결여로 제한
1453년 (백년전쟁말기) 프랑스 화포 위력과 사거리에서 영국전술을 능가할 정도로 발전
• 야금술 발달로 총렬, 포신, 탄환 강도와 사수능력 향상
※ 화약 출현으로 영주의 상징인 성곽 무력화
화약의 출현(2)
화약무기는 비싼 값으로 領邦國家 등 소유
중산층인 상인 / 제조업자 독점, 봉건적 토지귀족 축출 수단, 정치적 중앙 집권화 가속
화폐경제 발달(십자군 원정-무역팽창, 제조업 발달)
장교가 됨으로써 사회적 지위보존 (봉건귀족들의 전쟁수단 독점 불가)
1346년 이래 2세기 동안 기병시대에서 화약시대로 전환
보병이 기병을 대신
화포의 위력 이 ‘방진 ∙ 군단 ∙ 기병의 충격력’을 대체
※ 근대적 전쟁으로 진입
소화기의 발달
대포의 발달
17세기의 전쟁
17세기의 전쟁
17세기 초 유럽 군대변화의 일반적 경향
다수의 용병을 포함 상비군 보유
화기의 비중 증가로 대형은 작고 융통성 있게 변화
활은 화승총으로 대체, 머스켓 소총의 비율 증가
기병은 주로 수색정찰, 교란작전 등에 이용
30년 전쟁(1618~1648)
신 ∙ 구교간 종교적 갈등으로 시작, 세력다툼으로 확산
카톨릭 (프, 독, 스웨덴) 세력이 신성로마제국에 대항
종교개혁은 민족국가의 성장과 분쟁의 국제화에 기여
※ “근대전의 아버지”라 칭하는 구스타부스 아돌프스 출현(18년간 6차의 전역을 통해 많은 군사적 업적, 전쟁종결에 기여)
구스타부스의 군사적 업적
편제개선으로 기동력 증대 → 현재 적용
기본 전투단위 squadron(대대), brigade(3~4 squadron)
2개 전열과 1개 예비대 사용 →현대 전법의 창시자
부대의 협동 →보∙포∙기병 통합 전투단으로 편성
소총 중량감소/ 2배의 화력증대, 대포 중량감소/효과와 위력증대. (경량화로 여단 배치, 대포 1문 이동 30~40 마리→1마리 말 운반)
오늘날과 같은 정찰과 추격방법 채택, 장구/장비의 경감과 훈련으로 행군능력 향상, 기병운영 개선하여 정찰대/ 착검 돌격에 운용
※기동 중시 전략 부각, 제병협동의 묘와 기습공격 부활, 화력극대화, 대규모 기동, 국민군의 동원시도
※주요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루첸 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1 )
개요
1631.9 구교 측 오스트리아 “틸리”군과 스웨덴/색소니 연합군의 “구스타부스”군 부라이텐펠트 대치
배치 / 대형
Tilly 군: 좌우 3km가 넘는 단열 대형, 양 측방 기병 보호, 포병 중앙
구스타부스: 좌익 색소니군, 중앙과 우익의 주공은 스웨덴군 담당 (중 포병-중앙 보병 보호, 측방 기병, ☞ 여단별 포병지원, 보병 중앙에 기병지원, 50명 단위 머스킷 소총부대 기병여단배속)
※유연성과 제병협동의 전형적인 대형
브라이텐펠트 전투(2)
작전경과
틸리군 좌익기병 : ‘구’군 우익 공격,
‘구’군은 기병에 배속된 소총수로 틸리군 기병 무력화 , 7차에 걸친 공격 모두 실패 ⇒ ‘구’군의 예비대에 쫓기어 전장 완전 이탈.
틸리군 우익 기병 : 좌익 ‘구’군의 색소니군 압박 / 측방노출
틸리군 사선기동 ‘구’군 좌 측방 공격,
‘구’군 중앙군 2열 틸리군 기동 저지, 보병여단 좌측 기동 / 화력집중 ★ 틸리군 포병: 전투 중 이동 불가, 포병지원 불가, 공격군 와해
브라이텐펠트 전투(3)
틸리군 진영 포연과 먼지로 50m 분간 곤란, “구”군 ‘틸리’ 좌익/ 배후공격, 포병 이동하며 주력 포격 → 격멸
결과 : Tilly군- 전사 12,600, 포로 9,000. ‘구’군 - 사상 2,000명
※1632 루첸전투 : 황제군의 발렌슈타인 패배, “구”의 상비군 우세, 구스타브스 치명상 <전술적 관점 고찰 가치 없음>
18세기의 전쟁
18세기의 전쟁
18세기 유럽의 정세와 프레드릭 등장
신성 로마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카룰 6세) 아들 없이 사망, “딸” 후계자로 선포
독일의 제 군주/귀족, 황제의 지배에서 벗어 날 기회
프레드릭 사태 파악, 함스브르크가 때문에 실레지아에 대한 요구 좌절, ‘실레지아’ 침입
Prussian way of war
혹독한 훈련과 규율, 탈영방지(삼림 숙영 회피,야간행군 지양 등)
훈련으로 소화기 사격속도 극대화(부정확성 극복, 대량사격 중시)
보병과 함께 기동하는 경량화 / 견마포 발전 (곡사포 1,300m)
“선형대형”으로 전방 화력집중 (사격속도 2배 이상, 1열 사격 후 무릎 꿇고 2,3열 사격)
프레드릭의 전략 전술의 특징
‘실레지아’ 전쟁은 프레드릭의 군사적 역량 배가 계기 (카이사르의 고올 전역 경험)
“기동력 / 전투력 집중”과“공세원칙”준수
초기 전투 실패를 성공으로 전환시킨 것은 ‘훈련과 숙련’깊은 감명→’기동력과 전투력 집중’ 착안---생애 ‘공세원칙’준수
수적 열세에 불구 선제권 장악
초기전투 승리는 자신의 전술적 기교 보다 적 기동력 결핍 이었다는 데 착안 기병 창설
※ 10년 평화기간, 국가 발전 위한 노력 /전쟁준비
과거 명장들의 전략 전술적 기술 부활
무기 발전과 변화한 19세기에도 기동의 중요성 불변 및 수적으로 우세한 적 제압 가능 입증
7년 전쟁(1756~1763년) (1)
개요
‘프레드릭’ 전쟁 목표 ; 삭소니 제압 후 연합군지원 이전 ‘오’ 와 평화조약 체결
★프러시아군-15만(인구500만), 연합군-45만(1억 이상)
프러시아의 전략적 위치
남- 삭소니 (1만5천), ‘오’(18만), 서- 프랑스 (14만),
동- 러시아 (10만), 북-스웨덴
⇒“내선작전”
작전경과
1756 삭소니군 제거에 예상 이상의 시일 소요
7년 전쟁(1756~1763년) (2)
작전경과(계속)
1757 ‘오’군과 접전 기도 / 불가, 오군 견제 / 프랑스군 공격 결심. 12일간 270km 기동, ‘프’ 군 전투회피/철수
※인접상황: ‘오’- ‘프레’의 분견대 격파/실레지아 침입, ‘러’-베를린 진군, 스웨덴-스테틴 봉쇄 ⇒ “프레” 결정적 행동 결심 : 지연전 승리불가, 연속적 승리
1757,11.로스밧하 ‘프’ 격파(2만5천으로 5만 격파, 300손실), 공격 전환 로이텐 ‘오’ 격파
1758,8.오데르강 기습도하 병참선 차단, 러군 후퇴/사주방어
로이텐 전투 (1757.12.5)(1)
개요
프랑스군 격파 후 실레지아의 정세 호전을 위해 급히 회군 (30일 288km).
• 분산 군 집결, 총3만 명(1/2-로스바하 승리,1/2- 오군에 패배)
‘오’군(챨스왕자) 8만 로이텐 포진(기복이 심한 지대 8km 전개, 우익 소택과 산림이 엄호, 예비대 좌익위치)
전투 경과
목표 “오군 격멸”
• 선제권 획득 자기 계획 실현 / 행동의 자유 보장
• 적 약점 이용
• 기동 / 공세의 원칙 준수
로이텐 전투 (2)
전투 경과(계속)
전초전 “오군 우익으로 프러시아군 주공 지향” 주공방향을 오인케 함,‘오’ 예비대증원
사선대형, 병력 우익(주공)에 집중, 중앙과 좌익 견제
포병화력과 전초보병 ‘오’군 좌익 돌출부 격파, 전대열 우측이동 ‘오’군 좌익 분쇄, 기병 적 측면 격파/혼란 야기
‘오’군 재편시도 / 혼란, ‘프’ 계속 압박 으로 ‘오’군 최후 계획 좌절, 잔병 도주, 대승
전투결과
‘오’군: 총 8만중 2만 여명 손실, ‘프’군 : 총 3만중 6,400여명 사상
로이텐 전투 (3)
교훈 및 평가
※ 나폴레옹 : “로이텐 전투는 기동과 결단이 낳은 걸작품”.이 전투 하나로도“불멸의 명예와 명장의 칭호”부여가능
• 공세,기동,기습,절약,집중 등 제 원칙 을 훌륭하게 적용한 역사적 사례
※ ‘에파미논다스’의 루크트라전투 “사선대형”보다 더 정밀, 우익 집중(강력한 주공), 중앙과 좌익 우세한 적 병력 견제
• 분명한 ‘목표’ : ‘오’군 격멸 / 접촉 일념 기동(로스바하~로이텐 : 30일 288km행군, 실레지아 분산된 병력 집결)
교훈 /평가 (계속)
• 획득한 선제권으로 자기 계획 실현(적 약점 이용, 기동에서 생기는 기만성 이용, 공세원칙 준수)→선제권과 기습에서 생기는 잇점 활용
• 정밀한 사선대형 ; 우익 주공 집중, 중앙과 좌익 견제(결전이 끝날 때까지 견제)
• 기동에 의한 기만성 : 병력 절약 / 집중가능
※정력적이며 유능한 지도자, 전쟁원칙을 건전하게 적용 3배의 적 격멸
프리드리히의 전투 (계속)
‘로이텐’ 전투 후 ‘오’에서 기동 중 ‘러(5만)’의 실레지아 침입, ‘프레’기동 중단
“프레”의 ‘러’군 추격, 오데르강 접전 (3만)
★알렉산드로스 “히다스페스”전투 재연
도하불가, 양동과 술책, 러군 진지 양공, 야음이용 북 24km지점 비밀히 도하
러군, 병참선 차단을 알고, 후퇴하여 강력한 방어진 구축, 함정에 빠진 줄 인식 “사주방어”편성
‘프레’, ‘러’군 측면 우회 공격, 역사상 치열한 전투, “프레”승리했으나 큰 손실(프 1/3, 러1/2)
프리드리히의 전투 (계속)
오데르강 전투 이후
‘프레’ 힘의 지나친 소모, 적도 그의 전법을 배워서 전쟁원칙 적용 / 기교 향상 (한니발의 적과 동일)
①전투 회피/목적 달성 →‘기동’ 적용 ★ 초기 기동-적에게 전투를 강요하는 수단, 후기-전투회피 수단
②보병 감소, 포병 전술과 기술 발전 “견마포(함께 이동) ”
7년 전쟁 후반 교묘하게 결전 회피
‘프러’의 사주방어에 연합군 위협과 압박/실패
1759 “러”와 쿠네르스도로프 전투에서 서투른 협동공격으로 정예군 절반 상실,1760 다시 적 굴복 시킴
연합군 한 가지 방안 수립(‘오’ 군 일부 “프러”군 견제, ‘오’군과 ‘러’군 실레지아 침입, 스웨덴 발틱해 봉쇄)
→ ‘프레’ 책략 “기만 ∙기동”으로 적 혀를 찔러, 행동의 자유확보
※연합군 결속 무너짐, 1763 ‘오’와 조약체결, 전쟁 종료
프리드리히의 전투 (계속)
~~~프리드리히 왕은 “성난 벌이
자기 평화를 위협하는 자를 쏘기 위해
이리 저리 날쌔게 찾아 다니는 것 같은 인상” ~~~
결정적 타격을 주지는 못함, 전장 국한 / 전술적 능력면 능가 할 자 없음
유명하게 된 원인 : 알렉산드로스, 한니발, 카이사르, 징기스칸 등이 쓰던 비법 부활 시킨 점
프리드리히의 전투 (계속)
~~~알렉산드로스, 한니발, 카이사르, 징기스칸, 구스타브스, 프리드리히 비교 ~~~
공통점- 최고 교육 받음(징기스칸 제외), 피로를 모르는 정력가,
알 - 페르시아에 대한 증오와 정복,
한 - 로마에 대한 증오와 카르타고에 대한 사랑
카 - 국가에 대한 의무감과 결부된 야망,
징 - 자기보존과 세계정복, 구 - 나라의 보존,
프 - 실레지아 소유/ 나라보존
“카”와 “한”을 제외하면 모두 왕으로서 군대지휘
엄격한 규율가, 위대한 정치가(한니발 제외)
13세기 몽골제국의 영토 확장
金國 정복
개요
1210년부터 金 공략, 서하 멸망 전 ‘金’ 공략 곤란
장기 전략 :“서하와 金" 협조 방해, ‘서하’ 공격하되 간헐적 ‘金’ 공격해서 혼란 야기/ 국력 약화 ,
‘서하 멸’ 뒤 ‘남송’의 길을 빌러 대 우회작전, 남→북으로 ‘金’ 압박
전쟁 경과
1212년 거용관 돌파, ‘金’의 중도(북경)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요동 강타 (요동(金의 발상지) 점령 시 金의 민심과 사기 저하)
성곽 견고 함락 곤란, 적지 장기전 위험 → 회군 도중 ‘金’의 사신 생포, 힌트를 얻음
金國 정복
전쟁 경과(계속)
암암리에 대군 회군시켜 사신 뒤를 따름, 몽골군 퇴거 후라 성문 열고 사신 맞음, 몽골군 쇄도, 동경함락
金 동요. 요(金에 멸망) 유민 반기, 남송(金과 적대관계) 협조
※舊遼의 관료 야율초재 영입: 몽골을 대제국으로 다듬은 賢臣 (몽골은 재물 약탈 외 영토확장/관리를 모르는 민족)
1229년, 오고타이 “징”유지 채택, 남송 길 빌려 金 공략, 1234년 ‘金’멸망
★ “대우회 전략” 대표적 예
※이후 1개군 - 남송, 1279년 멸망, 1개군 -고려, 7차 침입, 1개군 -2차 西征
개요
총 사령관 : 발도(拔度), 선봉장 : 수부다이, 4개 군 10-15만
양대 戰役 : 러시아 (5년), 폴란드 (2년)
전쟁 경과
1236 봄, 몽고군 출정, 볼가강 하류 도달
1236 겨울, 수부다이 Don 江 지역 공격, 적 쉽게 굴복
1237 작전 변경, 코카사스 방면 적 견제, 주력 러시아 중앙 돌진(중세 중무장 기사 - 몽고군 기동 속도,포위․우회 작전 속수 무책)
1241. 3월, 폴랜드 침공, 4월 말 동유럽 석권
1242. 4월 태종(오고타이) 서거에 흠찰칸국 건립 후 귀환
※ 제 3차 서정과 남송 정벌
1251년 헌종(蒙哥) 帝位, 남송과 페르샤 정벌 2대 군사작전 발기
바그다드 점령 후 이집트 침공 준비 중 헌종 서거로 전쟁 종결
징기스칸
• 몽고 고원, ‘오노’강변, 부족장인 아버지 “에스게이”, 어머니 “호메론”의 장남(3남1여)
• 테무진이 9살 때 아버지는 ‘타타르인’에게 독살. 동생들과 어머니 손에 자람
• 17살 때 “불태란”과 결혼. ‘메르키트’부족 공격/ 부인 납치( 20년 전 아버지가 ‘신혼’의 아내를 빼앗은 것에 대한 복수), 아버지 친구‘케레이트’부족 칸의 군사 2만을 빌러 메르키트 족을 무찌르고 아내를 찿음, 이때부터 몽골에 이름이 알려짐
•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 ★ 툴루이의 셋째 아들 “쿠빌라이” (1271년 ‘원’, 96년 후 1368년 망, ‘명’)
※ 칭기즈칸, 오고타이[窩闊台: 太宗], 구육[貴由: 定宗], 몽가[蒙哥: 憲宗], 쿠빌라이[忽必烈: 世祖] 등에 계승
몽골군의 무자비한 학살
• 금의 멸망직전까지 : 잔혹하고 무자비한 학살
– 적의 백성 중 돌 하나, 화살 한 촉이라도 쏜 자는 전부 죽임
– 1차 西征시 손자 Mutugan이 화살 맞고 죽자, 풀 한 포기, 짐승 한 마리도 용서 없이 완전소멸(1세기가 넘도록 한 사람도 살 수 없는 황무지)
– 기술자나 여자를 제외하고 죽임→소문 퍼짐, 심리전 구사, 사신 보내 ‘만약 항복치 않으면 장래에 대한 것은 상제(하느님)만 알 것이다’ → 대부분 항복
※ 항복한 민족이나, 항복하지 않는 민족이나 同一하다는 것을 알고 죽기로 항거
• 금 멸망 후 : 심리전 구사 “항복하면 파괴 않는다” ⇒ 다투어 항복 ♣
소화기의 발달
• 수포(hand cannon) : 14C말, 북 유럽 발명,총통의 뒷부분 막혀 있고, 탄자와 화약 총구로 장전, 약실의 윗부분 구멍에 불을 붙이는 방식
• 화승총(Match Lock) : 1500년경,독일, 현재 총의 형태. 총구에 흑색화약/ 탄자 넣고, 방아쇠 당기면 불이 붙은 노끈이 약실의 추진제 연소, 탄자 발사
• 차륜식 방아틀총(Wheel Lock) : 작은 쇠바귀와 부싯돌 마찰로 발화, 제작이 어렵고 불발/고장이 잦음
• 수석총(Flint Lock) : 17C초, 부싯돌 총, 제작과 점화 간단, 현대총의 시조
• 충격식총(Percussion System gun) : 1807년, 영국. 화약 자체에 충격 발화, 1818년 뇌관 발명/1821 총기에 사용
※ 격발 방식 발전 : 화승식 → 부싯돌 격발식 → 충격 격발식
'myPP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헌법은 무엇일까? (0) | 2017.07.11 |
---|---|
남부 지방의 자연 환경 - 위치, 지형 , 기후 (0) | 2017.07.04 |
경호학개론 - 경호주체론 (0) | 2017.06.30 |
19세기 - 낭만주의 예술가곡 (Lied) (0) | 2017.06.20 |
일반물리실험 (General Physics Experiment) - 등전위선 측정 (0) | 2017.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