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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근대의 전쟁

myPPT 2017. 7. 2. 15:49

















중세-근대의 전쟁

기병시대의 도래

 로마 군단의 쇠퇴

 카이사르시대 : 로마시민들은 국가방위군인으로 애국적 자부심 보유

 제정 로마시대 : 변경의 이민족 징집으로 애국심 결여

 기병위주의 주변 부족들의 공격을 격퇴 위해 전통적 보병 중요성 감소, 기병 발전

 아드리아노플 전투 후 900년 전통의 로마 중보병 몰락, 1,000여 년의 기병시대도래

  ★ ‘아’ 전투 : 378, 동로마 “발렌스”황제↔게르만 ‘고트족’, 로마보병 우위 과신 / 열세 기병 좌우분산,구릉으로 분단, 양익 축차 격멸, 퇴로차단, 부족기병이 로마군단 제압, 황제전사

    ※전법의 암흑시대

이스람의 탄생과 봉건제도 출현

 동로마제국이 로마군단 일부 계승

 훈련,편제 등, 비잔틴 군사력 역할 (기독교 전통이 이스람 세력에 압도 방지). ★ 330 동 ∙ 서로마 탄생, 476 서로마 멸망

 이스람교 세력의 활동과 영향

 7세기 초 탄생, 강대한 세력으로 수세기 영향을 미침

 711년 이베리아 반도/고올 지방까지 침투, 732년 샤를르 마르텔에 의해 저지, 그로부터 760년 이후 유럽에서 축출

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마뉴 : 전법 암흑시대의 등대

 800년 황제 등극, 서로마 제국 부활선포, 남북 ; 북해-지중해, 동서; 대서양-카르파티아 산맥까지 팽창. 군사역량에 관한 자료 無

 ※샤를르마뉴 시대 군대법규 / 편제 ; 무능한 후계자들 왜곡 수정⇒ 중세 기병시대의 특징인 봉건제도와 기사도 출현

봉건제도와 장원의 모습


기독교의 영향과 십자군 전쟁(1)

 봉건제도의 발전

 소 지주들을 압도할 만한 중앙정부 부재

 수적으로 열세한 정복자들이 피정복민을 예속하기 위한 방책

 영주와 기사 주종관계, 보호명분으로 농민들로부터 공납 받음, 귀족과 하층민 극한대립

    ※교회가 대립 중재, 평화운동 전개, 기사 폭력 / 부정 규제

기독교의 영향과 십자군 전쟁(2)

 십자군 원정(11세기)

 교회의 평화운동에 기사 반발, 밖으로 전환 이스람과 전쟁 유도, 이교도에 대항-경건한 일.교황권한 강화

 터키인 세력증대로 성지 순례 곤란, 모하메드인들의 세력확장에 반발  8회의 전쟁(1096~1270년)

   ※ 기병의 싸움, 돌격과 중량의 크기에만 집착 (공격용 무기,호신용 장구 중량 증대 ⇒ 기동성 상실)  

         ★기동이 없는 곳 전략과 전술 부재

   ※ 영국 리차드1세 : 3차 십자군 지휘. 1191년 아르소우프 전투 ‘살라딘’ 격파 (정예병력 결정적 지점 투입, 집중돌격 승리)

징기스칸 (Genghis Khan)

 몽고군의 특징(1)

 몽골민족의 발흥

 농경과 목축,1206년 테무진이 징기스칸으로 추대 된 후 평원으로 진출, 대제국 건설 ※유럽의 전법 암흑시대에 중세판 전격전 구사    ★ ‘징기스’ - 절대적인 힘, ‘칸’ - 왕, 군주

 몽골군의 특징

 전국민이 동원되는 개병제 : 남15~70세 복역, 여자/아이 같이 이동 병참지원, 자급자족

 십진법에 의해 편성: 부락,씨족 등이 가구수를 기준으로 십진법 구성. 촌락/ 씨족중심으로 조직⇒ 단결력 높음

  ※ 토우만(사단)-10개연대(1,000명)-10개대대(100)-기병중대(10)

  ※ 전군이 기병, “사냥방법=전투방식”, 3살에 말에 태워 15살 사냥군. 병참/치중부대 불필요, “기동력 상상초월”(일일 최대 기동속도128~200km(평균11~12), 2차 대전 독일군-32km(평균6~8))


몽고군의 특징(2)

 양마법(養馬法)은 기병전술효과 증대

 사육 : 사초를 주지 않고 방목(먹지 못할 상황 대비) - 내성을 길러줌, 수 백km 달려도 땀을 흘리지 않음

 훈련 : 생후 1~2년 초원 달리는 훈련 후 기마훈련.

 발로 차거나, 물어 뜯거나, 울지 못하게 함 <기도비닉>

 하마 후 고삐를 묶지 않아도 도망가지 않게 함.

 종마 외 거세 : 온순, 지구력 강함 (안장 위 10주야 매복)

 활용 : 출전시 1인당 2~5필 보유 - 필요 시 갈아타기, 돌격 시 새말로 바꿈. 비상시 “피”마시고, ‘젖’ 식사대용, 가죽으로 수통/도하장비

 마구 : 나무안장/가죽으로 고정, 등-활 쏠 때 안정, 철제 말발굽.

 무기 : 弓矢(궁시), 蠻刀(만도), 斧(부:도끼), 유영갑(가죽옷에 철편 보강), 나권갑(가죽 6겹). 

 금, 서하 등 정벌시 투석기, 카타풀트(곡사)등 공성무기와 화약무기 도입.   

몽고군의 병세와 전술

 토우만(기본전술단위) :소수의 경기병 정찰대, 전방의 중기병(40%), 후방의 경기병(60%), 

    *나이만 정복 시 확장(5군: 정찰대, 전∙중군, 좌∙우수군, 후군)

• 경기병 : 본대의 100km 전,후 사방 정찰(적,지형,식량 등)

 輪番衝鋒戰術(윤번충봉) : 후위 경기병이 궁시 이용 수차 공격 적 대형 와해, 필요시 창/검으로 무장한 중기병 돌격

 拉瓦(납와)전법 : 한면의 포위를 풀어주어 패주하는 적 공격하거나,  적을 출격케 하여  袋形陣(대:자루)으로 유도 포위공격.

 성곽공격 : 부근 촌락 파괴(주민과 재산의 보호 의미 상실케 함), 촌민 강제 편입 축조공사 /공성의 선두.

 선전심리전술: 초기전역 무자비한 파괴 살상, 죽기로 항거. 금 멸망 후 “항복하면 파괴행위를 않는다.”소문, 다투어 굴복


 몽고(바이칼호 남쪽 카라코룸 지역), 西夏(몽고 남쪽), 金, 南宋(몽고 동남 지역), 吐番, 大理(몽고 서남 지역), 나이만(몽고 서쪽), 西遼(나이만의 남쪽), 花刺子模(오늘의 이란 북부와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나이만의 서쪽, 오늘날 이란 지방)  

          ★유인물 ‘요도’참조    

 몽고는 바이칼호 동쪽 吉刺部와 서쪽의 克烈部를 멸망→극렬부와 같은 돌궐족인 나이만이 몽고를 경계와 증오 

  ※ 테무진은 나이만 공격 결심 

나이만과의 전쟁(1)

 징기스칸의 전쟁준비

 자기보존 : 정신무장강화, 편제 5군으로 확장

   ★ 5군 : 전군,중군 →전군, 중군,좌∙우수군,후군

 적 파괴방안 

 적 이웃 부족 → 친 몽고화

 간첩파견 적 내부전복공작과 요란 작전 구사

 선전 통해 내부 분란 조성

    ★ 나이만군 5배 이상 우세, 외선 포위작전형세    

                           ★ 예) 다르하치움전투(카이사르-폼페이우스)

나이만과의 전쟁(2)

 작전경과 

 나이만군 평야 쪽 공격 유도 (넓게 산개, 낮- 말 여러 곳 방목, 밤- 여러 곳 불, 대 병력 소문)

   ※ 적에게 포위 작전 무모, 전진에 의한 공격 최상의 방책임을 믿게 함

 고지의 적은 몽고군을 대군으로 알고 자기방어 급급 (서로 협력 못함), 병력 집중 중군 돌파‘대양한’군 와해. 돌파 후 고지 적 포위격멸

 결과 : 나이만 격파, 남쪽의 서요∙토번 항복.

       ”기만전술, 과감한 집중 / 돌파로 우세한 적 격멸”

서하 정복

 서하의 특성 : 성곽으로 방호된 농경 지역

※유목민 전쟁과 다름 ⇒ 공성전법 터득 , 대제국 건설 관건이 될 곳

 23년간 5차에 걸친 공격 

 1차 (1205) : 나이만 정복 후 회군 중 공격, 60일 동안 2개 성 공략, 주변 지역 약탈/ 회군 

 2차(1207) : 공성법 몰두, 몇 개의 성 공략에 그침 

 3차(1209) : 河水 유입 공성, 河水 제방 붕괴로 실패, 서하 강화 요청/급히 강화, 방향 전환 동쪽 金 공격 (만리장성 공략 곤란, 중원(金)얻기 위해 덜 방호된 측방으로 우회 필요 /서하 공략) 

 4차(1221) : 실패 (西征으로 전환) -제 1차 西征(총 3차) 

 5차 : 제 1차 西征 후 회군 時 공격, 23년간 전쟁으로 성을 제외한 전 지역 피폐, 방어 존속 이유 말살/ 멸망 

제1차 西征

 개요

 1221년 4차 서하 공격 시 공성 곤란, 서정 전환, 회자자모 정벌 (크레와즘, 카스피해 동쪽 회교왕국)

 크레와즘의 왕(모하메드), 상인들을 몽골첩자로 몰아 처형, ‘징’ 정벌 결심  ※크레와즘 : 모후 간 갈등으로 조정이 불안 /지지 받지 못함, 용병중심 군대 / 충성심 부족

 작전경과

 모하메드 왕 : 30만 시르강 배치,예비 사마르칸트와 보카라 대비

 징기스칸: 10만을 4개 부대로 구분, 3개 “모”정면공격, 1개 부대 “징” 통솔 300마일 사막 우회기동 , 보카라 점령 / 병참선 차단

 “모”방어에 집중 / “징”우회기동 모름, 보카라  공격 당하자 배후 위협 사마르칸트로 후퇴 도중  각개격파

    ※일한국을 세우고 회군하면서 5차 서하 공격 감행

金國 정복 / 2차 서정 

 징기스칸 사망과 유언

 25세 민족을 일으켜 북부 통일 완수

 1227. 8. 18 육반산에서 운명 (73세) 

 유언 “假渡於宋” : ‘송으로부터 길을 빌러 남으로 우회하여 金을 치라’ 성곽이 없는 지역(송)으로 우회 金 공격

♣ “하늘이 있고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정벌한다.” 는 세기의 영웅 ‘징기스칸’, 대제국 건설의 기초 닦음 ♣    

 金국 정복: 우회전략의 대표적 예,1234년 오고타이 金 점령

※야율초재 (요의 관료): 몽골을 대제국으로  다듬은 賢臣

 2차 서정:우세한 기동력, 포위우회, 1241년 동유럽 석권


근세 초기의 전쟁

근세 초기의 전쟁(1)

 개요

    “13세기후반 중세의 특징적인 양상 변화 ”

 정치적 : 십자군 원정 이후 교회의 권위 쇠퇴, 봉건영주세력 후퇴,  세속군주 입장 강화,

   → 중앙집권적 연방국가출현

 사회, 경제적 : 상공업 / 화폐경제의 발달

   → 장원경제 붕괴

  ※ 봉건주의와 교회의 몰락으로 군사면 변화 불가피. 

근세 초기의 전쟁(2)

 백년전쟁(1337~1453)의 크레시 전투(1346)

 배경 : 결혼정책으로 많은 봉토 소유한 영국의 에드워드가  프랑스 소유권 주장 / 침입

※ 영군의 장궁 : 정확성과 파괴력 뛰어남.

※ 프랑스: 제노아 용병, 보헤미아군 포함 3:1우세

 경과 : 영, 장궁의 위력으로 제노아 용병 격퇴, 후퇴하는 제노아 군과 이를 저지/ 전진하려는 ‘프’ 군과 뒤섞여 혼란 /대패  

※전쟁사 상 의미 : 궁수와 보병의 조화로 수적으로 열세한 영군 승리, 

  ※ 크레시 전투 이후 ‘기사시대 종말’고하고, ‘보병이 전장 주역’으로 등장, ‘대포와 화약 최초사용’


화약의 출현(1)

 1249년 로저 베이컨 화약 발명

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화포 최초 등장 (조잡한 수준) 

 1418 프랑스 앙리 5세 루헨 포위전시 포병운용, 기동성 결여로 제한

 1453년 (백년전쟁말기) 프랑스 화포 위력과 사거리에서 영국전술을 능가할 정도로 발전  

• 야금술 발달로 총렬, 포신, 탄환 강도와 사수능력 향상

※ 화약 출현으로 영주의 상징인 성곽 무력화  

화약의 출현(2)

 화약무기는 비싼 값으로 領邦國家 등 소유 

 중산층인 상인 / 제조업자 독점, 봉건적 토지귀족 축출 수단,  정치적 중앙 집권화 가속

 화폐경제  발달(십자군 원정-무역팽창, 제조업 발달) 

 장교가 됨으로써 사회적 지위보존 (봉건귀족들의 전쟁수단 독점 불가)

 1346년 이래 2세기 동안 기병시대에서 화약시대로 전환

 보병이 기병을 대신 

 화포의 위력 이 ‘방진 ∙ 군단 ∙ 기병의 충격력’을 대체

  ※ 근대적 전쟁으로 진입


소화기의 발달

대포의 발달

17세기의 전쟁

17세기의 전쟁

 17세기 초 유럽 군대변화의 일반적 경향

 다수의 용병을 포함 상비군 보유

 화기의 비중 증가로 대형은 작고 융통성 있게 변화

 활은 화승총으로 대체, 머스켓 소총의 비율 증가

 기병은 주로 수색정찰, 교란작전 등에 이용

 30년 전쟁(1618~1648)

 신 ∙ 구교간 종교적 갈등으로 시작, 세력다툼으로 확산

 카톨릭 (프, 독, 스웨덴) 세력이 신성로마제국에 대항

 종교개혁은 민족국가의 성장과 분쟁의 국제화에 기여

 ※ “근대전의 아버지”라 칭하는 구스타부스 아돌프스 출현(18년간 6차의 전역을 통해 많은 군사적 업적, 전쟁종결에 기여) 

구스타부스의 군사적 업적

 편제개선으로 기동력 증대 → 현재 적용

 기본 전투단위 squadron(대대), brigade(3~4 squadron) 

 2개 전열과 1개 예비대 사용 →현대 전법의 창시자

 부대의 협동 →보∙포∙기병 통합 전투단으로 편성

 소총 중량감소/ 2배의 화력증대, 대포 중량감소/효과와 위력증대. (경량화로 여단 배치, 대포 1문 이동 30~40 마리→1마리 말 운반) 

 오늘날과 같은 정찰과 추격방법 채택, 장구/장비의 경감과 훈련으로 행군능력 향상, 기병운영 개선하여 정찰대/ 착검 돌격에 운용

※기동 중시 전략 부각, 제병협동의 묘와 기습공격 부활, 화력극대화, 대규모 기동, 국민군의 동원시도

※주요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루첸 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1 )

 개요

 1631.9 구교 측 오스트리아 “틸리”군과  스웨덴/색소니 연합군의 “구스타부스”군 부라이텐펠트 대치

 배치 / 대형

 Tilly 군: 좌우 3km가 넘는 단열 대형, 양 측방 기병 보호, 포병 중앙

 구스타부스: 좌익 색소니군, 중앙과 우익의 주공은 스웨덴군 담당 (중 포병-중앙 보병 보호, 측방 기병, ☞ 여단별 포병지원, 보병 중앙에 기병지원, 50명 단위 머스킷 소총부대 기병여단배속) 

        ※유연성과 제병협동의 전형적인 대형


브라이텐펠트 전투(2)

 작전경과

 틸리군 좌익기병 : ‘구’군 우익 공격,

   ‘구’군은  기병에 배속된 소총수로 틸리군 기병 무력화 , 7차에 걸친 공격 모두 실패 ⇒ ‘구’군의 예비대에 쫓기어 전장 완전 이탈.

 틸리군 우익 기병 :  좌익 ‘구’군의 색소니군  압박 / 측방노출

 틸리군 사선기동 ‘구’군  좌 측방 공격,

   ‘구’군  중앙군 2열 틸리군 기동 저지, 보병여단 좌측 기동 / 화력집중  ★ 틸리군 포병: 전투 중 이동 불가, 포병지원 불가, 공격군 와해


브라이텐펠트 전투(3)

 틸리군 진영 포연과 먼지로 50m 분간 곤란, “구”군 ‘틸리’ 좌익/ 배후공격, 포병 이동하며 주력 포격 → 격멸

 결과 : Tilly군- 전사 12,600, 포로 9,000. ‘구’군 - 사상 2,000명

  ※1632 루첸전투 : 황제군의 발렌슈타인 패배, “구”의 상비군 우세, 구스타브스 치명상 <전술적 관점 고찰 가치 없음>

18세기의 전쟁

18세기의 전쟁

 18세기 유럽의 정세와 프레드릭 등장

 신성 로마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카룰 6세)  아들 없이 사망, “딸” 후계자로 선포

 독일의 제 군주/귀족, 황제의 지배에서 벗어 날 기회

 프레드릭 사태 파악, 함스브르크가 때문에 실레지아에 대한 요구 좌절,  ‘실레지아’ 침입

 Prussian way of war

 혹독한 훈련과 규율, 탈영방지(삼림 숙영 회피,야간행군 지양 등)  

 훈련으로 소화기 사격속도 극대화(부정확성 극복, 대량사격 중시) 

 보병과 함께 기동하는 경량화 / 견마포 발전 (곡사포 1,300m) 

 “선형대형”으로  전방 화력집중 (사격속도 2배 이상, 1열 사격 후 무릎 꿇고 2,3열 사격) 

프레드릭의 전략 전술의 특징

 ‘실레지아’ 전쟁은 프레드릭의 군사적 역량 배가 계기 (카이사르의 고올 전역 경험)

 “기동력 / 전투력 집중”과“공세원칙”준수

 초기 전투 실패를 성공으로 전환시킨 것은 ‘훈련과 숙련’깊은 감명→’기동력과 전투력 집중’ 착안---생애 ‘공세원칙’준수

 수적 열세에 불구 선제권 장악

 초기전투 승리는 자신의 전술적 기교 보다  적 기동력 결핍 이었다는 데 착안 기병 창설

    ※ 10년 평화기간, 국가 발전 위한 노력 /전쟁준비

 과거 명장들의 전략 전술적 기술 부활

 무기 발전과 변화한 19세기에도 기동의 중요성 불변 및 수적으로 우세한 적 제압 가능 입증 

7년 전쟁(1756~1763년) (1)

 개요

 ‘프레드릭’ 전쟁 목표 ; 삭소니 제압 후 연합군지원 이전 ‘오’ 와 평화조약 체결

   ★프러시아군-15만(인구500만), 연합군-45만(1억 이상)

 프러시아의 전략적 위치

   남- 삭소니 (1만5천), ‘오’(18만), 서- 프랑스 (14만),

   동- 러시아 (10만), 북-스웨덴 

    ⇒“내선작전”

 작전경과

 1756 삭소니군 제거에 예상 이상의 시일 소요

7년 전쟁(1756~1763년) (2)

 작전경과(계속)

 1757 ‘오’군과 접전 기도 / 불가, 오군 견제 / 프랑스군 공격 결심. 12일간 270km 기동, ‘프’ 군 전투회피/철수  

    ※인접상황: ‘오’- ‘프레’의 분견대 격파/실레지아 침입, ‘러’-베를린 진군, 스웨덴-스테틴 봉쇄 ⇒ “프레” 결정적 행동 결심 : 지연전 승리불가, 연속적 승리

 1757,11.로스밧하 ‘프’ 격파(2만5천으로 5만 격파, 300손실), 공격 전환 로이텐 ‘오’ 격파

 1758,8.오데르강 기습도하 병참선 차단, 러군 후퇴/사주방어


로이텐 전투 (1757.12.5)(1)

 개요

 프랑스군 격파 후 실레지아의 정세 호전을 위해 급히 회군 (30일 288km).

• 분산 군 집결, 총3만 명(1/2-로스바하 승리,1/2- 오군에 패배)

 ‘오’군(챨스왕자) 8만 로이텐 포진(기복이 심한 지대 8km 전개, 우익 소택과 산림이 엄호, 예비대 좌익위치)

 전투 경과

 목표 “오군 격멸”

• 선제권 획득 자기 계획 실현 / 행동의 자유 보장

• 적 약점 이용 

• 기동 / 공세의 원칙 준수


로이텐 전투 (2)

 전투 경과(계속)

 전초전 “오군 우익으로 프러시아군 주공 지향” 주공방향을 오인케 함,‘오’ 예비대증원

 사선대형, 병력 우익(주공)에 집중, 중앙과 좌익 견제

 포병화력과 전초보병 ‘오’군 좌익 돌출부 격파, 전대열 우측이동 ‘오’군 좌익 분쇄, 기병 적 측면 격파/혼란 야기

 ‘오’군 재편시도 / 혼란, ‘프’ 계속 압박 으로 ‘오’군 최후 계획 좌절, 잔병 도주, 대승 

 전투결과

 ‘오’군: 총 8만중  2만 여명 손실, ‘프’군 : 총 3만중  6,400여명 사상 



로이텐 전투 (3)

 교훈 및 평가       

※ 나폴레옹 : “로이텐 전투는 기동과 결단이 낳은 걸작품”.이 전투 하나로도“불멸의 명예와 명장의 칭호”부여가능

• 공세,기동,기습,절약,집중 등 제 원칙 을 훌륭하게 적용한 역사적 사례

   ※ ‘에파미논다스’의 루크트라전투 “사선대형”보다 더 정밀, 우익 집중(강력한 주공), 중앙과 좌익 우세한 적 병력 견제

• 분명한 ‘목표’ : ‘오’군 격멸 / 접촉 일념 기동(로스바하~로이텐 : 30일 288km행군, 실레지아 분산된 병력 집결)



 교훈 /평가 (계속)

• 획득한 선제권으로 자기 계획 실현(적 약점 이용, 기동에서 생기는 기만성 이용, 공세원칙 준수)→선제권과 기습에서 생기는 잇점 활용

• 정밀한 사선대형 ; 우익 주공 집중, 중앙과 좌익 견제(결전이 끝날 때까지 견제)

• 기동에 의한 기만성 : 병력 절약 / 집중가능

※정력적이며 유능한 지도자, 전쟁원칙을 건전하게 적용 3배의 적 격멸

프리드리히의 전투 (계속)

 ‘로이텐’ 전투 후 ‘오’에서 기동 중 ‘러(5만)’의 실레지아 침입, ‘프레’기동 중단

 “프레”의 ‘러’군 추격, 오데르강 접전 (3만)

   ★알렉산드로스 “히다스페스”전투 재연

 도하불가, 양동과 술책, 러군 진지 양공, 야음이용 북 24km지점 비밀히 도하

 러군,  병참선 차단을 알고, 후퇴하여 강력한 방어진 구축, 함정에 빠진 줄 인식 “사주방어”편성

 ‘프레’,  ‘러’군 측면 우회 공격, 역사상 치열한 전투, “프레”승리했으나 큰 손실(프 1/3, 러1/2)

 

프리드리히의 전투 (계속)

 오데르강 전투 이후 

 ‘프레’ 힘의 지나친 소모, 적도 그의 전법을 배워서 전쟁원칙 적용 / 기교 향상 (한니발의 적과 동일)

   ①전투 회피/목적 달성 →‘기동’ 적용   ★ 초기 기동-적에게 전투를 강요하는 수단, 후기-전투회피 수단

   ②보병 감소, 포병 전술과 기술 발전 “견마포(함께 이동) ”

 7년 전쟁 후반 교묘하게 결전 회피

 ‘프러’의 사주방어에 연합군 위협과 압박/실패

 1759 “러”와 쿠네르스도로프 전투에서 서투른 협동공격으로 정예군 절반 상실,1760 다시 적 굴복 시킴

 연합군 한 가지 방안 수립(‘오’ 군 일부 “프러”군 견제,  ‘오’군과 ‘러’군 실레지아 침입, 스웨덴 발틱해 봉쇄) 

 → ‘프레’ 책략 “기만 ∙기동”으로 적 혀를 찔러, 행동의 자유확보 

 ※연합군 결속 무너짐, 1763 ‘오’와 조약체결, 전쟁 종료

프리드리히의 전투 (계속)

   ~~~프리드리히 왕은 “성난 벌이 

      자기 평화를 위협하는 자를 쏘기 위해 

      이리 저리 날쌔게 찾아 다니는 것 같은 인상” ~~~

 결정적 타격을 주지는 못함,  전장 국한 / 전술적 능력면 능가 할 자 없음

 유명하게 된 원인 : 알렉산드로스, 한니발, 카이사르, 징기스칸 등이 쓰던 비법 부활 시킨 점

프리드리히의 전투 (계속)

 ~~~알렉산드로스, 한니발, 카이사르, 징기스칸, 구스타브스, 프리드리히 비교 ~~~

 공통점- 최고 교육 받음(징기스칸 제외), 피로를 모르는 정력가,

 알 - 페르시아에 대한 증오와 정복,

    한 - 로마에 대한 증오와 카르타고에 대한 사랑

    카 - 국가에 대한 의무감과 결부된 야망, 

    징 - 자기보존과 세계정복,  구 - 나라의 보존, 

    프 - 실레지아 소유/ 나라보존

 “카”와 “한”을 제외하면 모두 왕으로서 군대지휘

 엄격한 규율가, 위대한 정치가(한니발 제외) 

13세기 몽골제국의 영토 확장

金國 정복

 개요 

 1210년부터 金 공략, 서하 멸망 전 ‘金’ 공략 곤란 

 장기 전략 :“서하와 金" 협조 방해, ‘서하’ 공격하되 간헐적 ‘金’ 공격해서 혼란 야기/ 국력 약화 ,

 ‘서하 멸’ 뒤 ‘남송’의 길을 빌러 대 우회작전, 남→북으로 ‘金’ 압박

 전쟁 경과 

 1212년 거용관 돌파, ‘金’의 중도(북경)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요동 강타 (요동(金의 발상지) 점령 시 金의 민심과 사기 저하)

 성곽 견고 함락 곤란, 적지 장기전 위험 → 회군 도중 ‘金’의 사신 생포, 힌트를 얻음

金國 정복

 전쟁 경과(계속) 

 암암리에 대군 회군시켜 사신 뒤를 따름, 몽골군 퇴거 후라 성문 열고 사신 맞음, 몽골군 쇄도, 동경함락

 金 동요. 요(金에 멸망) 유민 반기, 남송(金과 적대관계) 협조

   ※舊遼의 관료 야율초재 영입: 몽골을 대제국으로  다듬은 賢臣 (몽골은 재물 약탈 외 영토확장/관리를 모르는 민족) 

 1229년, 오고타이 “징”유지 채택, 남송 길 빌려 金 공략, 1234년 ‘金’멸망    

  ★ “대우회 전략” 대표적 예 

  ※이후 1개군 - 남송, 1279년 멸망, 1개군 -고려, 7차 침입, 1개군 -2차 西征 



 개요 

 총 사령관 : 발도(拔度), 선봉장 : 수부다이, 4개 군 10-15만 

 양대 戰役 : 러시아 (5년), 폴란드 (2년) 

 전쟁 경과 

 1236 봄, 몽고군 출정, 볼가강 하류 도달 

 1236 겨울, 수부다이 Don 江 지역 공격, 적 쉽게 굴복 

 1237  작전 변경, 코카사스 방면 적 견제, 주력 러시아 중앙 돌진(중세 중무장 기사 - 몽고군 기동 속도,포위․우회 작전 속수 무책) 

 1241. 3월, 폴랜드 침공, 4월 말 동유럽 석권 

 1242. 4월 태종(오고타이) 서거에 흠찰칸국 건립 후 귀환

   ※ 제 3차 서정과 남송 정벌 

 1251년 헌종(蒙哥) 帝位, 남송과 페르샤 정벌 2대 군사작전 발기 

 바그다드 점령 후 이집트 침공 준비 중 헌종 서거로 전쟁 종결 





징기스칸

• 몽고 고원, ‘오노’강변, 부족장인 아버지 “에스게이”, 어머니 “호메론”의 장남(3남1여)

• 테무진이 9살 때 아버지는 ‘타타르인’에게 독살. 동생들과 어머니 손에 자람

• 17살 때 “불태란”과 결혼. ‘메르키트’부족 공격/ 부인 납치( 20년 전 아버지가 ‘신혼’의 아내를 빼앗은 것에 대한 복수), 아버지 친구‘케레이트’부족 칸의 군사 2만을 빌러 메르키트 족을 무찌르고 아내를 찿음, 이때부터 몽골에 이름이 알려짐 

•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 ★ 툴루이의 셋째 아들 “쿠빌라이” (1271년 ‘원’, 96년 후 1368년 망, ‘명’)

※ 칭기즈칸, 오고타이[窩闊台: 太宗], 구육[貴由: 定宗], 몽가[蒙哥: 憲宗], 쿠빌라이[忽必烈: 世祖] 등에 계승

몽골군의 무자비한 학살

• 금의 멸망직전까지 : 잔혹하고 무자비한 학살

– 적의 백성 중 돌 하나, 화살 한 촉이라도 쏜 자는 전부 죽임

– 1차 西征시 손자 Mutugan이 화살 맞고 죽자, 풀 한 포기, 짐승 한 마리도 용서 없이 완전소멸(1세기가 넘도록 한 사람도 살 수 없는 황무지)

– 기술자나 여자를 제외하고  죽임→소문 퍼짐, 심리전 구사, 사신 보내 ‘만약 항복치 않으면 장래에 대한 것은 상제(하느님)만 알 것이다’ → 대부분 항복

※ 항복한 민족이나, 항복하지 않는 민족이나  同一하다는 것을 알고 죽기로 항거

• 금 멸망 후 : 심리전 구사 “항복하면 파괴 않는다” ⇒ 다투어 항복                              ♣

소화기의 발달

• 수포(hand cannon) : 14C말, 북 유럽 발명,총통의 뒷부분 막혀 있고, 탄자와 화약 총구로 장전, 약실의 윗부분 구멍에 불을 붙이는 방식

• 화승총(Match Lock) : 1500년경,독일, 현재 총의 형태. 총구에 흑색화약/ 탄자 넣고, 방아쇠 당기면 불이 붙은 노끈이 약실의 추진제 연소, 탄자 발사 

• 차륜식 방아틀총(Wheel Lock) : 작은 쇠바귀와  부싯돌 마찰로 발화, 제작이 어렵고 불발/고장이 잦음

• 수석총(Flint Lock) : 17C초, 부싯돌 총, 제작과 점화 간단, 현대총의 시조

• 충격식총(Percussion System gun) : 1807년, 영국. 화약 자체에 충격 발화, 1818년 뇌관 발명/1821 총기에 사용

 ※ 격발 방식 발전 : 화승식 → 부싯돌 격발식 → 충격 격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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