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기업협력 신도리코-리코 합작사례
신도리코-리코 합작사례
(본 사례는 기술과 자본이 전무한 상태에서 외국 기업을 유효 적절히 이용하여 중견기업으로 성장하게된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수입대리점관계에서 합작관계로의 진전, 그리고 합작지분의 조정과 해외시장진출을 위한 협력 등 상호 협력관계의 동태성을 잘 나타내는 사례이다).
기술만이 큰소리친다
수평분업속에 강화되는 협력관계
복사기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다
국내 복사기, 팩시밀리의 역사를 일궈온 신도리코에게는 재계의 주목을 끄는 미담이 많다. 우선 신도리코는 복사기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지난 60년에 ‘신기한 최첨단 사무기기’라는 복사기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기업이다. 재벌기업이 달려들면 안될 것이 없는 우리 재계의 풍토속에서 이들과 당당히 상대하여 사무자동화 기기의 아성을 지키면서 94년 2,05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하는
게다가 창립후 지금까지 34년 동안 단 한해도 적자를 내지 않은 흑자경영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 외형을 늘리는 생존전략과는 일찌감치 담을 쌓고 기업이란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원칙을 창업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지켜왔기 때문에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이 거래기업을 통틀어 최고의 평점을 줄 정도로 신도리코의 재무구조는 튼튼하다.
신도리코가 재계의 주목을 끄는 또 한가지는 이 회사만의 독특한 경영철학이다. 三愛정신과 三一(3:3:3:1)원칙이 바로 그것이며 성수동 본사 및 안양공장에 세워진 ‘三愛亭’이 이를 상징하고 있다. 이중 삼애는 ‘나라를 사랑하고 직장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신도리코의 경영이념이다. 또 이익의 3할씩을 주주, 종업원 및 재투자에 돌리고 나머지 1할은 공익사업을 통해 사회에 환원한다는 이익배분의 원칙이 바로 삼일원칙이다. 따지고 보면 삼애정신과 삼일원칙은 ‘기업이 곧 사람’이라는 창업주 우상기 회장(76)의 신념에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나 다름없다.
신도리코는 특히 가장 성공적인 한일 합작기업으로도 손꼽힌다. 우회장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고모의 떡도 싸야 사먹는다’는 전형적인 개성상인 기업가이다. 그는 6․25때 월남,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가진 재산을 몽땅 날렸다. 그러나 대신 얻은 무역 및 기업경영의 교훈을 밑천으로 뭔가 새로운 사업구상에 몰두했다.
이에 따라 산업은행 조사부에 드나들던 그는 어느 날 그곳에서 일본신문에 난 신기한 복사기 광고를 보게 됐다. 복사기는 당시 일본에서도 보급초기에 있던 혁신적인 문명의 이기였다. 사무용 복사수단이라고는 잉크 묻은 로울러를 손으로 밀어 쓰는 등사기나 먹지밖에 없던 시절이었기에 복사기는 첨단사무기기 그 자체였다.
우회장은 복사기 광고를 보는 순간 사업성이 유망하다는 것을 직감, 신도교역이란 회사를 세우고 평소 알고 지내던 재일교포를 통해 복사기 한 대를 수입해 미우만백화점(현재 미도파백화점)에 전시, 판매에 나섰다. 국내에 최초로 선보인 이 제품은 바로 일본 이연광학공업(63년 리코로 사명을 바꿈)의 RICOPY-505였다.
하지만 복사기 한 대의 값이 승용차 한 대 값과 맞먹을 정도여서 판매는 여의치 않았다. 첫해인 60년대에는 고작 복사기 한 대를 팔았고 이듬해에도 7대를 파는데 그쳤다. 무엇보다 가격을 낮추지 않고는 복사기를 대중화시키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가격장벽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서는 수입을 직거래로 전화시킬 필요성이 절실했다.
우회장은 이같은 판단아래 62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가 이연광학공업의 창업자인 市村 淸 사장을 만났다. 그리고는 디아조용지(DIAZO, 초창기 복사용지로 청사진과 같은 종이) 및 기계생산을 위한 기술지원을 간곡히 요청했다. 우회장은 그에게 한일간 무역의 밝은 미래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국에서도 사무자동화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수입대리점계약 체결로 시작된 일 리코와의 협력관계
市村 사장은 한일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의 불투명한 단계이었으나 우회장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와 호감을 갖고 기술지원에 적극 협조하기로 약속한다. 신도교역이 이연광학공업의 수입대리점이 된 것이다. 대리점 계약이 체결돼 직수입체제가 갖춰지자 판매가격이 조금씩 낮아지게 됐다. 때마침 추진된 서울시의 행정장비 개선사업(62년)은 신도교역에게 행운이었다.
서울특별시장의 지휘 아래 호적사무의 기계화가 추진되면서 13대의 복사기를 구청별로 납품하게 된 것이다. 우회장은 이때 복사기 시범행사를 지휘한 것은 물론 지게꾼과 함께 손수 지게로 복사기를 져나르는 억척을 부렸다. 서울시에 대한 복사기 납품은 신도교역에게 판매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정부 행정사무에 자동화를 확산시킨 것은 물론이고 복사기의 효율성을 홍보하는데 더없이 좋은 계기가 돼 시장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도교역이 리코와 대리점 계약을 맺으면서 기술지원을 줄기차게 요구한 것은 복사기를 저렴한 가격으로 국산화하려는 우회장의 원대한 계획때문이었다. 리코와 대리점계약을 맺은 이후 신도교역은 복사기의 국산화를 적극 모색했다. 백화점에 전시된 복사기를 보려는 구경꾼들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 웬만한 기업들은 구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였다.
한해 판매대수가 20대에 불과한 복사기의 국산화 계획을 세웠던 신도리코는 64년 7명으로 구성된 개발팀을 신설, 핵심부품인 드럼을 제외한 제품개발에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국산복사기 1호인 RICOPY-555이다. 당시 개발품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보적인 기계였지만 일본제품과 비교해 품질과 성능이 크게 뒤지지 않는 우수한 제품이었다.
69년에는 국내 최초의 EF(정전식)복사기인 BS-1을 개발함으로써 리코사를 경악시켰다. “그간 대리점 관계를 맺어왔던 일본의 리코사와 합작으로 복사기 생산에 나서기로 합의했습니다.......” 69년 8월 31일 정기총회에서 리코사와 합작회사 설립 계약을 맺은 사실을 보고하는 우상기 회장의 목소리는 다소 떨리고 있었다.
리코사와 복사기 전문 합작제조회사 설립 전격 합의
복사기 판매에 온 정성을 쏟으면서 재정적 기반을 다져온 우회장은 69년에 그간 대리점 계약을 맺어온 리코(Ricoh)사를 찾아가 합작회사 설립을 전격 제안했다. 신도가 리코측에 합작투자를 제의한 것은 “수입대체 효과와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나 당장의 기술자립은 어렵다”는 판단에서 였다.
리코사로서도 그간 개발된 기술로 사업영역을 확대하는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또 제록스, 캐논 등의 경쟁사들이 한국시장을 넘보고 있어 대응책이 필요하던 마당에 대리점 관계를 10년 가까이 유지하는 동안 눈여겨 보았던 우회장이야 말로 대한 합작투자의 파트너로서 적격이란 판단을 했던 리코사는 우회장의 합작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했다.
여기엔 신도교역이 이미 핵심부품 분야를 제외한 복사기 생산에 상당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69년 12월 일본 리코 본사에서는 신도교역이 신도리코로 출범하는 합작계약 체결식이 쌍방 대표자간에 열렸다. 신도리코는 두말이 필요없이 신도와 리코의 이름을 합한 것이다.
투자비율 50:50에 수권자본금이 12억원, 1차 납입 1억원 그리고 리코측의 신도리코에 대한 기술지원 등을 주내용으로 한 합작계약이 정식으로 서명된 후 70년에 외국인투자 인가, 합작법인 설립 등의 후속작업이 본격 진행됐다. 신도리코는 리코와의 합작을 사무기기 종합메이커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한 제2의 창업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일합작사인 신도리코 설립 당시의 임원진은 신도와 리코측이 각각 6명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이는 법적, 행정적 형식을 맞춰 법원에 등기를 하기 위한 것일 뿐 리코측에서 단 한명의 상주 임원도 서울에 보내지 않았다.
복사기의 국산화를 위해 리코사의 투자재원 및 기술도입이 최상의 선택이지만 국내 사무기기 시장을 일궈 내고 시장 정세에 맞춰 대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경영권만은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도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리코사는 신도의 이같은 입장에 대해 처음엔 난색을 표명했으나 우회장과의 신뢰를 다지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지금까지 신도리코와 33년여 동안의 대리점 및 합작관계를 유지해 왔던 리코사는 OA(사무자동화기기)시장의 선도기업으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업체중 하나이다.
리코사의 창업은 60여년전인 1936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순수과학 분야의 연구를 위해 설립된 일본의 이화학연구소는 연구개발 성과를 제품화하고 이를 판매하기 위해 이화학흥업을 설립했는데 이 회사가 바로 리코의 모체다. 설립초기에 회사규모는 보잘 것 없었으나 ‘경영의 신’으로 불리우는 시촌 사장은 그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 이화학흥업을 일본 감광지 생산량의 90%를 차지하는 톱 메이커로 키웠다.
그는 이듬해 이연광학공업을 설립, 감광지 분야를 충실화하는 한편 광학기기, 항공부품, 측량기, 시계, 카메라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특히 카메라부분은 일본 산업계 최초로 컨베이어 시스템을 이용, 대량생산 체제를 갖춰 생산성을 높인 ‘리코 플랙스 3형’ 카메라를 발매해 세계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어 55년 디아조 감광지의 수요를 확산시키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던 중 디아조식 복사기(RICOPY 101)을 발매, 마침내 사무기기 분야로 진출하게 된다. 63년 리코사로 사명을 바꾼 이 회사는 이어 BS-1, BS-2의 복사기 시리즈를 발매,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함으로써 ‘리코=복사기’라는 등식을 창출해 냈다.
지난 91년 현재 자본금 800억엔 규모에 종업원 1만 4천명을 거느린 이 회사는 각종 복사기 뿐만 아니라 복사용지, 정보기기(팩시밀리, 워드프로세서, 컴퓨터, 프린터), 광학기기(카메라, 8mm캠코더), 전자부품류 등의 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복사기 관련 매출액이 연 7천억원 규모인 매출액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 회사의 가장 큰 장점은 매년 매출액의 6% 이상을 투자하고 있는 연구개발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83년에는 보통용지 팩시밀리인 RiFAX 1300시리즈를, 84년에는 세계 최초의 고속 B4판 팩시밀리인 RiFAX 130을 생산했고 91년에는 세계 최고속 컬러 압출 알고리즘을 개발함으로써 성가를 드높여 왔다.
자체 기술력이 시장을 지배하고 리코를 움직일 수 있다.
신도리코는 이처럼 화려한 내력을 가진 리코사와의 합작을 계기로 공장을 서울 하왕십리에서 지금의 성수동으로 옮겼다. 이어 일본의 생산기술이 본격 이전되면서 복사기 부품의 양산을 본격화했다. 특히 70년대초 시장성이 밝던 전자계산기 생산에 나서 국내 시판과 함께 리코사에 대한 수출에 나섰다. 리코사는 전자계산기에 이어 자체 사무자동화기기 관련 제품생산 및 생산기술을 신도리코에 이전하는데 인색치 않았다.
리코사는 일본에서 개발, 생산에 들어간 다음 2~3년 이후면 의례 관련기술을 신도리코에 이전하곤 했다. 하지만 기술이 시장을 지배하고 합작파트너인 리코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터득하고 있던 신도리코의 우회장은 자체 기술개발에 소홀하지 않았다.
신도리코는 이를 통해 지난 75년 복사기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 제품이라 평가를 받았던 PPC(보통용지)복사기의 생산에 국내 최초로 나섰으며 이어 80년에는 자체 기술력으로 복사기 헤드드럼을 개발해 냈다. 또 81년에 국내 최초의 고속 팩시밀리를 개발했으며 82년에는 신도리코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신도리코는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 들여온 기술들을 하나 둘씩 신도리코의 기술로 축적하고 자체 개발기술을 축적함으로써 국내 최고, 최대의 복사기 팩시밀리 메이커로 자리잡게 됐다.
신도리코는 지난 88년 리코와의 합작사업에서 하나의 큰 사건을 경험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합작선인 일본 리코사와의 합작지분율을 변경한 것이다. 합작계약때부터 50:50을 유지하던 지분율을 65:35로 재조정, 리코사의 지분율을 낮추고 자체 지분을 높였다. 이후 6년만인 지난 94년에 다시 리코측의 지분 10%를 사들임으로써 리코사의 지분을 출발 당시의 절반인 25%로 낮췄다.
이 과정에서 리코측에서는 지분 철수를 반대하는 의견도 분분했으나 배당면에서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해결해 낸 것으로 알려진다. 신도리코는 리코측의 나머지 지분도 가능한 한 조기에 인수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국내외 영업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연구개발에 힘써 매출과 수익을 확대해 96년에는 주식공개와 함께 상장을 한다는 계획을 짜놓고 있다.
리코측의 지분율은 낮아졌지만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
하지만 신도리코가 이보다 더욱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리코사와의 협력관계를 지분율 변동과는 상관없이 더욱 확대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합작투자를 통해 짭잘한 수익을 얻었던 리코측의 관심 역시 지분율 유지보다 생산특화, 기술 및 부품교류, 해외시장 공동개척 등으로 옮겨 가고 있다. 이 대목은 신도리코와 리코사와의 협력관계가 앞으로도 계속 원활하게 지속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다.
신도리코와 리코가 수출에서 보여주는 공조는 양사간의 협력체제가 최근 더욱 공고해 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신도리코의 리코에 대한 수출은 그간 주로 OEM방식에 의해 추진돼 왔으나 최근 신도리코에서 설계부터 생산까지 일체를 자체 기술력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변모되고 있으며 리코측은 이를 해외마케팅면에서 지원하는 양상으로 발전되고 있다.
좋은 예는 94년 4월부터 첫 수출이 시작된 IBIS 복사기(NT-2040)이다. 이 제품은 리코사가 신도리코에 설계에서부터 생산까지 모두를 일임한 제품으로서 현재 세계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신도리코의 수출 주력제품 중 하나다.
IBIS 복사기는 인체에 해로운 전자파 발생과 예열시간을 줄이는 동시 각종 부품에 재질을 표시해 재활용도를 높인 그린(환경대응)복사기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며 최근에는 종이걸림이 자동으로 제거되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며 최근에는 종이걸림이 자동으로 제거되는 NT-4000복사기로 발전해 있다.
신도리코는 리코사에 IBIS 복사기를 대량으로 공급중이다. 특히 유럽지역에는 프랑스에 있는 리코사 공장에 녹-다운(K/D)방식의 수출과 함께 기술지원까지 실시하고 있는데 IBIS복사기 수출이 시작된 지 1년이 훨씬 지나고 있으나 지금까지 단 한차례의 클레임도 없었다는 것이 신도리코의 자랑거리이다.
신도리코는 합작 당시 1억 원이던 자본금이 94년말 현재 200억 원으로 늘었으며 장차의 상장에 대비해 95년 중 80억 원을 증액할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다. 매출액은 지난 92년에 1,095억 원, 93년에 1,443억 원, 94년에 2,050억 원으로 급성장하는 추세이다.
특히 수출은 지난 92년의 2,047만 달러에서 93년 3,422만 달러, 94년에는 7,500만 달러로 신장했으며 올해는 1억 달러 수출을 돌파하게 될 전망이다. 94년 하반기~95년 상반기 기준으로 이미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해 갈수록 활기를 더해가는 신도리코의 수출활동을 짐작케 해 주고 있다. 완제품 수출이 본격 괘도에 진입하면서 신도리코의 수출품은 소모품-부품-완제품-생산설비(금형)등으로 라인 업(Line-Up)되고 있으며 수출시장도 광역화되고 있다.
신도리코의 이같은 성장에는 무엇보다 합작선 리코측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특히 리코사는 최근 엔화 강세에 대응해 직접 생산은 초고급 기종으로 제한하고 중보급 기종의 수출품 주문을 신도리코쪽으로 적극 전환하고 있다. 이같은 신도리코와 리코의 해외협력은 지난 60~70년대 사무용 기기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사무용 기기 산업을 일궈낸 데 이어 해외수출에서 다시 꽃피울 것을 기약하고 있다.
(출처: 한국무역협회, 韓.日 기업협력, 그 성공의 열쇠,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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