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명칭의 유래,정의)와 샤르트르(생애,사상,작품세계)
실존주의와 샤르트르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생(生)의 철학’이나 현상학의 계보를 잇는 이 철학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학이나 예술의 분야에까지 확대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한 유행사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립 당초의 실존주의의 주장 내용이 희미해져 실존이란 말뜻도 애매해진 감이 없지 않다. 실존주의 철학을 초기에 수립한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를 오늘날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대표적 실존주의 학자로는 샤르트르가 있는데, 이 글에서는 그의 작품과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실존주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실존주의라는 명칭의 유래
우리는 흔히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하이데거, 사르트르등을 실존주의의 계보로 그린다. 마치 1백50년전에 살았던 키에르케고르(1813-1855)가 이미 실존주의를 표방하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러나 견고해 보이는 모든 용어들이 실상 아주 짧은 역사를 갖고 있듯이 실존주의라는 철학사조의 명칭 역시 그 역사는 50년 남짓하고, 또 그것은 전적으로 사르트르의 것이다. 새로운 끄세주판의 <실존주의> 저자인 키에르케고르 전문가 자크 콜레트는 이 말이 3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처음 나타났고, 비슷한 시기에 야스퍼스가 <실존의 철학>(1932)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이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44년 프랑시즈 퐁주가 운영하던 공산당 기관지 '악시옹'이 사르트르를 격렬하게 비난하면서였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사상을 해명하는 글 속에서 하이데거 철학과의 관계를 처음으로 밝혔다. 그리고 자신이 실존주의자라고 규정되는것에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이 모든 체계를 거부하며, 코기토에서 출발하는 완전한 개인성을 강조하는데, 거기에 실존주의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은 개체성에 보편적 원리를 구축하는 모순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좋은 이름이 없으므로, 그리고 실존주의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폭발적이었으므로 사르트르도 어쩔수 없이 그 타이틀을 받아들였다.
실존주의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를 설명하며 그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말함으로써 하이데거가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떠올랐지만, 40년대에 독일을 방문한 한 프랑스 철학자에게 하이데거는 "실존주의가 도대체 뭡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여하튼 사르트르는 2차대전 종전 후 실존주의의 교황이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1945년에 파리는 실존주의 덕분에 다시 세계의 문화 수도가 되었고, 전후 몇 년간 프랑스의 유일한 수출 품목이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사르트르의 강연회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기절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존재와 무>는 후설, 하이데거의 철학을 기본으로 깔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접목하여 만들어낸 아주 난해한 철학서인데, 이 책을 바탕으로 한 실존주의가 그토록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거리가 아닐수 없다. 그것은 이미 매스 미디어를 통한 대중적 확산의 힘을 보여준 문화현상이었다.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가를 중심으로 번졌던 실존주의 열풍은 철학이나 학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삶의 스타일 혹은 문화적 현상이었다. 생-제르맹-데-프레가의 지하 카페에서 트럼펫을 불며 재즈에 열중하던 일군의 젊은이들,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노래하던 샹송 가수 줄리에트 그레코, 가정이나 진지한 사랑등 일체의 기성 가치를 조롱하며 찰나적인 쾌락에만 몰두하던 사강류의 젊은 여성들, 이들이 모두 실존주의 현상의 모태이며 주인공들이었다.
신의 침묵, 저버림등의 개념은 수백년을 거슬러 올라가 파스칼을 실존주의의 단초로 삼았고, 인간상황의 애매성과 부조리를 강조하면서 인간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거부한 키에르케고르가 실존주의의 시조로 떠올랐다. 비극적 염세주의와 개인의 의지를 강조한 니체도 실존주의자로 부상했다. 문학에서는 도스토엡스키, 카프카, 카뮈, 이오네스코, 베케트등이 실존주의의 범주 안에 분류되었는데, 그것은 막연한 불안감, 전락, 고통, 죄의식, 절망감, 그리고 이성적으로 설명할수 없는 부조리성등의 분위기때문이었다. 실제로 우리나라 대학에서 실존주의 문학이라는 같은 범주로 사르트르와 카뮈를 강의하려면 유사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데 그것은 원래 사조가 엄격한 논리라기 보다는 한 시대의 분위기를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19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 또는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부터 시작된 사상으로,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철학적 입장이다. 최초의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은 합리적 체계 속에서는 해소될 수 없는 구체적 개별적 단독자로서의 존재이다. 실존이란 그러한 현실 존재 또는 참된 진실 존재로서의 참된 본래적 자기를 가리킨다. 이 참된 본래적 자기를 어떠한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각기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지만, 대체로 신을 인정하는 유신론적 입장과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마르셀, 베르자예프 등이 있고, 후자에는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카뮈 등이 있다.
실존이란 말은 원래 철학용어로서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일반적 본성을 의미하는 데 대하여, 그것이 개별자(個別者)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여, 옛날에는 모든 것에 관해 그 본질과 실존(존재)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서는 실존이란 특히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의 인간의 실존, 특히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의 실존을 강조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향의 선구자로서는 키르케고르나 포이어바흐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헤겔이 주장하는 보편적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정신을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주장하고(키르케고르), 따라서 인류는 개별적인 ‘나’와 ‘너’로 형성되어 있음을 주장했으며(포이어바흐),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이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을 예로 들면, 실존이란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思惟)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며, ‘자기 자신에 관계되면서 또한 그 가운데 초월자(超越者)와 관계되는 것’이지만, 한편 그러한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의 진리는 ‘좌절하는 실존이 초월자의 다의적(多義的)인 언어를 지극히 간결한 존재확신으로 번역할 수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분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초월자 또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는 야스퍼스나 마르셀은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자’이고, 사르트르 자신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임을 주장한다. 즉 사르트르의 생각으로는,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先行)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만약 인간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다면 개인은 다만 그 결정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실로 중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자유와 니힐리즘을 표방하는 실존주의의 한 파(派)는 사르트르의 아류(亞流)로서, 사르트르의 자유에 관한 사상을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는 이 밖에 L.셰스토프, N.A.베르자예프, 부버를 들 수 있고, 문학자로는 샤르트르 이외에 카뮈, 카프카 등을 들 수 있으며, 실존주의의 시조(始祖)로서는 F.W.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나아가서는 B.파스칼까지도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바르트나 불트만 등의 변증법 신학자가 실존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개인의 실존을 중시한다는 점일 뿐, 그 사상 내용에는 상당한 차가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대지(大地:現實)에 충실을 기하고 현실적 생에 대한 긍정적 사랑을 역설하는 무신론적 실존을 주장하며, 그 목표는 운명애와 '권력에의 의지'를 원리로 삼는 초인의 이념이다. 야스퍼스는 실존을 밝혀 주는 독특한 방법을 실존 해명(實存解明, Existenzerhellung)에서 찾는다. 실존 해명은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자아 존재에 눈뜨게 하고 자기 자신이 되게 한다. 특히 죽음.고뇌.투쟁.책임 같은 한계 상황에서 실존은 가장 잘 해명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이 속으로 뛰어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우리 자신이 깊이 해명된다. 이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 필연적으로 놓여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세계 내 존재(世界內存在, In-der-Welt-Sein)로 본다. 인간이 세계 내 존재인 한, 인간은 사물과 인간에 대한 염려.관심(念慮.關心, Sorge)과 불안(不安, Angst)을 갖고 살기 마련이다. 즉, 현존재의 존재 방식은 염려이며, 이 염려는 현존재의 유한성과 시간성을 드러내 준다. 죽음 앞에 나서게 되면 우리는 현존재가 시간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이해는 시간성의 시계(視界, Horizont)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zum-Tode)이며, 절대적 한계점으로서의 죽음을 직시하는 현존재이다.
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생(生)의 철학’이나 현상학의 계보를 잇는 이 철학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학이나 예술의 분야에까지 확대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한 유행사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립 당초의 실존주의의 주장 내용이 희미해져 실존이란 말뜻도 애매해진 감이 없지 않다.
2. 샤르트르
1) 샤르트르의 생애
파리 출생으로 2세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외조부 C.슈바이처의 슬하에서 자랐다. 아프리카에서 나병 환자의 구제사업을 벌여 노벨평화상을 받은 A.슈바이처는 사르트르 어머니의 사촌이다. 형식적으론 중등학교 문과 교사의 양성기관일 뿐이지만, 실제적으론 프랑스 문학 그 자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 사르트르가 7등으로 입학한 것은 1924년 8월이나, 기숙사의 한방을 쓴 폴 니장을 비롯해 레이몽 아롱, 조르주 캉길렘, 피에르 기유, 장 이폴리트, 모리스 메를로 퐁티, 다니엘 라가시, 르네 마외 등 뒷날 많게든 적게든 프랑스 인명사전의 지면을 차지할 문필가, 학자들이 그의 동급생들이었다. 1928년 졸업하던 해에 레이몽 아롱이 수석으로 합격한 철학교사자격시험에 낙방한 사르트르는 그 이듬해에 시몬 드 보부아르가 차석으로 합격한 이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가 보부아르를 알게 된 것도 바로 이해였고, 이 두 사람은 세간에 화제를 뿌린 `계약 결혼'은 차치하고라도, 그뒤 일생을 통해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가장 가까운 동료관계를 유지한다. 군복무를 마친 그는 31년에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철학교사가 되었고, 이 포구는 후일 《구토 La Nause》(1938)에서 묘사된 부비르라는 도시의 모델이라 한다. 이 철학교사 생활은 그의 희곡들이 잇단 성공을 거두어 그가 경제적으로 안정이 될 때쯤인 1945년까지 라옹과 파리를 거치며 계속된다. 그는 제2차대전에 참전해 포로 생활도 경험했고 레지스탕스에 가담, 나치에 대항하기도 했다. 2차대전 종전이후에는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처럼 사르트르도 공산당 지지 세력의 일원이 됐으며 「혁명적 민주주의연합」이라는 정당을 창당, 정치에도 관여했다. 그는 56년 소련의 헝가리 봉기 탄압 사건이 있자 공산당과 단호히 결별을 선언했으며 60년에는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의 선두에 나서기도 했다. 말년에는 노동자의 입장에 서서 길거리 공장 등에서 그들의 생활을 직접 실천했다. 바로 이같이 사회와 동떨어지지 않은 활동이 그를 20세기의 「깨어있고 행동하는」 지성의 대표적 인물로 부각되도록 했다.
2)사상
샤르트르의 철학은 공식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반대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비인간화가 주로 합리주의적 사유과정, 자연과학, 인간에 대한 지식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이러한 것들이 개인을 정부의 조작 대상으로 개조하는 도구들이라고 본다. 사르트르의 윤리적 개념은 스토아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어떤 강제적 체계에도 예속되지 않는 인간적 도덕에 관한 학설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영혼 속에 나타나는 도덕 개념은 비대상적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하면서,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반주지주의와 직각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사르트르는 진실성(authenticity), 즉 자신의 원리에 대해 충실할 것을 가장 감정이입적으로 요구하는 도덕에 대한 엄숙주의적 학설을 주장한다. 이 점에서 사르트르는 칸트 윤리학의 몇몇 전제를 형식적으로 부활시킨다. 그러므로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도덕적 요구를 정식화시킨다. "마치 모든 인류가 그를 주시하고, 그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인류가 인도되는 것처럼, 만인을 위하여 모든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정언명법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도덕표준을 일반적으로 강요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각각의 행동은 독특하고 독창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개인이 그의 내적 명령에 따라 행위하는 것은 사회의 부도덕성에 대한 보상(속죄)이며, 결과적으로 상황내적 존재인 인간에게 강요되는 일종의 희생적 사명이다. 기만적인(non-authentic) 사회적 가치는 양심의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개인의 무기력에 의해 생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양심은 선천적인 죄의식의 뿌리 깊은 부담이다. 자유는 창조적 원리를 결여하고 있는 자유일지라도 (때때로 그것은 단순하게 원하는 자유이다) 인간의 불변적인 관념적 본질이다. 자유는 그것이 비록 부조리 하거나 일시적인 정신이상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인간 행위 안에 현존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 받았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본질적으로 자유는 내려진 결정의 객관적 의미와 결정의 실행가능성과 무관하게 형식적으로 이해된 선택의 자율로 환원된다. 사르트르는 의무와 자유의 문제에 대하여 결정론을 부정하고 숙명론도 거부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은 개인이 경험한 바 있는 정서적 충격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여 이루어진다(실존주의 정신분석). 사르트르의 철학은 절대적 엄숙주의와 프로이트적 자연주의(프로이트주의)를 결합하여, 도덕적 결함을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설명한다. 무차별적인 익명의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환경의 상징적 배경에 대해서 도덕적 주체는 계속해서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한다. 이러한 주체의 자기주장(self-expression)은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범주인 '한계 상황', '선택', '자기기만' 등에 의해서 강화된다. 사르트르의 윤리적 견해는 "존재와 무" (194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1946), "변증법적 이성비판" (1960), 소설 "구토"(1938) 및 그의 희곡과 수필 작품 속에 제시되어 있다.
3)작품세계
그의 사상은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표출됐으며 「문학을 통한 사회 참여」는 일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던 주제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에는 「실존」과 「자유」라는 개념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 개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갔다.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 「존재와 무」에서 그는 인간의 본질을 규정짓는 초월자 혹은 신이라는 존재는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과 자발적인 결단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존재라고 외쳤다. 이같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자유는 전쟁을 통해 억압과 구속을 맛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으로 대표되는 후기 사상에서 그는 마르크시즘과 실존주의의 결합을 시도했다. 「변증법적…」에서 그는 이전에는 전혀 고찰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물질세계를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정하지만 여전히 그 중심에는 인간을 두었으며 자유를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원리로 내세웠다. 단지 그 자유를 물질적 재화의 희소성을 극복하려는 보다 실제적인 자유로 범위를 축소시켰을 뿐이다.
소설 '구토'는 부빌이라는 가공의 도시를 배경으로 30대 역사학자 앙트완 로캉탱의 일기 형식을 빌려 실존의 문제를 형이상학적으로 서술했다. 로캉탱은 바닷가에 널려 있는 조약돌이나 문의 손잡이 따위 등에도 구역질을 느끼는 인물. 그가 구역질의 본질을 추적해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줄거리다. 로캉탱은 세계각지를 유랑한 뒤 부빌시 도서관에서 18세기 프랑스 혁명기의 인물들의 전기를 정리하고 있다. 어느날 그는 물가에서 물수제비뜨기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흉내를 내려고 돌을 집다가 구역질을 느낀다. 이후 그의 삶은 구토의 본질을 캐는 작업이 된다. 1개월간의 방황 끝에 로캉탱은 공원의 마로니에에서 구토의 정체를 자각한다. 그가 마로니에라는 나무뿌리를 생각했을 때 마로니에 나무뿌리는 '마로니에 나무뿌리'라는 말의 형체를 벗고, 모든 부위를 통해 그의 몸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구토는 인간의 언어에 의해 성립되는 의미나 본질을 박탈당한 무질서의 덩어리였던 것이다. 결국 로캉탱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전혀 존재이유를 갖고 있지 않고, 또 존재의 의지조차 갖지 않은 우연한 존재일 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로캉탱의 깨달음은 그의 옛여인 아니를 만나며 다시 한번 확인된다. 한때 완벽한 자아를 꿈꾸던 그녀 역시 실존의 정체를 깨닫고 완전성을 향한 꿈을 던져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단지 살아있는 고독한 한명의 여인이었을 뿐이다. 절망의 깨달음 앞에 로캉탱은 한때 자기가 쓰고 있던 소설을 단념하지만 그는 곧 소설을 집필하는 행위가 부조리와 대항하는 정당한 방법임을 깨닫는다. 즉 모든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깊은 절망감속에서 궁극적으로 절망감을 해소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가치있는 것으로 자각하게 된 것이다. 구토는 시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이 혼합된 어려운 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현대작가들은 실존과 존재의 부조리 및 인간의 절망감을 대변한 프랑스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는다.
4)정신적 외상(外傷)으로서의 문학
철학의 변화, 투쟁의 과격화와 함께 그의 문학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원래 문학은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마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정신적 외상(外傷)과도 같았다. 그는 원래 문학에 대한 깊은 신뢰와 문학적 명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자서전이라 할수 있는 <말들>에서 보면 그에게 이런 문학적 선망을 심어준 것은 외조부인 샤를르 슈바이처였다(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의사 슈바이처는 사르트르의 어머니와 사촌간이다). 생후 1년만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다시 외가에 들어가 외조부모 밑에서 성장한 어린 사르트르는 독일어 학자로서 풍부한 인문적 교양을 갖춘 외할아버지로부터 문학이 종교적 신앙을 대신할수 있는 성스러운 활동이라는 생각을 주입받았다. 문학을 구원으로 생각하는 이런 문학관은 그의 첫 소설인 <구토>에 잘 나타나 있다. 실존의 우연성과 무상성(無償性) 앞에서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이던 주인공 로캉탱은 카페의 레코드판에서 흘러 나오는 흑인 여가수의 재즈를 듣고 구토가 씻은듯이 낫는 것을 느낀다. 무미건조한 삶이 예술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일종의 은유인 셈이다. 그리고 로캉탱은 자신이 할수 있는 예술 분야인 학, 즉 소설을 하나 쓸 결심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 성스러운 문학관은 사르트르에게 심한 수치심과 죄의식을 안겨주며 그의 내부로 깊이 숨게 된다. 자서전 <말들>은 플로베르에게 매혹당한 어린 사르트르를 보여준다. 소설 <구토>(33세에 출간)를 쓸때까지만 해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40년대에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참여문학을 주창하면서 그는 플로베르에 대한 심한 경멸과 증오감을 표방한다. 사회문제에 등을 돌리고 문학에만 몰두한 부르주아 작가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에 의하면 작가는 자기 책의 영향에도 책임이 있지만 얼핏 보기에 직접 상관이 없는 듯이 보이는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사건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플로베르와 공쿠르형제를 그가 극렬하게 비판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1871년 노동계급의 혁명 운동인 파리 코뮌이 실패한후 정부는 2만명에 가까운 혁명 가담자들을 학살했는데 이 작가들은 학살을 저지하려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학살의 책임자라는것이다. 더구나 학살된 사람들은 노동계급이고, 플로베르와 공쿠르 형제는 사르트르가 죽을때까지 증오를 멈출수 없다는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가.
그러니까 19세기 예술지상주의자들에 대한 격렬한 판을 내세운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기실 사르트르 자신의 자가비판이었던 것이다.
4)전방위적 지식인
샤르트르는 <존재와 무>,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쓴 철학자이지만, 그보다 좀더 문학가이기도 하다. 소설, 희곡, 문학비평을 썼고, 보들레르, 주네, 플로베르, 말라르메등 시인, 작가들의 전기나 평을 쓰기도 했다. 수많은 신문 잡지 기고, 라디오 출연, 정치 평론, 데모대 앞에서의 선동연설등 그야말로 전방위적 지식인이었고,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메를로-퐁티의 체계보다 허술했으나 그 보다 더 유명한 철학자였고, 철학적 주제를 거의 그대로 하이데거에서 빌려 왔으나 그 보다 훨씬 높은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카뮈의 작품성을 따르지 못했으나 생전에 엄청난 권위로 문단을 지배했으며, 베케트만한 참신성이 없었지만 그의 희곡들은 당대에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드골 다음으로 전 세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프랑스인이고, 지성 혹은 철학의 이미지를 프랑스에 부여한 공로자이기도 하다. 아마 세계적으로 그 만한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작은 몸집의 거인, 사르트르, 그가 죽은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타자와의 투쟁에서 최종적인 패배는 죽음이라고 갈파했듯이 그도 이제는 더 이상 타자에 의해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타자에게서만 그 자신의 의미를, 그 자신의 승리의 의미까지를 의존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그가 평생 진력한 분야는 문학, 철학, 그리고 현실참여이다. 그러나 그 세 분야는 너무나 촘촘하게 교직(交織)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각기 고립된 경계선으로 분리해 낼수 없다. 철학의 주제가 문학의 주제이고, 문학의 문구들이 그대로 철학적 주제의 일러스트레이션인 것이다. 현실참여의 기본 이념을 철학에서 길어 올리는가 하면 문학은 현실참여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모든 분야가 서로 넘나들고 스며들어 경계선을 허물고 있다. 그러나 교직은 커다란 경계선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범주 안에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혹은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 무수한 변종과 이본(異本)이 앞의것을 간섭하고 수정하며 그를 모순적 인간으로 만들어 갔다.
3.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르트르도 하이데거처럼 신을 부인한다. 그래서 흔히 키에르케고르를 기독교적 실존주의,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분류한다. 신이 없다면 실존에 선행하는 존재는 없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기본주제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철학이나 기독교 사상은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고 인간을 규정했었다. 태초에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구상한 신은 창조를 통해 그들을 실제로 존재하게 했다. 마치 그것은 시계나 나무칼을 만드는 장인이 시계의 모습 혹은 나무칼의 모습을 먼저 구상한 다음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내는것과 같다.
이런 신학적 세계관에 따르면 본질(구상)이 실존(실현된 물건)보다 앞서 있게 되고, 만들어진 물건에는 그 목적이 미리 정해져 있다. 나무칼의 목적은 책갈피를 자르는것이고, 시계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인간존재도 만일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신의 의도에 따른 어떤 목적과 성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면 거기에는 어떤 구상도 없고, 따라서 그 어떤 본질도 없다. 그 어떤 개념으로 정의되기 전에 그냥 실제로 있는 그런 존재자,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이라는 실재였다. 그러므로 실존은 존재에 선행한다. 인간은 우선 세계 안에 있고, 거기에 자신의 흔적을 각인시키고, 그렇게 하여 자유스럽게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인간은 그저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무가치한 잉여물이다. 우연히 던져짐이라는 주제는 하이데거에서 빌어 왔지만 사르트르는 거기에 무가치한 잉여물이라는 드라마틱한 묘사를 추가하여 한층 더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뉴앙스를 가미했다. 우리의 존재가 우연에서 시작되고, 그 확실성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고 간다면 "인간의 삶은 절망의 저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희곡 <파리떼>의 한 구절인 이 비장한 문구가 전쟁의 폐허에서 빠져나온 전후의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벅찬 희망을 주었을것인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아무런 본질도 나를 정의해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철학, 과학, 정치이론, 종교가 무가치한 것이라면 나의 세계를 구축해주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밖에 없다. 이와같은 완벽한 자유와 선택, 그리고 그에 따른 개인의 책임감은 인간에게 불안감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젊은이의 역동성을 자극하기에 적합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철학에는 두 경향이 있는 듯 하다. 필연적이고 강제적인 과학을 구축하려 는 의지가 그 하나이고, 이런 흐름에 우연성, 불확실성, 자유를 대립시키는 철학이 다른 하나이다. 사르트르가 40년대에 틀에 박힌 강단 철학에 반기를 들고 수많은 젊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낸 것은 우연성, 불확실성, 자유의 철학을 가지고서였다. 키에르케고르에서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실존주의는 근엄한 사상이 아니다. 그 사유방식은 냉소적이고, 모든 위선과 엄숙, 권리개념을 거부한다. 실존주의는 반항과 권위 부정을 전제로 하는 철학이었다. 실존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이며, 한 순간도 고정되지 않은 영원한 떨림이다. 인간의 태생 자체가 우연하고 불안정하지만, 매순간의 삶의 양식 또한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실존주의는 원래 개인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개인은 집단과 대립하는 개념이고, 따라서 사회적 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사르트르의 초기 실존주의는 사회적 통합과 대척점에 있었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의 철저한 고립 생활을 떠올리기 바란다. 그것은 사르트르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그는 2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사회문제에 아무 관심이 없이 문학과 철학에만 몰두하던 문학청년이었다. 그러다가 2차대전중 군에 소집되어 집단과 접한후 비로소 집단의식을 갖게 되었다. 종전후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참여 문학론으로 일약 현실참여 지식인이 된다. 그리고 죽는날 까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거대한 사상의 지도자가 된다.
60년대에 구조주의가 부상하며 그의 철학과 문학이 퇴조하고, 그의 책을 읽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든 이후에도 그는 더욱 유명해지고 더욱 존경 받았다. 그것은 세기초부터 70년대초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사상이 지성계의 주류 사상이었던 프랑스 특유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격렬하게 체제에 반항하며 시대를 거슬러 이야기한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자기 시대가 듣고 싶어 하던 것을 말한 역설적인 순응주의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리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일반적인 궁금증과 답변 (0) | 2014.05.09 |
---|---|
엑셀EXCEL 함수 정리 (0) | 2014.04.26 |
Thevenin 정리와 Norton 정리 (0) | 2014.04.18 |
급여제도 이해:: 한국(우리나라,대한민국,KOREA) (0) | 2014.04.16 |
사회보장과 의료보장 (0) | 2014.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