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활동이 뜸하지만, SF상업영화의 신 스티븐 스필버그
*영웅, 아이들을 구원하다.
1967년의 어느 날, 스티븐 스필버그의 아버지 아놀드 스필버그는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굳게 믿은 자신의 발명품 하나를 집에 들고 왔다. 들뜬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이게 바로 미래야!"라고 자신의 분신을 소개하는 순간, 어린 아들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것을 한입에 꿀꺽 집어삼켰다. 아놀드는 너무 황당해 웃음을 터트렸지만 결국 크게 화를 내고 말았다. 그 트랜지스터는 아놀드 자신의 업적이 집약된 발명품일 뿐 아니라, '전선 몇 개가 삐죽이 박혀' 있는 위험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스필버그의 영화를 요약하라면 이런 장면이 될 것 같다. 그는 진지함을 유머로 탈색시켜 관객에게 마법 같은 웃음을 선사하지만, 정작 거기에는 기성 사회가 주입하는 지식이 축적된 트랜지스터 따위는 거부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 거부가 진심 어린 반항이라기보다 아버지의 애정 어린 걱정과 관심을 끌려는 어린아이의 장난스런 제스처라는 것은 누구나 금세 간파할 수 있으리라. 스토리와 비주얼의 귀재, 할리우드의 피터 팬, 흥행의 마법사... 그의 이름 뒤에 붙는 수많은 수식어로도 모자라서, 그는 '드림윅스 SKG'라는 영화 제작사를 차려 회장님이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 신동은 아직도 트랜지스터를 삼킨 저 유명한 악동 기질을 떨쳐 버릴 수 없는지 일 년에 한 편씩 줄기차게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스필버그의 영화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왜 라이언 일병은 꼭 구해져야 하며, 이티는 지구까지 내려와서 엘리엇이라는 꼬마 소년에게 구원받아야 하는가? 스필버그 영화에서 목숨을 구제받은 사람(물론 외계인을 포함해서)은 비단 이티와 라이언 일병만이 아니다.<인디아나 존스>의 식민지 아이들은 악마 같은 사제에게 납치되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태양의 제국>에 나오는 어린 소년 짐은 전쟁 통에 부모와 헤어져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스필버그의 많은 영화들이 그 휘황한 내레이션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는 사실은 심상치 않은 조짐처럼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마치 양아버지 톰 행크스가 버릇없고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양아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길들이는 또 다른 '구원 변주곡'같이 보이지 않는가? 구원의 영웅, 절박한 순간 나타나서 삶을 이어 주는 권위 있는 손길은, 결국 스필버그의 무의식적 소망이 아이들을 구원하는 '강한 아버지'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듯하다.
*<죠스>, 물 밑의 거세 공포
스필버그의 할리우드 정식 데뷔작은 1971년에 발표한 <결투>였다. 그러나 그는 열두 살 때부터 영화를 만들고 열여섯 살에 140분짜리 장편 <불빛>을 만든 조숙한 영화광이기도 했다. <불빛>은 프로 뺨치는 아마추어의 공상 과학 영화였고, 세계 최초 상영이라는 타이틀까지 버젓이 달고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 있는 한 극장에서 공개되었다. 이미 이 <불빛>부터 <결투>, <죠스>,<미지의 조우>에 이르기까지, 스필버그는 1970년대에 만든 영화들에서 미지의 세력에 대한 공포나 경외심 같은 원시적인 정서들을 다루는 데 장기를 보였다. 특히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불시에 물 밑에서 돌진하는 거대한 상어 죠스는 다분히 거세 공포를 일으키는 파괴력을 상징하고 있다.
한편 스필버그의 초기작들 중 상당수가 가장 원시적이고 위압적인 방식으로 가해자를 형상화하고 있는데도,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은 어딘지 모르게 무력한 남성상을 가지고 있다. <결투>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소심한 중산층 남자로, 아내가 파티에서 성적 희롱을 당하는데도 이를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한다. 또한 <미지와의 조우>에서 주인공 로이는 바람을 피워 아내와 소원한 관계가 된다. 이러한 위태로운 가정상과 왠지 모를 도덕적 취약성을 내포한 남성상은 스필버그의 초기작에 단골로 등장한다. 이와 연관하여 스필버그가 열여섯 살 때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는 것은 이미 신화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부모의 불화와 이혼이 어느 정도 충격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린시절 그는 배관을 타고 들려오는 부모의 고질적인 말다툼에 시달렸고, 겁에 질려 우는 동생들을 달래야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는 오직 극대화된 공포와 혼란만이 판을 치는 그러한 세상에 관객을 밀어 넣는 방식으로 자기 만족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분열된 영웅 -<이티>와 <인디아나 존스> 3부작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나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보낸 스필버그는 1964년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로 이사 오기 전까지 도시를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마천로가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도시를 본 그의 모습은 불빛이 점점이 박힌 LA의 야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한 이티, 그 자체였다. 이처럼 <이티>는 바로 미국 문명에 대한 경외심이 집약되어 있는 영화다.
사실 외계인 이티뿐 아니라 <인디아나 존스>에 등장하는 식민지 아이들, <태양의 제국>에서 부모를 잃은 영국 소년 등, 1980년대 중반까지의 스필버그 작품은 어느 하나 미국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이 점은 구원자이며 영웅인 인디아나 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매우 분열적인 면모를 가진 통합되지 않은 거친 삶의 파편들을 숨긴 사나이다. 고고학이란 명분으로 그가 자행하는 것은 결국 불법적인 도굴이고, 그는 노예에게나 휘두를 법한 채찍을 무기로 삼고 있다.
그런데 백인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를 한 몸에 구현한 듯한 인디아나 조느는 평상시에는 아주 점잖고 지성적인 교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여자 주인공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얼마나 멀거니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하는지, 관객들로서는 의아할 정도다. 인디아나 존스는 여전히 그 이전의 남자 주인공들처럼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의 남성성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 그는 여성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데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스필버그의 표현 방식은 오히려 이를 과잉 보상하는 것이었다. 고비마다 자신을 무한한 위험으로 밀어 넣고 채찍을 휘두르는 히스테리컬한 마초 맨, 인디아나 존스를 보노라면 철저히 가부장적인 동시에 분열된 상태인 스필버그의 대리 자아를 보는 듯하다.
*의미 있는 몸짓들 - <칼라 퍼플>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까지
스필버그가 마음을 열고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과 진정으로 대화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칼라 퍼플>부터일 것이다. 그는 <칼라 퍼플>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그려 내는 의미있는 시도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카데미에서 철저히 외면받고 말았다.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영혼은 그대 곁에서>라는 소박한 결실을 가져오는 밑거름이 되었다. 강하면서도 아름다운 복합적인 여성 도린다와 헌신적인 남성 피트가 비로소 육체적. 정신적으로 이상적인 결합 상태에 놓인다는 설정은 스필버그 영화에서는 무척이나 희귀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 뒤 스필버그는 자신의 영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편의 영화를 만들게 된다. 바로 <쉰들러 리스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목숨을 걸고 유태인들을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던 쉰들러라는 실제 인물을 그린 <쉰들러 리스트>는 유태인으로서 스필버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처음 인정한 작품인 동시에, 아카데미상을 안겨 준 행운의 작품이기도 했다. 사실 스필버그가 유태인이라는 것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그림자를 안겨 주었다. 스필버그는 크리스마스에도 남의 집 창밖에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이나 구경하고,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고 사람들에게 주장하면서 자라야 했다. 미국 같은 철저한 기독교 사회에서 그것은 일종의 소외 내지는 고립을 자청하는 일이었다. 스필버그는 청소년기 내내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것을 친구들에게 감추고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애썼다. 한번은 친구들과 놀고 있는 자신을 유태식 이름인 슈무엘로 부르는 할아버지를 외면하기도 했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창가에 장식을 달자고 부모님에게 떼를 쓰기도 했다. 이런 그가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제까지 오랜 동안 자신 안에서 숨어 있었던 갈등, 곧 혼란스러운 정체성과 직면하려는 일종의 본능적인 몸부림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어 1998년에 나온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그의 구원 변주곡의 마지막 악장을 연주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논하기에 앞서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영화 평론가 진 시스켈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던 자기 삶의 마스터 이미지다. 진 시스켈이 스필버그에게 '자신의 삶을 한 번에 형상화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장면'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미지와의 조우>에서 어린 소년이 커다란 문 앞에 있는 쇼트가 떠오른다고 대답했다. 휘황한 빛이 들어오지만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문 앞에 서 있는 소년의 뒷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은 이러한 마스터 이미지의 확대 재생산과도 같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대원들은 자신의 운명 앞에 삶이 놓여 있는지 죽음이 놓여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좁은 배 안에 갇혀 있는 대원들의 얼굴에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자들이 느끼는 불안과 번민이 스쳐 가고, 주인공 밀러 대위의 떨리는 손은 말 그대로 영혼의 수전증이나 다름없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환상과 모험의 세계에서 도피했던 피터 팬이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현실에서 치러 내는 스필버그 내면의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밀러 대위를 연기한 톰 행크스는 미국인의 도덕관의 표상으로 스필버그의 영화를 통틀어 가장 성숙한 지도력과 인간상을 보여 주었다. 결국 라이언은 밀러 대위에게 단순히 은혜를 입기보다 그를 도와 독일군을 격퇴하는 연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카프라적 인민주의, <터미널>
스필버그는 이제 정말 평안해 보인다. <죠스>나 <이티>같은 외계인에서 시작한 그의 주인공들은 점점 자라 미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한 톰 행크스로 집약되고 있으며, 인디아나 존스 같은 허풍선이도 사라지게 되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현실 사회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꼬마 인디아나 존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톰 행크스란 착한 아버지에게 감화받아 제자리로 돌아가는 성장 영화처럼 비추어지기까지 한다. 마치 <A.I.>에서 자신이 사람인지 로봇인지 번민하던 아이가 엄마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은 것처럼... 최신작 <터미널>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프랭크 카프라적 인민주의(미국식 이상주의)를 완성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영화는 카프라의 작품 <디즈 씨 도시에 가다>를 스필버그 식을 바꾼 것으로, '터미널' 대신 '나보스키 씨 공항에 가다'라는 제목을 붙여야 할 것같은 느낌마저 든다.
스필버그는 <터미널>에서 미국에 대해 무척 양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고국인 크로코지아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오도 가도 못하는 미아 신세가 된 빅토르 나보스티는 이제 JFK 공항에서 노숙을 하며 '웰컴 투 아메리카'를 경험한다. 시종일관 유리창 너머로 잡히는 나보스키의 이미지에는, 햄버거에 침을 흘리고 휴고 양복을 곁눈질하는 자본주의 천국에 소외된 이방인의 씁쓸함과 외로움이 골고루 배어 있다. 스필버그는 수많은 감시 카메라와 칸막이로 짜여진 공항, 콧대 높은 미국의 오만한 쇄국 정책과 9.11 테러 이후 사뭇 비인간화된 사막 같은 그곳에 애써 따뜻한 휴머니즘의 불씨를 지피려 든다.
공항은 뜨내기들의 천국인 동시에, 모든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시스템이 곳곳에 숨어 있는 감옥과도 같은 공간이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이 감옥 같은 공간에서도 끝끝내 소년 같은 환상과 낙관주의를 버리지 못한다. 나보스키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면서까지 뉴욕 땅을 밟으려 한 이유가, 아버지의 유언으로 가장 미국적인 문화유산인 재즈 섹소폰 연주자의 자필 사인을 받기 위해서라는 설정부터가 그렇다. 거기다가 영화는 미완의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하는 과정, 곧 미국이라는 나라가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터미널, 이민의 종착지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9.11 테러로 영혼에 멍이 들어 버린 미국의 정신을 위무하고 싶은 스필버그의 마음이 영화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아버지가 되고 싶은 소년'에서 '미국 문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아버지'가 되어 버렸다. 다디단 사탕 같은 스필버그의 얄팍한 휴머니즘은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지만, '꿈'을 좇는 그의 영화들은 보기에 편하고 보고 나면 흐뭇해지는 귀여움이 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스필버그 영화 보세요"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밖에.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스필버그 영화는 오직 이런 꿈을 좇는 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 스티븐 스필버그에 대한 나의 고찰
저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생각하면 2001년도에 개봉한 작품인 A.I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물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들 중 기억나는 여러 작품들이 많긴 하지만 A.I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 제일 많이 감정이 동요되고 그 내용에 동화되어 보았던 영화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A.I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로봇이 겪는 상황들과 곧 다가올 것 같은 영화 속의 미래 모습들, 로봇들, 인간의 행동과 행위들. 영화 속의 모습과 내용은 비록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지만 가끔씩 한 번은 생각해 보는 미래의 모습들을 시각적으로 보게 되니, 그런 일들이 정말로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었습니다. 혹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상업성을 위주로 영화를 만들어 낸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돈을 벌기 위하여 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상업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 감독의 영화를 보기 위해 자신의 자비를 소비한다는 것은 그만큼 스티븐스필버그 감독의 영화에 대한 공감성과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대리만족이나, 그런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속에서 충족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하는 것이고 그만큼의 수익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에는 꿈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방법을 감독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동심의 세계로 가기도 하고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큰 화면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 곳으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고 영화를 다 관람하고 나온 뒤에는 그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가 상업적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의 영화를 보면서 가상체험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myPP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공통점 (0) | 2013.01.12 |
---|---|
추억의 신입생때 쓴 영화 감상문 - 에이미(AMY)를 보고(사회복지학과 추천 영화) (3) | 2013.01.12 |
일본의 의복문화(기모노 모후쿠 喪服、 もふく 쥬니히토에十二単 후리소데 振袖ふりそで,도메소데 留袖、 とめそで,호몬기 訪問着、 ほうもんぎ, 유카타 浴衣、ゆかた 우치카케 打掛、 う.. (0) | 2013.01.12 |
소비자행동의 기본,구매행동의 유형,구매의사결정 과정,요인,산업재 구매행동 (0) | 2013.01.11 |
알마냐 원제: Almanya 감독: 야세민 삼데렐리 출연: 파리 야르딤, 베다트 에린킨, 릴레이 호저 제작: 2011년/독일 (0) | 2013.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