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자.--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
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2010 도서출판 부키
p.11 서론
재정 및 통화지원으로 2008년 금융위기가 세계경제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지는 것을 겨우 막아냈다. (1930년대 대공황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 경제위기) 금융개혁은 하지 않은 채 재정 및 통화정책을 완화한 결과 금융계에 새로운 거품이 일고 있으나 실물 부문은 돈줄이 막혀있다. 이 거품이 터지는 날엔 다시 불황으로 들어가는 더불딥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이번 금융위기의 여파는 깊은 파장을 남겨 기업과 가계 부문이 원상 복구하는 데에 몇 년이 걸릴 것이고, 엄청난 재정적자를 만회하느라 정부는 공공투자와 복지 혜택을 줄일 수밖에 없어 몇 십 년 동안 경제성장, 빈곤 문제, 사회 안정성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이 재앙의 원인은 1980년대부터 세계를 지배해 온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이다. 시장은 효율적이고 공정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시장에서는 경쟁을 통해 자기가 가진 생산성에 맞는 보상을 받게 되므로 공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업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부의 창출이 극대화되고, 결국 사회전체가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 시장의 효율만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30여 년 동안 대부분의 나라가 자유 시장 정책을 추진했다. 공기업과 금융기관들을 민영화하고 금융 및 산업 부문에 대한 규제를 없앴으며, 국제 무역과 투자를 자유화하는 한편 소득세를 인하하고 복지 지출을 줄였다. 이로 인해 사회가 더 불평등해지는 단기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더 역동적이고 부유한 사회가 만들어 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혜택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 외에도 오래전부터 대부분의 나라에서 성장이 둔화되고 불평등과 불안정이 심화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부자 나라들은 막대한 신용 확대 조치로 취하고 신용 확대에 힘입은 소비 붐으로 눈가림해 온 것이다. 개발도상국은 더욱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왔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지역 국가들은 생활수준이 지난 30년간 전혀 향상되지 않았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1인당 성장률은 2/3이 떨어졌다. 중국과 인도도 불평등은 심화되었지만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부분적인 자유화만을 허용하면서 본격적인 자유 시장 정책을 도입하기를 거부한 곳이다.
본서 목적 -- 결국 자유 시장주의자들 혹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이야기는 잘해야 부분적으로만 맞고, 최악의 경우 완전히 틀렸다는 말이 된다. 그들은 허술한 추측과 왜곡된 시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는 자본주의에 관한 여러 가지 중요한 진실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내 목적이다.
본서 목적 -- 수많은 문제점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좋은 경제시스템이라 믿기 때문에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뿐 자본주의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지난 30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특정 자본주의 시스템 즉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싶을 뿐이다. 자유 시장 체제가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더 나은 시스템으로 만들 방법이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경제운영방식을 이해하고 대안을 찾으려면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지식은 너무 복잡하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부실자산 구제조치의 효과, G20의 필요성, 은행 국영화의 장단점이나 경영진의 적정 보수 수준을 정확히 판단하는 데는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아프리카 빈곤 문제, WTO 업무, 국제결제은행이 요구하는 자기자본 비율 등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경제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서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데에는 전문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주요 원칙과 기본적인 사실을 알고 나면 상세한 전문 지식이 없어도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단 한 가지 전제조건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씌워 놓은 장밋빛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thing 1-- 자유 시장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시장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각종 정부규제에 반대하는 소리에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
thing2-- 큰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경제의 역동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정부에 대해 널리 퍼진 불신이 근거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thing 9, 17-- 우리가 탈산업화된 지식 경제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일부 정부들이 추진해 온 대로 국가 산업의 쇠퇴에 무관심하거나 암묵적으로 환영해 온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thing 13, 20-- 트리클 다운 이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부자들에 대한 과도한 세금 감면 정책의 정체를 직시하게 되어서, 지금까지 들어 온 것처럼 이런 감세 정책이 우리 모두를 더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드는 정책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thing 13, 14 -- 세계 경제가 겪어 온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저항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의 결과도 아니다. 최고 경영진과 은행가들의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동안 평범한 미국인들의 임금은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동시간은 계속 늘어난 현상은 어떤 신성불가침한 시장의 법칙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thing 4, 6 --우리가 갈수록 심해지는 국제 경쟁에 휘말려 일자리를 걱정하게 된 것이 끊임없는 교통 통신의 진보 때문만은 아니다.
thing 18, 22 -- 지난 30년 사이 금융부문이 실물 경제와 점점 더 유리되고, 급기야는 오늘날의 경제적 재앙을 불러 오게 된 것은 결코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다.
thing 7, 11 -- 열대 기후, 불리한 지리 조건, 경제발전에 맞지 않는 문화 등 인간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구조적인 요인 때문에 가난한 나라들이 가난한 것이 아니다.
결론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 특히 규칙을 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에 따라 일들의 방향과 결과도 달라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세상 중 가장 나은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종류의 결정을 내렸더라면 지금 다른 모습의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들이 확고한 증거와 제대로 된 논리에 근거한 것들인지 따져보고 나서 기업, 정부, 국제기구 등에도 올바르게 행동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힘 있는 사람들은 불행하고 불공평한 상황이 와도 그것은 피할 수 없고 변화를 가져올 방법도 없다고 말한다. 경제시민으로서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의 말을 믿고 그들의 결정에 희생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이 책의 목적은 자본주의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하면 더 잘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지를 독자들이 이해하도록 돕는데 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 정부개입은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을 가져온다. 즉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이윤이 높은 일을 할 수 없다면 투자하고 기술 혁신을 할 동기를 잃는다. 정부가 임대료에 상한선을 정하면 건물주는 건물을 보수하거나 새 건물을 지을 동기를 상실한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자유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칙과 한계가 있다. 시장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시장의 바탕에 깔려있는 여러 규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규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도 없다. 자유 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정부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 자유 시장론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유 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p.20 ● 노동할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는 아동 노동에 대해 제대로 된 규제가 도입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이전만 해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아동 노동 규제를 자유 시장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듯 시장의 자유는 보는 이의 견해에 따라 달라진다. 최대한의 이윤을 거두기 위해 필요하면 누구든 고용할 수 있는 공장주의 권리보다 아동의 일하지 않을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의 눈에는, 아동 노동 금지가 노동 시장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시장이 아동 노동 금지라는 잘못된 정부 규제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다고 볼 것이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나 공장 매연에 대한 환경규제에 반대했다.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매연이 심한 차를 몰거나 공해를 더 유발하는 생산 기술을 쓰는 것에 대해 정부가 나서서 그것을 막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부규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렇게 각자 입장에 따라 느끼는 자유의 정도가 다르듯이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자유 시장은 환상이다. 자유 시장처럼 보이는 시장이 있다면, 이는 단지 그 시장을 지탱하고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여러 규제를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p.22 ● 피아노 줄과 쿵푸의 대가들
자유 시장에 있어서 일단 특정 규제의 정당성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면 그 규제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규칙,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규칙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판매대상 규제-- 마약, 인간의 장기, 투표권, 공직, 판결 등은 공공연히 사고 팔수 없게 되었지만, 과거에는 많은 나라에서 시장 거래를 허용했던 것들이다. 대학입학 자격은 아직도 거래가 가능한 나라가 있다. 총기와 술은 거래를 금지하는 나라가 다수이고, 의약품은 시판되기 전에 정부로부터 안전성을 공인받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다. 150여 전에 인간을 사고파는 거래(노예 거래)를 금지하는 규제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시장 참여자 규제-- 오늘날 아동 노동 규제가 일반적이고, 의사나 변호사는 면허가 필요하며, 은행설립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자본 보유기업에 대해서만 허가하는 나라가 많다. 주식 시장에서 어느 기업의 주식이 주식시장에서 거래가 되려면, 그 기업은 일정 기간에 걸쳐 엄격한 회계 감사 기준을 충족하는 등의 상장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또 주식은 면허가 있는 중개인이나 트레이더를 통해서만 거래가 가능하다.
거래 조건 규제-- 한국과 달리 1980년대 제품에 하자가 없는 데도 소비자는 전액 환불을 요구할 수 있었다. 소비자의 권리가, 반품된 물건을 제조원에 돌려보내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피할 수 있는 소매상의 권리보다 중요하다고 규정한 것이다. 그 밖에 제조물 배상책임(PL), 약속한 날짜에 배달을 못해 주는데 대한 배상문제, 채무불이행 등 상품 교환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상황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규정이 있다. 또한 많은 나라에서 노점상 금지, 주거지역 상행위 금지가 이뤄지고 있다.
가격 규제--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이 습관적으로 공격하곤 하는 임대료 통제나 최저 임금제처럼 명백한 규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에서 임금을 결정하는 데는 이민정책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만일 노동시장이 자유롭다면 자국 노동자의 80~90%는 임금이 낮고 생산성이 더 높은 이민 노동자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민문제는 대개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받는 임금은 모두 근본적으로 정치적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thing 3)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많은 나라에서 이자율이 지속적으로 인하됨에 따라 대출 금리도 대폭 떨어졌다. 이는 이자율을 내림으로써 수요를 진작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결정에 따른 결과였다. 이는 암암리에 정치적인 고려가 반영된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이자율도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렇듯 다른 모든 가격에 영향을 주는 임금과 이자율이 상당 부분 정치적으로 결정된다면, 궁극적으로 모든 가격이 정치를 통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p.25 ● 자유무역은 과연 공정한가?
우리는 어떤 규제의 바탕이 되는 도덕적 가치에 수긍하지 않을 때 그것을 규제라 여긴다. 19세기 미국 연방정부가 자유무역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자 노예소유자들이 격분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이었다. 그들은 자유 시장에서 사람을 매매하는 행위에 별다른 잘못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자유 무역 대 공정(公正) 무역을 둘러싼 논쟁의 이면에도 이러한 가치관의 충돌이 깔려있다. 많은 미국인들이 보기에 중국이 자유로운 무역을 하는지는 몰라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임금에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제품을 파는 중국은 공정하지 못한 경쟁을 하는 상대인 것이다. 반대로 중국인들은 선진국이 자유 무역을 옹호한다고 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을 기반으로 생산된 제품들에 수입제한 같은 방식으로 중국산 수출품에 인위적인 장벽을 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라고 반박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저임금과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정의할 객관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경제발전 단계나 생활수준에 엄청난 격차가 나는 상황에서, 예를 들어 미국 임금의 10% 수준이 중국에 가면 높은 임금이 되는 것이다. 공정무역을 주장하는 미국인이라면 자기 할아버지가 만든 제품도 사지 않았을 것이다. 1905년 미국은 제빵 노동자들의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한 뉴욕 주의 법에 대해 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린 나라이다.
이렇게 볼 때 공정 무역을 둘러 싼 논쟁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가치판단이나 정치적 결정에 관한 문제이지 통상적인 의미의 경제학적 논쟁은 아니다. 이는 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고, 개선하려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p.27 ●여기가 프랑스가 아닌 것 같아
2008년 7월 금융 시스템의 붕괴에 직면한 미국 정부는 주택 담보 대출 회사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2000억 달러라는 막대한 공적 자금을 쏟아 붓고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켄터키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 짐 버닝(Jim Bunning)이 이를 비판하자 부시는 부실 자산 구제 조치가 “연방정부는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서만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신념 위에 세워진” 미국식 자유 기업 시스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금융 산업의 상당 부분을 국유화하는 조치는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그런 ‘불가피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말인 셈이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가 개입을 흔히 있는 시장 현상이라고 우기는 것이니 만큼 정치적 이중 화법의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자유시장 경계 -- 이는 자유 시장이라는 신화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가 드러난 경우이고, 어떤 정책이 자유 시장 자본주의에 위배되지 않는 불가피한 국가개입인지 아닌지는 견해 문제일 뿐임을 말해준다.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규정된 자유시장의 경계란 없다.
시장 경계를 변경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그 경계를 지키고자 하는 시도만큼이나 정당한 것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역사 자체도 시장의 경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였다.
탈시장화 경향 -- 오늘날 시장 바깥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은 시장 과정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의해 시장에서 제외되었다. 공직, 판결, 투표권, 대학입학 자격, 무허가 약품 등이 그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다시 ‘시장화’하려는 경향이 여전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공무원이나 법조인,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뇌물 공여처럼 불법적이거나, 소송에서 이기기 위한 고액의 변호사 선임 혹은 정당에 대한 정치 자금 지원이 시장화의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특정 거래를 시장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혹은 시장 밖으로 몰아내려는 움직임은 항상 양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지만, 탈시장화의 경향이 더 강하다.
규제 강화-- 시장에서 계속 거래되는 상품도 시간이 지날수록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몇 십 년 전과 비교할 때 오늘날에는 유기 농산물 증명이나 공정무역 생산자 증명 등과 같이 ㉠누가 무엇을 생산할 수 있고, 오염 물질이나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 등과 같이 ㉡어떻게 생산할 수 있으며, 제품 표기 규정이나 환불 규정 등과 같이 ㉢어떤 방식으로 판매할 수 있는 지를 훨씬 더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시장경계 설정의 전쟁 -- 시장경계를 다시 긋는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뒤따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 과정이 정치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미국은 노예 매매의 자유를 둘러싸고 남북전쟁을 했다. 영국은 아편을 자유롭게 거래하기 위해 중국을 상대로 아편전쟁을 벌였다. 아동 노동의 자유로운 거래에 관한 규제는 사회개혁가들의 투쟁 덕에 가능했고 공직과 투표권을 자유롭게 사고파는 행위를 불법화하려는 노력은 엽관제(spoils system)를 유지하고자 했던 정당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개혁적 정치운동, 선거제도 개혁, 공직자 임용에 관한 규정 개선의 결과이다.)
경제학의 비과학성 -- 시장의 경계가 모호하여 객관적으로 결정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경제학이 자연과학과 같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올바른 경계를 과학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고 믿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규제에 대한 주장의 이해관계 -- 새로운 규제에 대한 반대는 현 상태가 부당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고수하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기존 규제를 철폐하자는 주장은 시장 영역을 확대하자는 말인데, 시장은 1달러당 1표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만큼 돈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자는 의미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시장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를 들어 특정 규제의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그 규제를 통해 보호될 권리들을 부정한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 표명에 불과하다. 그들도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시장은 객관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p.32 thing 02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들이다. 그러므로 기업은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경영되어야 한다. 주주들의 수입은 기업의 실적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주주들은 투자 기업의 실적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기업이 파산했을 때에도 다른 이해 당사자들은 최소한 조금이라도 건지는 반면에 주주들은 모든 것을 잃는다. 이렇듯 다른 사람들은 부담하지 않는 리스크를 짊어지다 보니 주주들에게는 기업 실적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동기가 강할 수밖에 없다. 주주들을 위한 경영을 하면 기업 이윤은 극대화된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기여를 극대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주주들이 법적으로는 기업의 주인일지라도 그들은 기업의 이해 당사자 중에서 가장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고, 따라서 기업의 장기 전망에 가장 관심이 없는 집단이다. 특히 소액 주주들은 장기 투자를 줄여 이윤을 극대화하고 그 이윤에서 주주에 대한 배당을 극대화하는 단기 수익 극대화 기업 전략을 선호한다. 주주들을 위한 기업 경영이 결국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p.33 ● 카를 마르크스, 자본주의를 옹호하다.
영어권 국가의 기업 이름으로 PLC(주식회사, public limited company), LLC(유한 책임회사, limited liability company), Ltd(유한회사, limited company)가 많다. L은 유한 책임(limited liability)을 줄인 유한(limited)의 머리글자로, 기업이 파산할 경우 투자자들은 자신의 투자지분만큼만 손해를 본다는 의미이다.
유한 책임을 가리키는 이 L 자가 근대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했다. 이런 형태의 기업 조직은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16세기 유한책임 회사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무한 책임(unlimited liability) 하에서 사업을 해야 했다. 망하면 빚을 갚아야 하고, 빚을 갚지 못하면 형무소에 가야 했다.
유한회사의 설립허가 -- 16세기 발명은 되었지만 19세기 중반까지는 유한 책임 회사를 세우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다. 왕실이나 정부에서 특별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경영자가 리스크를 100% 부담하는 것이 아니어서 과도하게 위험한 사업을 하리라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투자자도 리스크의 한도가 각자의 투자액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전문 경영인을 감시하는 데 소홀하리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Adam Smith가 유한 책임원칙에 반대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였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 국가들은 규모가 크고 리스크가 높으면서 국익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업에 한해서만 예외적으로 유한 회사의 설립인가를 내주었다. 1602년의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 영국 동인도 회사, 1721년 영국의 남해회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19세기 중반 철도, 철강, 화학 공업과 같은 대규모 산업이 등장하면서 유한 책임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이리하여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유한 책임에 대한 의구심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마르크스의 간파 --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유한 책임의 중요성을 카를 마르크스가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이전 시대의 애덤 스미스나 동시에의 많은 자유 시장 론자들이 유한책임에 반대했던 것과 달리 마르크스는 유한 책임이 개인 투자자들의 리스크를 줄임으로써 새로 등장하는 중화학 공업에 필요한 대규모 자본 동원을 가능케 하리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1865년에 이미 공동 자본회사를 ‘자본주의 생산의 최고단계’라 일컫는 선견지명을 보였다. 유한책임으로 말미암아 경영자들이 리스크를 과도하게 떠안으려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를 유한 책임이라는 제도 혁신이 가져올 엄청난 물질적 진보의 부작용 정도로 간주했다. 그가 자유 시장론자들의 비판에 맞서 새로운 자본주의를 옹호한 속셈은 따로 있었다. 마르크스는 공동 자본 회사가 경영으로부터 소유를 분리해 낸다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가 성취한 물질적 진보를 해치지 않고도 (이미 기업 경영에서 손을 땐) 자본가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전환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p.36 ● 자본가 계급의 종말
공동 자본 회사에 기반을 둔 새로운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향한 길을 닦아 줄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유한 책임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일반화되면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한 차원 더 높아질 것이라는 예언은 정확했다.
유한 회사를 둘러싸고 다른 사람의 자금으로 경영하는 경영자는 리스크를 과도하게 떠안을 것이라는 우려는 처음에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헨리 포드, 토머스 에디슨, 앤드루 카네기같이 상당한 지분을 소유한 기업가들이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사지분을 상당 부분 소유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위험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손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문 경영인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고, 한 사림이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는 것도 점정 어려워졌다. 전문 경영인들이 경영권을 장악해 나갔고, 주주들은 기업의 경영방침을 결정하는 데 점차 소극적이 되었다.
1930년대가 되면서 경영자 자본주의(managerial capitalism)가 등장하고 전문 경영인들은 이윤 극대화보다는 매출 극대화를 통해 회사 규모를 키우고, 자신의 명성을 높이며, 회사에서 받는 특전을 최대화하려 했다. 이러한 전문 경영인의 등장을 슘피터는 그로 인해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약화되겠지만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갤브레이스도 1950년대에 쓴 글에서 전문 경영인이 경영하는 거대 기업의 등장은 대세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정부 규제의 확대와 노동조합의 강화만이 이런 거대 기업에 대항 할 수 있는 유일한 견제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p.39 ● '성배‘인가 ’비신성 동맹‘인가
스톡옵션 -- 1980년대에 드디어 주주 가치 극대화 원칙이 발견되었다. 주주 이익의 크기에 따라 전문 경영인의 보수가 결정되고, 임금, 투자 재고, 중간 관리자의 비용을 무자비하게 삭감해 수익을 극대화하도록 하면서 수익 중에서 최대한 많은 부분을 배당금 지급이나 자사주 매입(share buyback) 형태로 주주들에게 배분되도록 하는 제도이다. 그것은 스톡옵션의 비중을 늘리는 것이다.
경영인 보수의 급격한 상승 -- 1981년 GE 회장을 오랫동안 맡았던 잭 웰치(Jack Welch)가 주주 가치라는 용어를 만든 후 주주 가치 극대화는 미국 재계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이로서 미국 전체 기업 수익에서 배당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1950-70년대에 35~45% 수준이었으나, 1970년대 말 이후로 약 60%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경영자들의 보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thing 14 참조)
소득 불균형 초래 -- 경영인과 주주들간의 ‘비신성 동맹(unholy alliance)'은 기업의 기타 이해 당사자들을 착취한 자금으로 유지되었다. 일자리가 줄고, 해고된 노동자는 더 낮은 임금에 복지 혜택도 거의 없다시피 한 비노조원 자격으로 재고용되었다.
임금 인상 요구는 해외 이전 위협으로 억제되었고 납품업체와 그 종업원들은 지속적인 단가 인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정부 또한 법인세가 낮고 기업 보조금이 많은 나라로 공장 이전하겠다는 위협에 법인세 인하 및 보조금 확대 압력에 휘둘려야 했다. 그 결과 소득 불균형은 극심해졌고 영미 대다수 국민은 부채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thing 13)
주주 자본주의 시대의 결과 -- 노동자 등 이해당사자의 소득이 이윤으로 재분배된 것도 문제였지만 1980년 이후 국민소득 중 이윤의 비중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음에도 그것이 투자확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thing 13) 국민 총생산 대비 투자 비중은 떨어지고 1인당 국민소득은 증가 추세가 약화되었다. 영국도 이와 유사한 결과를 낳았다. 이렇듯 주주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면 상류층으로의 소득 재분배 문제를 무시한다고 해도 경제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주가치 극대화는 기업에도 이롭지 않았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용을 줄여 임금 지출을 삭감하고, 투자를 최소화하여 자본지출을 줄이는 식으로 비용지출을 최대한 낮추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창출된 이윤은 주주에게 배당하거나 이윤의 일부를 자사주 매입에 사용하여 주가를 높게 유지해야 한다. 주주들은 보유 주식 일부를 내다 팔아 더 많은 자본 이득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자사주 매입은 2008년에는 280%라는 기록을 세웠다. 스톡옵션으로 막대한 양의 주식을 챙긴 전문 경영인도 엄청난 혜택을 누렸다.
주주 가치 극대화가 기업에 끼친 악영향 -- 장기적으로 기업은 고용 삭감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맞는다. 노동력 부족은 노동 강도의 강화로 실수가 잦아져 제품품질이 저하되면서 기업평판이 나빠진다. 끊임없는 해고 위협으로 노동자들이 해당 기업에 특화된 기술을 익히는데 필요한 시간 투자를 꺼리게 되어 궁극적으로 기업의 생산 잠재력을 훼손한다. 배당금을 높이면서 자사주 매입을 늘릴수록 사내 유보이윤은 줄어들고 그에 따라 투자도 감소된다. 투자 위축은 장기적으로 기업의 기술력을 후퇴시켜 기업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문제는 주주들이 기업의 법적 소유주이기는 하지만, 불행하게도 여러 이해 당사자 중에서 기업의 장기적 생존에 제일 관심이 없는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주주는 기업에서 손쉽게 약간 손해를 보고 빠져 나올 수 있다. 반면 노동자나 납품 업체 같은 다른 이해 당사자들은 해당 기업의 요구에 특화된 기술을 축적했거나 설비 투자를 해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해당 기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주주 가치 극대화가 경제전체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해당기업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p.44 ●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아이디어
유한 책임은 주주들의 리스크를 완화해주었고 대규모 자본 축적이 가능하게 만들어 인류의 생산력이 크게 진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주주들은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의 장기적인 미래를 책임질 만큼 믿음직한 후견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주주 영향력 감소 조치 -- 이러한 이유로 많은 나라에서 정부가 핵심 기업들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안정적인 주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소유로서 프랑스의 르노와 독일의 폭스바겐이 있고, 프랑스나 한국처럼 국영 은행을 통해 간접 소유하는 방식도 있다. 스웨덴에서는 주주들이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의 수가 주식의 종류에 따라 다르고, 이를 이용하여 창업자 가족은 기업 경영권을 상당부분 유지하면서도 추가로 자본을 공모할 수 있었다. 주주보다 훨씬 더 장기적 관점에서 행동하는 노동자 대표가 기업경영에 참여하기도 한다. 독일에서 기업의 감사위원회에 노조대표가 참여한다. 일본은 우호적인 기업들 사이의 상호 출자를 통해 부동(浮動) 주주들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있다. 이로서 주주가치 극대화 모델은 약화된다.
이들 나라에서는 장기 전망을 중시하는 이해 당사자들이 기업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영미에서처럼 노동자를 해고할 수 없고, 납품업자를 쥐어짤 수도 없으며, 투자에 소홀한 채 이윤을 수익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에 남용할 수도 없다. 이들 나라의 기업은 영미 기업보다 생존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주주 가치 극대화의 결과 -- GM이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절대 우위를 잃어버리고 끝내 파산한 것은 주주 가치 극대화의 선봉에 서서 다운사이징을 추진하고 투자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부동(浮動)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 잭 웰치가 최근 고백했듯이 주주 가치란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아이디어’이다.
p. 47 thing 0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경제에서는 생산성이 높으면 그만큼 보수를 많이 받는다. 스웨덴 사람과 인도 사람 사이의 임금 50배 차이는 모두 생산성의 차이를 반영한 결과이다. 인도에서 최저임금제를 도입하면 결국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대해 불공평하고 비효율적인 보상을 하게 될 뿐이다. 공평하고 효율적인 보상은 자유로운 노동시장에서만 가능하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임금격차는 개인의 생산성 차이가 아니라 각 정부의 이민정책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라간 이주가 자유롭다면 잘사는 나라의 일자리는 못사는 나라의 노동자들이 차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임금은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것은 가난한 계층 때문이 아니라 부유한 계층 때문이라는 말도 가능하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잘 사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지만,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은 부자 나라의 부자들에 비해 경쟁력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 나라의 부자들은 특별히 잘 나서가 아니다. 그들의 높은 생산성은 단지 역사적으로 축적해 온 다양한 제도들 덕분일 확률이 높다.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개인의 가치에 맞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잘못된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
p.48 ●길을 똑바로 운전하기 대 길로 뛰어드는 소, 달구지, 인력거 등을 피해서 곡예 운전하기
인도의 버스기사 람은 시간당 18루피를 받고 스톡홀름의 기사 스벤은 870루피를 받는다. 자유 시장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스벤의 생산성이 람에 비해 50배가 더 높다는 뜻이 된다. 한 운전기사가 다른 운전기사에 비해 50배 운전을 잘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반면에 스벤은 대체로 앞으로 곧장 가기만 하는 식으로 운전하지만, 람은 거의 쉴 틈 없이 튀어나오는 소, 달구지, 인력거, 하늘 높이 쌓아올린 짐을 싣고 비틀거리며 가는 자전거 등을 피하며 운전을 해야 한다. 따라서 자유시장 논리에 충실하자면 임금을 더 많이 받아야 하는 것은 스벤이 아니라 람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스벤이 ‘인적 자본’, 즉 교육과 훈련을 통해 축적한 기술과 지식이 더 많기 때문에 임금을 더 받아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할지 모른다. 실제로 고등학교를 나온 스벤에 비해 람은 간신히 4~5학년 정도 다닌 것이 전부이고 제대로 글을 읽고 쓸 줄 알면 다행인 학력이다. 그러나 스벤이 7년이나 더 공부하여 추가로 축적한 인적자본은 버스 운전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thing 17) 따라서 인적자본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로는 50배 임금을 더 받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스벤이 람보다 50배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보호주의 덕택이다. 자국 정부의 이민통제 정책 덕인 것이다. 단순 노동자건 전문 기술자건 이민 통제정책으로 인해 자유롭게 스웨덴으로 이민 올 수가 없다. 그 결과 스웨덴의 노동 인력은 같은 일을 하는 인도 사람에 비해 생산성이 높지 않은데도 50배나 높은 임금을 받게 된다.
p.51 ● 방안의 코끼리
부자나라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자국 노동시장에 대한 엄격한 통제, 즉 이민제한 정책에 따라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점을 무시하고 있다. 이민 제한 정책이 소위 ‘자유 시장 경제’라 알고 있는 시스템 속에 시장규제가 얼마나 속속 들이 펴져 있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경제학계에 이민제한 정책이 노동 시장을 방해하는지를 지적하는 일이 거의 없다. 시장의 범위는 정치적으로 결정되며, 시장규제를 옹호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도 ‘정치적’인 것이다. 본인은 이민 제한 정책이 없어져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자유 시장 경제학자가 아닌 것뿐이다.
각 나라마다 어느 부분의 노동 시장에 얼마의 이민자를 받아들일지 결정할 권리가 있고, 문화적 배경이 다른 이민자를 무제한 수용할 능력을 지닌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이민자가 들어오면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지고, 주택, 의료와 같은 물리적, 사회적 인프라에 큰 부담이 생겨 자국인과 이민자 사이에 긴장이 조성된다. 국가적 정체성의 유지도 중요하다. 너무 많은 이민자가 들어오면 사회는 결속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민족적 정체성을 새로 만들어 내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이민자들의 수와 유입 속도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한 사회가 이민자들을 수용할 능력에 한계가 있지만 미리 인구가 고정된 것은 아니다. 이민자에 대한 문호개방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문제는 일정액 이상의 투자금을 들고 오는 사람들에게 이민 허가를 내주는 것과 고학력, 고급기술 소지자를 선호함으로써 개발도상국은 자본부족현상과 두뇌유출을 겪는다.
p.54 ● 가난한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가난한가?
많은 사람들은 즉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은 대부분 자기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무지하고, 게으르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자기나라가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사람의 근면성, 독일인의 시간 엄수, 미국인의 창의성이 없는 것이 가난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한 이유는 빈곤층 때문이 아니라 부유층 때문이다. 스웨덴의 스벤을 비롯해서 많은 노동자들은 어쩌면 인도 사람들보다 숙련 정도가 더 낮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첨단 기업에서 일하는 최고 경영진, 과학자, 엔지니어 등은 인도에서 유사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수백 배 높은 생산성을 내고 있으며 그 덕분에 스웨덴의 국민 생산성 평균이 대충 인도보다 50배가 높아진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은 자기 나라 전체를 왜 끌어 올리지 못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부자 나라의 어떤 개인이 비슷한 일을 하는 가난한 나라의 개인보다 실질적으로 생산성이 월등히 높은 분야에서 조차, 그 격차는 개인의 능력 차이라기보다는 시스템의 차이에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이 머리가 좋다거나 교육을 더 잘 받았다는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조직, 더 나은 제도와 물리적 인프라를 가진 경제 환경에서 살기에 그런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수세대에 걸쳐 축적된 집단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한 개인이 받는 임금은 그의 가치를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이민 제한 정책이 좌우하는 것이다. 부자 나라에서 자신의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 것은 일하는 사회경제적 시스템 덕에 그만큼의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개인의 뛰어난 능력이나 근면성만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시장에 맡겨 두기만 하면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타당하고 공평한 임금을 받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신화에 불과하다. 이 신화를 벗어나 시장의 정치성과 개인 생산성의 집단적 성격을 이해하여야 공평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즉 개인의 재능과 노력뿐 아니라 역사적 유산과 축적된 집단적 노력까지 적절히 고려해서 개인의 노동에 대한 보상이 행해지는 사회가 공평한 사회이다.
p. 57--- thing 04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과 같은 통신기술 혁명은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물리적 거리의 파괴’로 이어졌고, ‘국경 없는 세계’가 출현하면서 국가의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부역할에 대한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이 타당하지 않게 되었다. 국가, 기업, 개인은 기술 혁명 속도에 상응하는 속도로 변화하지 않으면 존망의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이 삼자는 과거보다 훨씬 더 유연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시장 자유화가 필요하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변화를 인식할 때 우리는 가장 최근의 것을 가장 혁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최근의 전자 통신기술상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19세기 후반의 전보만큼 혁명적일 수 없다. 인터넷의 사회경제적 영향은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만큼 크지 않았다. 가전제품은 여성들이 노동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 과거를 돌아 볼 때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아서는 안 된다.
p.58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가정부가 없는 사람이 없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선진국에 비해 가정부를 데리고 있는 사람의 비율이 월등히 높다. 예로써 브라질은 가사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이 미국의 12~13배에 이르고, 이집트는 스웨덴의 1800배 이상이다. 지금의 선진국들도 과거에는 가사노동자로 일하는 사람의 비율이 오늘날의 개발도상국과 거의 비슷했다. 지주계급의 힘이 강해 다른 나라보다 하인 문화가 오랫동안 남아 있던 영국과 웨일즈에서는 그 비율이 훨씬 높았다.
선진국에서 가사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의 비율이 현격히 낮은 주된 이유는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더 비싸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경제가 발전하면 ‘사람’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물건’보다 상대적으로 더 비싸지게 마련이고, 그에 따라 선진국에서는 가사 노동자를 고용한다는 것이 극소수 부자들이나 누릴 수 있는 사치가 되고 말았다. 반면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가사 노동자의 임금이 저렴한 탓에 소득 수준이 중하위권에 속하는 사람들도 가정부를 둘 수 있는 것이다.
p.60 ●세탁기의 등장
세탁기는 가사노동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절약해주었다. 전기세탁기와 전기다리미가 도입되어 노동시간을 엄청나게 단축시켰고, 수도시설은 물을 긷는데 들이는 시간을 필요 없게 만들었다. 진공청소기, 가스레인지, 중앙난방시스템은 필요한 많은 시간을 줄여주었다. 식기 세척기도 인류의 진정한 은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
전기, 수도, 가스와 더불어 가전제품의 등장으로 가사 노동 부담이 줄어들면서 여성들의 삶이 완전히 변화했고, 그로 인해 남성들의 삶도 크게 달라졌다. 1890년대 집 밖에서 일하는 여성의 비율은 불과 몇 %였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80%에 이른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가 늘면서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들의 지위도 확실히 높아졌다. 그 결과 남아 선호 사상이 약해지면서 여성에 대한 교육 투자가 늘어났고, 이것이 다시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를 촉진시켰다. 가정 내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올라갔다. 반면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자녀 양육에 따르는 기회비용이 높아졌고, 그에 따라 자녀수가 줄어들었다. 이런 모든 것이 가족 내의 역할관계를 바꾸었다. 세상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피임약과 피임술의 발달로 출산 시기와 빈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된 것도 여성들의 교육과 노동 시장에 참여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론적으로 세탁기 등 가사노동을 줄이는 여타의 설비와 가전제품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사회나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은 지금처럼 극적일 정도로 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p.63 ●인터넷, 세탁기에 지다
세탁기가 가져온 변화들과 인터넷이 현재까지 이루어 놓은 변화를 비교하면, 인터넷이 생산 분야에서도 그렇게 혁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인터넷으로 웹서핑하고 페이스북으로 채팅하고, 스카이프로 대화를 나누고 원거리의 누군가와 전자게임을 즐기는 것은 모두 인터넷 덕이다. 또 인터넷을 이용하여 보험, 휴가, 음식점에 관한 정보는 물론이고 채소나 샴푸 가격까지 찾아보는 것도 무척 쉬워졌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으로 인해 일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터넷이 생산성에 그다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새로운 기술은 흔히 개발되고 나서 수십 년이 지나야 최대한으로 사용되고, 영향력도 그때가 가장 커진다. 하지만 즉각적인 영향만을 놓고 보면 인터넷이 그렇게 혁명적인 기술인지 회의적이다.
p.64 ●인터넷, 전보에게도 지다
1866년 대서양을 잇는 전보 서비스가 개통되기 전에는 대서양을 건너 소식을 전하는 데에는 3주 정도 걸렸다. 하지만 전신 서비스가 보급되면서 7~8 분이면 될 정도로 시간이 대폭 단축되었다. 1861년 12월4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에이브라햄 링컨 대통령의 연두교서는 92분 만에 미국전역으로 전송되었다고 한다. 전보의 발명으로 인해 대서양을 건너 소식을 전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이 2주일에서 7~8분으로 줄었으니 2500배가 넘게 빨라진 것이다.
인터넷의 전송속도는 팩스에 비해 100배 빨라진 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전신 서비스가 이룩했던 2500배 단축기록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사진을 빠른 속도로 보내는 일은 인터넷만이 할 수 있고, 전보와는 달리 우체국 외의 다른 곳에서도 접속이 가능하다. 또한 다양한 정보와 자료를 검색할 수 있다. 그러나 순전히 속도의 혁명이라는 점에서는 인터넷은 그 보잘 것 없는 전보에도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이미 1944년에 ‘물리적 거리’가 파괴되고 국경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흥분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바 있다.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호들갑을 떨게 만든 기술은 다름 아닌 비행기와 라디오였다.
p. 66 ●변화를 큰 그림 안에서 이해하기
일부 선진국들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 기술 혁명을 중시하여 ‘구닥다리’제조업은 필요 없고 아이디어만 있으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했다. 그에 따라 ‘탈산업사회’의 시대가 왔다고 믿고 제조업을 홀대하여 자국경제를 약화시켰다.
선진국 사람들은 인터넷에 매료되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정보 격차(digital divide)가 커지게 되자, 많은 단체와 개인들은 개발도상국에 컴퓨터와 인터넷 설비를 갖추라고 하면서 많은 돈을 기부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 격차 해소가 개발도상국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우물을 파주고, 전기를 넣어 주며, 세탁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개발도상국 생활을 개선하는 데에 더 보탬이 된다.
통신 및 운송 기술상의 혁명적 변화 덕분에 ‘국경 없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각국 정부 역시 국경 없는 세계의 도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본과 노동, 상품에 대해 반드시 가해야 할 규제마저 일부 철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다. 최근의 기술 변화는 100년 전에 있었던 변화만큼 혁명적이라고 할 수 없다. 사실 100년 전의 세계는 1960~1980년에 비해 통신과 운송부문에서의 기술은 훨씬 뒤졌으나 세계화는 월등히 진전된 상태였다. 1960~1980년의 힘센 나라의 정부들은 자본, 노동, 상품이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것에 엄격하게 규제를 가하였다. 이 점에서 세계화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이지 기술이 아니다. 이 점이 인식의 초점이다.
최근의 것에만 사로잡혀 이제는 보편화된 것들을 저평가할 경우 과거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러 가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자본주의 경제하에서 기술력이 경제발전이나 사회발전에 미치는 영향은 훨씬 더 복잡하다.
p.69 thing 05 최악을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은 오직 이기적인 사람들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아울러서 사회적 조화를 만들어 내는 기능을 한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은 모든 사람이 이타적 내지는 자기희생적으로 행동한다는 전제하에 경제 체제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경제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 즉 사름들이 항상 최악의 행동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이기심은 대부분의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본성 중의 하나이지만, 유일한 본성도 아니고 많은 경우 인간행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도 아니다. 세상이 지금처럼 돌아가는 이유는 인간이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믿듯이 전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되 인간의 다른 본성도 모두 활용하고 사람들이 최선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제도를 추구해야 한다. 결국 최악의 행동을 기대하면 최악의 행동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p. 70 ●회사를 잘(못) 경영하는 법
1990년대 중반 무렵 세계은행이 일본에서 개최한 ‘동아시아 경제기적’이라는 주제의 회의를 열었다. 논쟁은 정부개입이 동아시아 경제 성장에 큰 몫을 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과 정부개입은 경제성장과 전혀 관계가 없거나, 심한 경우 득보다 실이 많은 정책이었다고 주장하는 세계은행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졌다. 세계은행 측은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정책을 만드는 정부 관료들도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개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국가 이익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위신을 확장하는데 더 신경을 쓴다고 말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정부개입이 성공을 거둔 이유는 이기심이 없고 능력 있는 정부 관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고베 철강의 주역이라는 사람은 “자신은 회사규모가 너무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반 정도 이해한다면 다행이고, 다른 분야의 임원들도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사회에서는 직원들이 올린 사업계획을 대부분 받아들이는 이유는 직원들이 회사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가정하고 직원들의 동기를 사사건건 의심하기만 한다면 회사는 마비되고 말 것이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업계획을 검토하려고 애만 쓰다가 말테니까. 고베철강이든 정부든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고 전제하면 대규모 관료기구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여러 본성 중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이기심뿐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주류 경제학이론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p.72 ●이기적인 정육점 주인과 탐욕스러운 빵집 주인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바, 자유 시장 경제학은 모든 경제주체가 이기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탐욕, 이기심과 같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본성을 사회에 이롭고 생산적으로 바꾸는 것이 시장 시스템의 장점이라고 주장한다. 항상 바가지를 씌우고자 하는 상점주인은 가까운 곳에 경쟁 상점이 있으면 바가지를 씌우지 못할 것이고, 농땡이를 치고자 하는 노동자는 자기 일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있어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을 터이고, 또 주식 시장이 활발한 환경에서는 고용 사장들도 주주들의 돈을 떼어먹지 못한다. 이윤을 적게 남기면 주가가 떨어지고, 그러면 인수 합병 등을 통해서 자신의 일자리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공직자, 즉 정치인과 정부 관료들은 시장 원리에 따르지 않아도 됨으로 이들이 사리사욕을 챙기기 시작하면 효과적으로 제어할 방법이 없다. 정치인들은 서로 경쟁을 하지만 어쩌다 하는 선거의 제어 효과는 미미하다. 따라서 국가이익을 희생해서 자신의 부와 권력을 늘리는 정책을 추진할 여지가 많아진다.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는 기회는 직업 관료들이 더 많다. 직업 관료들이 자기 뜻대로 정책을 조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직업 관료들은 고용보장이 잘 되어 있고, 일의 진행을 지연시켜 명령을 내리는 정치인이 바뀌기를 기다릴 수도 있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이런 이유에서 정치인과 관료들이 경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범위를 최소화해야 하며, 탈규제와 민영화는 경제적 효율을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공직자들이 일반 대중을 희생해서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신공공관리학파(npm school)는 한 술 더 떠서 정부의 운영자체까지 시장의 힘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서비스의 민간위탁을 강조한다.
p.74 ●우리가 천사는 아니지만---
모든 인간이 자기 이익만을 취한다는 전제를 논리의 기초로 삼고 있는 자유 시장 경제학에서 하는 이야기는 실제로 우리가 경험한 바이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경제 활동을 하는데 이기심만이 유일한 동기가 아니라는 것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도 수없이 많다. 이기심이 가장 중요한 동기일지 몰라도 유일한 동기라 할 수는 없다. 정직성, 자존심, 이타심, 사랑, 연민, 신앙심, 의무감, 의리, 충성심, 공중도덕, 애국심 등은 모두 우리의 행동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고베 철강 등 성공적인 기업들은 의심과 이기심보다는 신뢰와 충성심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서구에서 성공한 기업가의 자서전 어디에도 직원들이 농땡이를 부리고 속임수를 쓸 경우에 대비해 감독을 철저히 하라는 말은 없다. 아마 대부분이 어떻게 직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이 사물을 보는 시각을 바꾸고, 비전을 제시하고, 팀워크를 다질 수 있는지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을 것이다. 좋은 경영자는 사람이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편협한 시각의 로봇이 아님을 안다. 그는 또 사람마다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는데, 좋은 경영의 비밀은 직원 개개인의 좋은 면을 최대한 살리고, 나쁜 면을 바꿔나가는데 있다는 것도 안다.
인간행동 동기의 복잡성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는 ‘규칙대로 일하기’라는 합법적 파업 수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두 철저히 규칙을 준수해서 작업에 드는 시간을 늘리는 투쟁방법이다. 이 방법은 생산량을 30~50% 까지 떨어뜨린다. 이것은 규칙 외의 임무도 수행하고 가외의 일도 해내고, 임무를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 주체적 결정도 내리고, 규칙이 너무 복잡할 경우 지름길도 알아서 택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회사를 경영하는 탓에 벌어지는 일이다. 피고용자들이 평상시에 이렇게 이기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하는 동기는 일에 대한 애정, 자기 기술에 대한 자부심, 자존심, 동료들과의 결속력, 경영진에 대한 신뢰, 애사심 등으로 다양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유 시장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완전히 이기적으로만 행동하면 기업들, 더 나아가서 사회전체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량생산 시대 초기의 자본가들은 작업속도와 강도를 조절할 여지를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는 컨베어 벨트를 도입하면 일을 게을리 할 수 없기 때문에 생산성이 극대화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율성과 존엄성을 빼앗긴 노동자들은 얼마 가지 않아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일을 했고 심지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 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 기업과 노동자,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강조하는 인간관계학파가 등장하여 인간의 행동 동기의 복잡성을 강조하고 노동자들의 좋은 면을 극대화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는 경영 관리 기법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도요타 방식은 일본식 생산방식이다. 이 방식은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부여하고 각 개인을 도덕적 주체로 신뢰함으로써 개인이 선의와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북돋운다. 노동자들에게 생산 라인 관리에 상당한 권한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생산 공정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는 것 또한 장려한다. 이 방식은 성공적이었다.
p.77 ●도덕적 행위는 착시 현상에 불과하다?
세상은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의 전제에 어긋나는 도덕적 행위들로 가득하지만 그들은 대개 이를 착시 현상으로 치부해버린다. 그것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보상과 제재에 반응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인데,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경쟁자에게 고객을 뺏길 염려가 없는 상황에서도 상인이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것은 굳이 정직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직하다는 소문이 나면 손님들이 더 올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관광지에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사람이 고향에 돌아가면 행동을 조심하는 이유도 집에 가면 갑자기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거기서 행동을 잘못하면 자기를 알고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흉을 잡히고 따돌림 당할까 두려워서 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는 맞는 구석이 있다. 세상에는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보상과 제재 장치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미묘한 보상과 제재가 없을 때에도 사람들은 대부분 정직하게 행동한다. 잘 달리는 사람이 택시 요금을 내지 않으려 도망하지 않는다. 외국 여행하다 만난 자동차 정비공이나 노점상이 우리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도덕적 행위가 착시현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는 보이지 않는 보상과 제재 장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가 이기적이고 무도덕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도덕성은 착시 현상이 아니다. 고객을 속이지 않는 상인,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쥐꼬리 월급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받지 않는 공무원 등 사람들이 이기적이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보상과 제재 장치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우리가 하는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가 없다.
“사회공동체라는 것은 없다. 오직 남자, 여자라는 개인, 그리고 가족 단위만 존재할 뿐이다.”라는 대처 여사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은 사회라는 울타리 없이 고립된 이기적 존재로 살아 온 적이 없다. 우리 모두는 도덕적 규범이 형성되어 있는 사회 안에서 태어나 그 규범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한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간 행동의 동기 중의 하나이지만, 이러한 전제를 기반으로 경제 구조를 설계하면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떨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도덕적 주체로 신뢰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고, 결과적으로 도덕적 행동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을 감시, 판단, 제재하는데 엄청난 자원을 들여야 한다.
사람들이 최악의 행동을 할 것이라 예상하면 결국 최악의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p.81 thing 06 거시 경제의 안정은 세계 경제의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플레이션이 치솟았다. 이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은 투자의 부진과 결과적인 성장 둔화를 가져왔다. 다행히도 199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길들이는데 성공했다. 정부 예산적자를 더 엄격히 다스리고, 중앙은행을 독립시켜 인플레이션 억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경제안정이 장기 투자와 경제 성장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플레이션이라는 맹수를 길들인 것은 장기 번영의 초석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인플레이션은 길들였으나 세계 경제는 상당히 더 불안해졌다. 우리는 물가변동을 잡았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극도로 불안정한 경제 상황을 못 본 척했다. 과도한 개인 채무, 파산, 실업 등으로 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했던 2008년의 금융위기도 그 한 예이다. 인플레이션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우리는 완전고용이나 경제성장 같은 중요 문제에 신경 쓰지 못했다. ‘노동 시장 유연성’으로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있다. 물가 안정이 성장의 전제 조건이라고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을 잡았음에도 성장률은 미미했다. 바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성장을 둔화시켰기 때문이다.
p.82 ●돈이 있는 곳이 바로 거기니까 정말 그럴까?
1923년 1월 프랑스와 벨기에 군은 1차대전 종전 협정의 미이행을 이유로 패전국 독일의 석탄과 철강 산지인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독일은 부채 상환을 1922년 한 해 동안 하지 못했던 것이다. 1922년 여름 이후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극도로 높아져서 생활비 지수가 16배나 오를 정도였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무리한 배상금 요구도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요인이었다. 두 나라는 가치가 한없이 떨어지는 종이쪼가리보다는 석탄과 철강 같은 실물 배상금을 확보하는 것이 낫다고 보고 루르 지역을 점령한 것이다. 1923년 11월 새로운 화폐 랜덴마르크가 도입되기 까지 100억배가 뛰었다.(정확히 100억배이다.)
독일의 이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주의 체제에 불신을 키우고 나치세력의 등장을 불러왔다. 이는 나아가 2차 세계대전을 부른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이었다. 이러한 아픈 상처를 잊지 못했는지 2차 대전 후 설립된 서독 중앙은행 분데스방크는 통화팽창 정책을 지나치게 피한다는 평판을 얻었다.
유럽 제국이 유로화를 채택한 후에도 유럽중앙은행(ECB)은 분데스방크의 영향을 받아 높은 실업률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긴축통화정책을 고수했다. 이런 행태는 2008년 세상을 휩쓴 금융 위기로 말미암아 모든 중앙은행이 전례 없는 통화 완화 정책을 감행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렇듯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거의 1세기 동안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p.84 ●인플레이션은 얼마나 나쁜 것일까?
과거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독일이고, 현대의 대표주자는 아르헨티나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20,000%밖에 되지 않았다. 독일보다 더한 인플레이션은 2차 대전 이후 헝가리와 무가베 대통령 독재 정권 말기인 2008년 짐바브웨에서 일어났다. 1923년 독일의 물가가 두 배로 뛰는데 4일이 걸렸으나 헝가리의 물가는 1946년 매 15시간마다 두 배로 뛰었다. 이렇듯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은 불가능해진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정치적 재난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한다.
1980년대 이후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0%의 낮은 인플레이션을 권장하였고 1990년 IMF는 ‘권장 물가상승률’로 1~3%를 제시하였다. 시카고 대학이나 IMF의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행한 연구에서도 인플레이션이 8~9% 이하일 경우 국가 경제성장과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60~70년대 동안 브라질의 평균 인플레이션은 42%였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연평균 4.5%였고 같은 기간 한국은 연평균 20%의 물가상승률에도 1인당 국민소득이 7%씩 성장했다.
여기에 더해 과도한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이 사실은 경제에 해롭다는 증거도 있다. 브라질은 상당히 높은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후 1996년부터 실질금리(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차감한 수치)를 세계 최고로 연 10~12%로 높여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연간 7.1%로 물가상승률이 떨어졌다. 그러나 경제도 둔화되어 성장률이 연간 1.3%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금리를 높였으나 경제성장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정책이 도가 지나칠 경우 투자가 감소하고 결과적으로 성장을 둔화시키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태도를 고수하면서 경제가 안정되면 저축과 투자가 늘어나고 이는 결국 경제 성장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2~3% 이하로 끌어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정책들이 실제로는 투자를 저해하는 부작용을 낳았다.(한국은 인플레이션 속에서 경제성장을 하였다.)
실질금리가 8~12%에 달하면 투자자들은 실물투자를 꺼린다. 7% 이상의 이윤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의 유일한 방법은 고위험, 고수익의 금융자산에 투자하는 것뿐이다. 실물 부문에 대한 장기 투자로 뒷받침되지 않는 금융 투자는 2008년 금융위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사상누각일 뿐이다.(thing 22)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득보다 실이 많은 과도한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감을 이용해왔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은 투자와 성장을 저해했을 뿐 아니라 원래 목표, 즉 경제 안정을 공고히 하는 것조차 실패했다.
p.87 ● 안정이라는 착각
1970~80년대와 1990~2008년 동안을 비교할 때 부자나라들은 인플레이션과의 투쟁에서 특히 큰 성공을 거두었다. 부자 나라는 경제가 더 안정적인 된 것이다. 세상이 안정적이 되었다는 말은 사실 경제적 안정성을 측정하는데 낮은 물가상승률을 유일한 척도로 사용했을 때에만 성립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느끼는 안정과는 거리가 있다.
강력한 인플레이션 억제책이 채택된 지난 30년간 세상이 더 불안정해졌다고 느끼는 원인 중 하나가 금융위기가 더 자주 그리고 더 심하게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일부 교수들의 연구 결과 2차 대전 종전 직후부터 1970년대 사이에 금융위기를 겪은 나라는 거의 없었다. 이 기간은 인플레이션 측면에서만 보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불안정한 시기였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들어 금융위기를 겪은 나라의 비율은 20%로 치솟는다. 인플레를 잡고 경제적 안정을 달성했음에도 말이다. 이 비율은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35%가 되었다.
지난 30년 사이에 세상이 더 불안정했다는 느낌을 주는 또 하나는 고용이 크게 불안정해졌다는 점이다. 개발도상국의 고용불안은 특히 문제가 되는데 ‘비공식 부문’의 불안정한 일자리의 비율이 이 기간에 특히 많이 늘었다. 이는 섣부른 무역 자유화로 산업 분야의 안정된 ‘공식’ 일자리가 많이 없어진 결과이다. 선진국들도 1980년대에는 인플레 억제를 위한 긴축 정책 때문에 실업이 크게 늘었다.
이러한 원인은 첫째, 엄청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단기 고용의 비중이 높아졌다. 둘째, 미국을 비롯한 일부 나라에서 비자발적 고용 종료, 다시 말해서 노동자가 원하지 않는데도 직장에서 떠나야 하는 비율이 늘었다. 셋째,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는 1980년대까지는 안정적이었던 관리, 사무, 전문직 일자리들이 1990년대 이후 불안해졌다. 넷째, 고용안정성이 유지된다 해도 일의 성격과 강도가 자주 그리고 심하게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다섯째, 부자나라들이 1980년대 이후 복지 예산을 삭감했기 때문에 실직할 확률이 높아지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 심해졌다.
사람들은 물가 불안정보다 일자리를 잃거나, 하는 일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 혹은 금융 위기가 몰아닥쳐 집을 압류당하는 것들이 더 크게 불안정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잡혔음에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물가 안정과 잦은 금융 위기, 고용 불안 증대 등이 공존하는 것은 모두 동일한 자유 시장 정책의 산물이다.
앞선 연구의 결과 금융 위기와 자유로운 국제적 자본 이동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자본의 자유로운 국제적 이동을 또 하나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thing 22) 이에 따라 자유 시장주의자들은 모든 나라에게 자본 시장을 개방하라는 압력을 꾸준히 가해 왔다.
고용불안이 커진 것도 자유 시장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1980년대 선진국의 고실업의 고용 불안 현상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긴축적 거시 경제정책을 추진한 결과였다. 1990년대부터 2008년의 금융위기 사이에 고용종료와 단기 고용의 증가, 일의 고강도가 나타났다. 모두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서 경제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겠다는 의도로 노동 시장에 대한 규제를 변화시켰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상통하는 자유 시장 정책들은 낮은 인플레이션, 자유로운 자본 이동, 그리고 노동유연성이라는 높은 고용 불안정성 등을 중시한다. 기본적으로 금융 자산 보유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다. 인플레 억제를 강조하는 것은 금융자산의 수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금융 자산은 물적, 인적 자산보다 신속한 이동성 덕분에 다른 자산에 비해 더 높은 이윤을 낼 수 있다. 금융 자산은 바로 이런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의 이동성을 강조한다.(thing22)
한편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금융투자자의 입장에서 볼 때, 고용과 해고 절차를 쉽게 하면 기업 구조조정이 용이해 당장 좋은 대차대조표를 만들 수 있고, 이로써 기업매매가 원활해져 높은 금융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가 안정의 정책들이 금융 불안과 고용 불안정을 증대시켰더라도 경제 성장을 가져오기만 했다면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및 1970년대와 비교해 볼 때, 1980년대 이후 낮은 인플레의 상황에서 세계 경제는 훨씬 더디게 성장했고 투자가 감소하였다. 1990년대 이후 인플레를 완전히 잡는데 성공한 선진국에서조차 1인당 소득 증가율은 1.4%로 떨어졌다.(1960~70년대는 3.2%)
종합적으로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낮은 인플레와 경제 안정이 투자를 불러 일으켜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으로 이어 지지 않았으며, 인플레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려는 시도는 투자와 성장을 위축시켰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인플레가 낮아졌어도 대부분이 경제적 안정을 맛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자유 시장 정책 패키지의 근간인 자본과 노동 시장의 자유화는 금융 불안과 고용 불안정을 초래해서 불안정한 세상을 만들었고, 이 정책이 약속했던 이른바 ‘성장 촉진’마저 실현하지 못했다. 인플레를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p.94 thing 07 자유 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개발도상국들은 국가 개입정책을 써서 경제발전을 추진했고 사회주의를 표방한 나라까지 있었다. 개발도상국들은 보호무역, 외국인 직접 투자 금지, 산업보조금, 국영은행, 국영기업 등의 인위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철강이나 자동차 산업과 같은 자국의 능력을 벗어나는 산업들을 육성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결과는 경제 침체, 경제적 재앙을 맞이하였다. 성장률은 미미한 수준이고 심지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 정신을 차리고 자유 시장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일본(한국 포함)을 제외한 모든 선진국들은 자유 시장 정책, 특히 전 세계를 상대로 자유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되었다. 최근 들어 이 정책을 더 적극적으로 취한 개발도상국일수록 더 좋은 성적을 올렸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정반대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실적은 국가주도 시절이 시장 지향적 개혁을 추진할 때보다 훨씬 나았다. 국가개입이 실패로 끝난 경우도 없지 않지만, 이들 중 대부분이 시장 지향적 개혁 기간보다 과거에 훨씬 더 빠른 성장과 고른 분배를 이루었고 금융 위기도 훨씬 적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이 자유 시장 정책 덕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진실을 그 반대이다. 현재 잘살고 있는 영국과 미국은 모두 보호무역과 정부 보조금을 통해 오늘날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자유 시장 정책을 써서 부자가 된 나라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
p.95 ● 심란한 사례 두 가지
다음 두 가지 사례를 평가해보자
A국: 10년 전까지 보호무역정책을 사용해서 공산품 관세가 30% 이상이고, 최근 관세는 낮추었지만 가시적, 비가시적 무역규제는 많이 남아있다. 자본 유입도 심한 제약이 따르고, 국영 은행들로 금융권이 이루어져 있으며, 외국인에게는 금융자산 보유를 제한한다. 자국 내 외국 기업들은 세제와 법률의 차이로 불평을 한다. 이 나라에는 선거도 없고,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재산소유권 규정도 불투명하고 지적 소유권에 대한 보호는 형편없어서 이 나라는 해적판이 판을 친다. 많은 국영기업들은 엄청난 손실에도 정부보조금과 독점권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
B국: 과거 오랫동안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추진한 이 나라의 평균 관세율을 40~50%에 달한다. 국민 대부분은 선거권이 없고 부정선거가 판을 친다. 부정부패와 정당의 매관매직이 비일비재하며 공개경쟁으로 공무원을 선발한 적이 없다. 공공재정은 위태롭고 채무를 갚지 않는 경력도 있어서 외국 투자자들은 마음을 놓지 못한다. 이 나라는 외국인 투자자들을 심하게 차별하여 은행에서 외국인은 이사가 될 수도 없고, 외국거주 외국인은 주주 의결권도 없다. 경쟁법이 없어서 독점이 팽배하다. 외국인의 저작권은 아예 보호가 되지 않기로 악명이 높다.
이 두 나라는 모두 경제발전 저해요인이 넘쳐난다. 철저한 보호 무역, 외국인 투자자 차별, 강력하지 못한 재산권 보호, 열악한 민주주의, 부정부패, 실력보다 연줄이나 자금력이 중시되는 분위기 등이다. A국은 현재 중국이고 B국은 미국이라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B 나라는 현재 중국보다 더 가난했던 1880년 미국이다.
이른바 성장에 해로운 제도와 정책으로 중국은 지난 30년간 가장 역동적이고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1880년대 미국 또한 가장 빠르게 성장하여 세계 최부국이 되었다. 그들은 과거 현대 신자유주의 자유시장 독트린을 완전히 역행하였다.
p.98 ●죽은 대통령들은 말이 없다.
미국 사람들은 달러 지폐를 ‘죽은 대통령’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폐에 얼굴이 실리는 영광은 비단 미국 대통령들에게만 돌아간 것이 아니다. 100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대통령이 된 적이 없었다.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10달러 지폐에 나오는 알렉산더 해밀턴은 1789년 33세에 재무장관이 되어 현대 미국 경제시스템을 설계한 인물이다. 그는 『제조업 분야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의회에 제출했는데, 그 핵심은 보호무역주의적 주장이었다. 그를 포함하여 ‘죽은 대통령’들은 모두 하나같이 미국재무부, IMF, 세계은행, 그리고 자유 시장 신앙에 돈독한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며 엄청나게 비난 받았을 것이다.
1달러 지폐에 나오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미국제 옷을 입겠다고 고집했다. 당시 훨씬 질이 좋던 영국제 옷감이 아니라 그날을 위해 특별히 코네티컷에서 직조된 옷감으로 지은 옷을 입은 것이다. 이는 WTO로부터 정부조달 투명성에 관한 규정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해서 말썽이 났을 수도 있다.
5달러 지폐에는 남북전쟁 당시 관세를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렸던 보호 무역주의자 에이브러햄 링컨이 등장한다. 50달러 지폐는 율리시스 그랜트가 나오는데, 그는 남북전쟁의 영웅으로서 대통령이 된 후 자유무역을 하라는 영국의 압력에 맞서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200년 정도 보호 무역을 해서 거기서 얻을 있는 장점을 다 취한 후 미국도 자유 무역을 할 것이다.”
2달러 지폐에 나오는 토머스 제퍼슨과 20달러 지폐의 앤드루 잭슨은 미국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수호성인들이었다. 잭슨 대통령 집권 당시 미국의 공산품 관세는 평균 35~40%였다.
죽은 대통령들은 말이 없다. 노예 노동에 의존했던 2류 농업 국가를 세계 최강의 산업 부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자신들이 사용했던 정책들은 21세기 후손들이 신봉하는 정책들과 정반대였다.
p.102 ●내가 했던 대로 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하라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미국이 보호주의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고 보호주의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고 반박한다. 풍부한 천연자원, 야심차고 근면한 이민자들, 내수시장 규모의 거대함으로 국내 기업 간 경쟁이 보호 무역주의로 인한 부작용을 상쇄했다는 것이다.
이 반박은 자유 시장 독트린에 반하는 정책을 써서 성공한 나라가 미국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현대 선진국의 대부분은 미국과 같은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다. 미국은 거대한 내수 시장 덕을 봤을지 모르지만, 손바닥만한 핀란드와 덴마크의 성공은 무엇인가? 미국이 풍부한 천연자원 덕을 봤다면 한국과 스위스는 무엇인가? 미국이 재능 있는 이민자를 받아들여 경제발전을 했다면 재능인을 빼앗긴 독일과 타이완은 무엇인가?
보호 무역을 실시한 미국의 해밀턴은 사실은 1721~1742년 영국의 대영제국 수상 로버트 월폴에게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영국은 18세기 중반에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주도했던 당시의 하이테크 산업이었던 모직 산업에 진출했다. 영국의 모직 제조업자들은 월폴이 제공한 관세, 보조금 등의 정부 지원을 받아 성장했고, 모직물은 영국의 주요 수출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산업혁명에 필요한 식량과 원자재를 사는데 사용되었다. 확실한 우위를 확보한 1860년에야 이르러서야 영국은 비로소 자유 무역을 시작했다. 미국이 1830~1940년 동안 경제도약기에 가장 보호주의적인 정책을 폈듯이, 영국은 1720년~1850년대 사이에 가장 보호주의적인 나라의 하나였다.
현대 선진국 중 유치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 무역과 보조금 정책을 사용하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다. 일본, 핀란드, 한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싱가포르, 타이완 등이 그렇다.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1차 대전전의 스위스, 홍콩 등은 보호무역 정책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조차 특허가 인위적 독점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20세기 초까지도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홍콩은 더욱 지적 소유권을 침해해 왔다.
오늘날 선진국들이 보호주의, 보조금, 규제, 산업의 국유화 등 자유 시장주의와 반대되는 정책을 다 가져다 쓰고도 선진국이 된 것은 의아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런 정책들이 당시 그 나라들의 경제 상황에 적절한 좋은 정책이었던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가 자녀들을 노동시장에 내몰아 성인들과 경쟁하도록 하지 않고 학교에 보내는 것처럼, 개발도상국은 자국의 기업들이 도움 없이도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능력을 갖출 때까지 유치산업을 보호해야 한다. 둘째, 경제발전의 초기단계에서는 운송수단의 미비, 정보의 불통, 큰손이 조작하기 쉬운 작은 규모 등의 이유에서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말은 정부가 시장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의도적으로 시장을 형성해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셋째, 초기 단계에서는 정부가 국영기업을 통해서 대규모, 고위험 프로젝트를 맡아야 한다. 민간 기업이 그러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개발도상국이었을 때는 쓰지 않았던 정책들을 그들에게 요구하는 행태는 “내가 했던 대로 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하라”와 같다.
p.106 ● 성장을 감소시키는 성장 지향 정책
부자 나라들의 역사적 위선을 지적하면 자유 시장주의자들은 19세기 미국이나 20세기 중반의 일본은 보호주의와 정부개입정책이 유효했을지 모르나, 1960년~ 1970년대에 그런 정책을 채택했던 개발도상국들은 실패했다. 현대에는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개발도상국들은 보호주의와 정부개입정책을 썼던 1960년~70년대에 경제 성장 성적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간의 성장률이 개방과 탈규제를 추진했던 1980년에 보다 훨씬 나았다.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은 심화된 불평등에 더해 극심한 경제 성장률 하락을 경험했다. 1960~70년대 3%이었던 1인당 국민소득 증가율은 자유 시장 개혁이 진행된 1980~2000 동안 1.7%로 떨어졌다. 1980~2000년 기간 평균 성장률은 2.6%로 올랐으나 이것은 주로 인도와 중국의 급속한 성장이 주된 원인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두 나라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처방을 따른 라틴 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은 ‘어두운 과거’ 시절보다 훨씬 열등한 성장률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은 제대로 작동한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부자나라들도 자신이 개발도상국이었을 때 이 정책을 쓰지 않았다. 지난 30년 동안 이 정책을 도입한 개발도상국들은 성장률 둔화와 수입 불균형 등의 부작용을 떠안아야 했다.
p.108 thing 08 자본에도 국적은 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화의 주인공인 초국적 기업들은 자국의 국경을 벗어나 해외로 진출한 기업들이다. 본사는 본국에 있지만 생산과 연구 시설은 대부분 해외에 있고, 최고 경영진을 포함해서 많은 직원을 외국인으로 채용한다. 이처럼 국적이 없어진 외국자본에 대해 어떤 나라가 민족주의적 정책을 쓰면 초국적 기업들이 그 나라에는 투자를 하지 않게 된다. 결국 국가 경제를 헤치는 결과는 낳는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점점 증가해가는 초국적 기업들은 사실상 해외지사를 둔 ‘단일 국적 기업’으로 남아있다. 핵심 기술 개발이나 전략 설정 등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대부분 본국에서 이루어지고 최고 경영진도 일반적으로 본국 국적을 지닌 사람들로 채워진다. 공장 문을 닫거나 일자리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오면 여러 정치경제적 이유로 본국의 공장과 일자리를 가장 나중에 없앤다. 이 말은 초국적 기업의 혜택 대부분은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기업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 국적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의 국적은 분명히 존재한다.
p.109 ●세계화의 화신 카를로스 곤
카를로스 곤(Carlos Ghosn)은 1954년 브라질에서 태어난 레바논 계이다. 여섯 살 때 레바논 베이루트로 가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최고 명문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에콜 데 민 드 파리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1978년 프랑스의 타이어 제조업체인 미쉐린에 입사해 18년을 근무하면서 적자를 면치 못하던 남미 지사들의 경영을 정상화시키고, 미국 자회사와 유니로열 굿리치의 합병을 성사시켜 미국 사업 규모를 두 배로 키우는 등 실력 있는 경영자로 명성을 쌓았다.
1996년 프랑스 국영 자동차 회사 르노로 자리를 옮겨 무자비한 비용절감을 단행하여 르노를 회생시켰다. 1999년 적자의 늪에 빠진 닛산을 인수한 르노는 카를로스 곤을 일본에 보냈다. 직원 해고 등을 단행하여 닛산을 완전히 정상화시켰다. 그의 라이프 스토리는 세계화라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자본의 국적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드려 지는 근거가 되고 있다. 스위스의 식품회사 네슬레의 본사는 스위스에 있지만, 스위스에서 생산되는 네슬레 제품은 전체 생산량의 5%에 불과하다.
이제는 초국적 기업들이 생산 이외에도 연구개발과 최고 레벨의 업무도 본국 밖으로 옮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결과 초국적 기업들은 특정 나라에 대한 소속감에서 자유로워져서, 공장 문을 닫고, 일자리를 없애고,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한다 해도 회사의 이익을 내는 일이면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단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자국 국경 안에서 부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이라면 그 기업의 주인이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기업들이 이윤을 낼 기회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고자 하는데 외국기업의 투자를 까다롭게 만들어 놓으면 그 나라에서 투자 기회를 찾는 외국 기업이 줄 수 있는 혜택을 놓치고 만다는 것이다.
p.112 ●크라이슬러- 미국기업, 독일기업, 다시 미국기업..이제 곧 이탈리아 기업?
1998년 독일 자동차 회사인 다임러-벤츠는 미국의 크라이슬러와 합병했다. 두 기업은 동등한 결합이라는 형식으로 임원진도 똑같은 숫자의 미국인과 독일인이 포진했으나 사실은 다임러-벤츠가 크라이슬러를 인수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인 이사 수가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했다. 이 인수는 성공적이지 못해서 2007년 다임러-벤츠는 크라이슬러를 미국의 사모펀드 서버러스에 팔아넘겼다. 19.9%의 지분을 유지하면서 다임러 대표들이 몇 명 남아 있기는 했지만 크라이슬러 임원진은 곧 미국인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서버러스는 회사를 되살리지 못하고, 크라이슬러는 2009년 파산하고 말았다. 이후 미국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과 이탈리아 피아트의 대규모 주식 매수에 힘입어 크라이슬러는 구조 개편을 거쳤다. 피아트는 크라이슬러의 CEO를 차지하고 피아트 임원 한명을 이사회에 투입했다. 앞으로 피아트가 소유 지분을 우선적으로 가진다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탈리아인 이사 수가 늘어날 전망이다.
한때 미국 대표기업의 하나였던 크라이슬러가 지난 10년간 독일 소유에서 미국인 소유로 바뀌었다가 다시 이탈리아 소유가 되어 가고 있다. ‘국적 없는’ 자본은 없다. 미국 기업도 외국인이 인수하면 외국인 손에 운영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초국적 기업은 사실상 최고 의사 결정권자들은 본국인들이 하게 되어 있다. 인수기업의 입장에서는 고위 간부들을 인수된 기업에 직접 파견해야 효율성이 오르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자국 편향은 최고 경영진의 임명 뿐 아니라 기업 경쟁력의 핵심인 연구개발부문도 자국 편향이 대단히 심하다. 연구개발은 대부분 본국에서 행해진다. 최근 중국, 인도와 같은 개발도상국에 세우는 연구개발 센터의 수가 증가하고 있지만, 이 센터들에서는 주로 낮은 수준의 연구개발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기업은 해외이전이 용이한 생산 부문마저 본국에 확고한 생산 기반을 가지고 있다. 네슬레는 예외적이지만, 미국에 기반은 둔 초국적 기업들의 해외생산량은 전체의 1/3을 넘지 않는다. 일본 기업들의 해외 생산량 비율은 10%도 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진정으로 초국적인 기업은 거의 없다. 대다수는 대부분이 본국에서 생산한다. 특히 전략적 의사결정이나 고급 연구개발 활동은 본국에서 이루어진다. 국경 없는 세계라는 표현은 엄청나게 과장된 표현이다.
p.115 ●자국 편향은 왜 생기는 것일까?
자유 시장론자들은 자본의 국적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는 마당에 애국심 같은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맑스주의자들도 이에 동의하는데 자본은 보다 많은 이윤을 위해, 그리고 확대 재생산을 위해 자발적으로 국경이라는 한계는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은 경영진의 감정 때문에 자국 편향적이 된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이기심 이외의 모든 동기는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일축하지만, ‘도덕적’ 동기는 실제로 존재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thing 5)
경영진의 개인적 감정에 더해 기업들은 직간접적으로 공공 자금의 지원을 받으며, 설비투자나 종업원 교육 등의 특정 분야에 직접적인 지원을 받는 기업도 많다. 1949년 도요타, 1974년 폭스바겐, 2009년 GM의 경우처럼 정부의 구제 금융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고, 보호 관세나 법적인 독점권 보장으로 간접적인 보조를 받기도 한다.
도덕적, 역사적 이유들도 중요하지만, 자국 편향이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경제적인 것이다. 기업의 핵심 역량을 국경 너머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를 해외로 옮기는 것은 쉬우나 숙련 노동자나 경영자를 옮기는 것은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 업무관행이나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은 그 보다 더 어렵다. 1980년대 동남아시아에 자회사를 설립하면서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납품업자들도 같은 곳에 자회사를 설립해달라고 요청했다. 신뢰할 만한 납품업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적 자원(경영자, 엔지니어, 숙련 노동자 등) 조직적 자원(회사내부규정, 업무관행, 기업조직 속에 녹여 있는 지식 등), 네트워크(조달업체, 금융업체, 동종 기업연맹, 타기업 경영진과의 인맥 등) 같은 역량은 옮길 수가 없다. 더구나 이들에 내재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역량들이 제대로 발휘되려면 법률제도, 비공식적 규칙, 기업 문화 등과 같은 적절한 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높은 수준의 인적, 조직적 역량과 적절한 제도적 여건이 필요한 고도의 기업 활동은 자국에 남게 된다. 자국 편향은 단순히 감정적인 애착이나 역사적 책임감 때문만이 아니고 명확한 경제적 이유도 있다.
p.117 ●암흑의 완자 마음이 변하다.
만델슨 경은 노동당 토니 블레어의 홍보 책임자를 맡은 후 ‘신노동당’이라는 이미지를 성공시킨 사람이다. 언론 매체를 효과적으로 동원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능력과 무자비한 면모 덕에 ‘암흑의 왕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2004년 유럽연합 통상 담당 집행위원으로서 자유 무역과 투자 개방을 옹호하는 정치인이라는 명성을 전 세계에 각인 시켰다. 2008년 산업 및 규제개혁부 장관으로 영국 정계에 복귀한 그는 외국인의 자산 소유에 관대한 영국 정부의 태도 때문에 “영국 제조업이 실패할 지도 모른다.”라고 말하였다. 생각이 바뀐 것이다.
세계화론에도 불구하고 연구개발, 전략 수립과 같은 수준 높은 기업 활동의 기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아직도 기업의 국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업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 기업의 국적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투자자가 해당 산업에 어떤 경력이 있는지, 피인수 기업에 대한 장기계획은 무엇인지 등 다른 요인들도 고려해야 한다. 외국자본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자본에는 더 이상 국적이 없다는 신화에 근거해 경제 정책을 세우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발상이다. 만델슨 경이 뒤늦게 생각이 바뀐 것은 현실에 근거한 것이다.
p.124 thing 09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현상과 함께 금융 산업이나 경영 컨설팅과 같은 생산성 높은 지식 기반 서비스가 발전하면서 제조업은 모든 선진국에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탈산업화’ 시대에 들어선 나라들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서비스 분야에 종사하고, 서비스 제품이 주 생산품 자리를 차지한다. 지식 기반 서비스 산업이 점점 커지는 것을 고려하여 개발도상국들도 제조업 산업 단계는 아예 건너뛰고 서비스에 기초한 탈산업형 경제구조로 바로 진입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우리들 중 대다수가 상점이나 사무실에서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제조업 부문이 덜 중요해졌다는 의미에서 탈산업화 시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총생산에서 제조업 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 것은 제조업 제품가격이 서비스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졌기 때문이지 제조업 생산량의 절대량이 줄어서가 아니다. 제조업 생산품의 가격이 낮아진 것은 제조업 분야의 생산성이 서비스업 분야보다 더 빨리 증가하기 때문이다. 탈산업화는 서비스 부문과 제조업 부문이 서로 다른 속도로 성장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어서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지만 생산성 향상과 국제수지에 끼치는 나쁜 영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개발도상국들이 산업화단계를 건너뛰고 탈산업화 단계에 곧바로 진입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허상에 불과하다. 서비스 산업은 생산성이 증가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 힘들다. 서비스 상품은 수출하기가 힘들어 서비스에 기초한 경제는 수출능력이 떨어진다. 수출에서 얻는 수입이 적으면 해외에서 선진 기술을 사들일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고 결국 경제성장의 속도도 느려진다.
p.125 ● 중국에서 만들지 않은 물건도 있어요?
중국이 세계의 공장(workshop of the world)이라 불릴 만큼 많은 물건을 생산하고 있다. 원래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었다. 영국은 앞장서 산업혁명을 수행한 이래 19세기 중반에는 세계를 압도하는 산업 강국으로 군림했다. 1860년에는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20%, 1870년에는 46%를 차지했으니 그렇게 불릴 만도 하였다. 이에 비해 중국은 2007년 기준으로 대략 17%에 불과하다. 이를 보면 당시 영국의 산업 지배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영국의 압도적 지위는 미국과 독일 같은 나라들이 추격하여 1880년대부터 산업지배력이 축소되기 시작했고, 1차 대전이 일어날 무렵 선도적인 산업 강국의 지위마저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영국 경제 내에서는 제조업이 지배 산업의 위치를 유지했다. 1970년대 제조업 고용비중이 35%로서 독일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제조업 중심경제(manufacturing economy)였다.
그러나 영국 제조업의 지위는 1970년대 이후 급격히 추락한다. 지금은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3%에 불과하다. 고용에서는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10%를 웃도는 수준이다. 오늘날 영국은 제조업 부문의 무역적자가 매년 국내총생산의 2~4%에 달한다. 어째서 이리 되었는가?
이렇게 생산 및 고용에서 제조업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탈산업화)은 모든 부자 나라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부유해질수록 제조업 제품보다 서비스를 더 많이 원하게 되면서 제조업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서비스 산업 즉 금융, 컨설팅, 디자인, 전산, 정보, 연구개발 등 지식기반 서비스들은 급격한 성장,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서비스 산업이 부자 나라에서는 제조업을 대체해서 국민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은 증가라고 한다. 급기야 제조업은 중국 같은 개발도상국들이나 하는 저급한 경제활동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p.128 ● 컴퓨터와 이발: 탈산업화 현상은 왜 일어나는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일부 국가에서는 전체 고용에서 제조업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이 대략 40%였으나 오늘날에는 기껏해야 25% 수준이고 미국, 캐나다,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고작 15%에 불과하다.
이처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비율이 대폭 줄어들면서 사회의 성격도 변했다. 사무직이나 판매직은 공장 노동자보다 육체노동을 덜 할뿐더러 일의 속도와 방법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공장 노동자들은 작업할 때는 물론이고 노조 활동을 할 때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편이다. 반면 사무직이나 판매직은 같이 하는 작업보다는 혼자 하는 일이 많고 노조 조직률도 낮다. 판매직과 일부 사무직은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반면에 공장 노동자들은 고객을 접할 기회가 없다. 이런 현상들에서 오늘날 부자 나라 시민들이 부모나 조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일할 뿐 아니라 사람 자체도 다른 유형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의 부자 나라들은 이미 사회적 차원에서 ‘탈산업 사회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차원에서는 부자 나라들 역시 아직 탈산업화 시대에 들어섰다고 할 수 없다. 제조업은 여전히 이 나라들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탈산업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시 현상이다. 실제 변화가 아니라 단지 통계처리의 변화 때문에 탈산업화가 진행된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제조업 공장에서 이루어지던 단체 급식, 청소, 기술지원 등의 기능은 제조업의 실적으로 잡혔으나, 이 기능들이 아웃소싱(outsourcing)되면서 실제 서비스 량은 늘어나지 않았지만 서비스 부문의 국민소득은 증가하고 제조업 부문의 국민소득은 감소한다. 아웃소싱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아웃소싱 외에도 제조업의 쇠퇴가 실제보다 부풀려져 보이는 원인은 재분류 효과 때문이다. 1996~2006년에 영국의 제조업 부문의 고용규모 하락 폭 중 10% 정도는 일부 제조업체의 업종이 서비스업으로 재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탈산업화 원인으로는 ‘저비용 개발도상국’, 특히 중국으로부터 제조업 제품이 엄청나게 수입되면서 부자 나라들의 제조업이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중국의 수출품이 부자 나라의 경제에 영향을 미친것은 1990년대 후반을 지나서인 반면 탈산업화로 불리는 현상은 이미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탈산업화 현상의 원인 중 80%는 국민경제가 부유해지면서 제조업 제품에 대한 수요가 서비스 수요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제조업 제품에 대한 수요 하락은 실제로 매우 미미하다. 우리가 소득의 많은 부분을 제조업 제품보다 서비스 구입에 사용하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는 소비량이 늘어나서가 아니라 서비스의 가격이 제조업 제품의 가격보다 상대적으로 더 비싸지기 때문이다. 예로써 10년 전 컴퓨터 한 대를 살 수 있는 돈이면 오늘날 세대는 거뜬히 살 수 있다. 소득 중에서 컴퓨터 두 대 구매에 사용한 몫은 10년 전 소득 중 컴퓨터 한 대에 쓴 몫보다 크게 낮을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발의 경우 이발 횟수는 10년 전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10년 전에 비해 이발 요금은 다소 올랐을 것이고 이발 요금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득 중 이발과 컴퓨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이발은 증가하고, 컴퓨터는 감소되었다.
그런데 상대가격의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부자 나라들의 제조업은 급격히 쇠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제조업 제품에 대한 실절적인 수요 하락의 규모는 미미하다.
제조업 제품의 상대가격이 떨어진 이유는 서비스업에 비해 제조업의 생산성이 더 빨리 향상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서비스 부문의 생산물보다 제조업 부문의 생산물이 더 빨리 증가하기 때문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것이다. 제조업은 기계화나 화학 처리 공정을 도입하기가 쉬운 반면 서비스업은 생산성을 올리기가 어렵다. 일례로 현악 4중주단이 27분짜리 곡을 9분 만에 후다닥 연주했다고 해서 생산성이 세배 향상되었다고 할 수 없다. 품질을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서비스도 있다. 교육서비스의 경우 학생들을 한 교실에 네 배 더 몰아넣으면 교사의 생산성을 네 배 올릴 수 있지만, 서비스 질은 하락한다. 미국과 영국에서 소매서비스의 생산성이 향상되었는데, 서비스 자체의 질을 떨어뜨린 대가이었다. 직원을 줄이는 바람에 신발 사려고 5분이 아니라 20분을 기다리고 소파를 배달 받으려면 2주가 아닌 4주나 대기해야 했고, 아침 9시에서 오후 6시 사이에 언제 배달될지 몰라 하루 휴가를 내기도 해야 했다.
금융처럼 생산성 향상의 여지가 많은 부문도 있으나 2008년 금융위기를 보면 실제로 생산성이 증가한 것은 아니었다. 금융업자들은 금융 혁신을 통해 금융상품의 위험성을 줄이는 첨단 기법을 개발했다고 선전하면서 이를 마구잡이로 팔아댔다. 그러나 금융혁신은 금융상품의 위험성을 줄인 것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감추는 데 불과했다.
요약하자면 부자나라에서 제조업 비중이 줄어든 것은 제조업 제품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하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중국 등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제조업 제품의 수입이 늘어나서 그런 것도 아니다. 수입으로 타격을 입은 것은 몇몇 부문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탈산업화 현상은 제조업의 생산성 향상에 따라 제조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하락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제조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지 ‘탈산업 사회’를 공언할 정도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p.135 ● 탈산업화는 우려해야 하는 현상인가?
제조업의 생산성이 증가함에도 서비스업의 비중과 관련하여 제조업의 상대적 비중이 문제가 된다. 국내 산업에서 제조업의 비중이 서비스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면 생산성 증가를 가로 막을 수 있다. 예로서 어떤 나라의 경제에서 서비스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을 때 이 나라의 경제 전반의 생산성 향상은 느려질 것이다. 서비스 부문의 속성상 생산성이 제조업보다 더디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탈산업화는 국제수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서비스 부문은 제조업보다 수출이 어려워 외화를 벌어들이기가 쉽지 않다. 서비스업의 비중이 커지면 해당국가의 국제수지가 적자상태에 빠지고 무역시장에서는 지불할 돈이 없어진다.
서비스의 교역이 어려운 이유는 ‘서비스 제공자’와 ‘서비스 소비자’가 같은 공간에 있어야 사고파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로서 서울 사람이 뉴욕 사람의 집을 청소하거나 머리를 잘라 줄 방법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민이 필요한데, 이는 국가가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경제에서 서비스 부문의 비중이 커진다는 것은 외화획득이 감소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금융이나 컨설팅, 엔지니어링 같은 지식 기반 서비스는 교역이 훨씬 쉽다. 영국은 이를 수출하여 국제수지 적자를 메웠다. 그러나 거기서 얻는 국제수지 흑자규모는 국내총생산의 4%에 미치지 못해서 제조업 부문에서 발생하는 국제수지 적자를 간신히 메우는 수준이다. 미국의 경우 지식 기반 서비스의 수출에서 발생하는 국제수지 흑자액이 국내총생산의 1% 미만이다. 이는 국내 총생산의 4% 규모에 달하는 제조업 무역 적자를 메우기에는 어림없는 수준이다. 더욱이 미국과 영국이 앞으로 지식기반 서비스 부문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제조업과 관련된 첨단 지식 기반 서비스업인 엔지니어링, 디자인 등의 서비스 부문을 발전시키려면 제조업 생산 공정을 직접 운영하거나 관찰하여 체득되는 지식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제조업 부문이 이들 나라에서는 약하다.
지식 기반 서비스 산업이 가장 발달했다고 하는 미국과 영국 두 나라마저 궁극적으로 서비스를 수출해서 국제수지 균형을 달성할 수 없다면, 다른 나라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p.138 ●탈산업 사회의 환상
탈산업화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경제성장의 동력이 바뀐 결과라고 믿는 사람들은 개발도상국이 산업화 단계를 건저 뛰고 곧바로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인도 사람들은 공해나 유발하는 제조업은 잊어버리고 서비스업으로 곧바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라면 인도는 ‘세계의 사무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지식 기반 서비스업은 주로 제조업체를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는 이런 서비스를 발전시키기가 상당히 어렵다. 서비스 산업에 기반을 두는 경우 제조업에 기반을 둔 경우보다 장기적으로 생산성 증가율이 훨씬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서비스 상품은 교역 가능성이 떨어지므로 국제수지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국제수지에 문제가 생기면 장기적으로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떨어지고, 개발도상국은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경제성장을 이끌어 낼 능력자체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스위스나 싱가포르는 서비스 산업에 기반을 두고도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반론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스위스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업 경제를 이룩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스위스산 제품을 흔히 볼 수 없는 것은 소비재가 아니라 기계류나 화학제품 같은 생산재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역시 제조업이 강하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이다. 일본, 스위스, 싱가포르, 핀란드, 스웨덴을 더하면 제조업 부문의 세계 최강 5개국이 된다.
요약하면 부자나라들이 탈산업사회에 접어들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다수 국민은 공장에서 일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가격의 변화를 감안하면 부자나라들의 생산과 소비에서 제조업 부문의 중요성을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탈산업화 현상이 생산성 증가와 국제수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개발도상국이 산업화 단계를 건너뛰고 서비스 산업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서비스산업은 생산성이 느리고, 생산성 증가가 빠르다는 첨단 지식 기반 서비스 산업들은 강력한 제조업 없이 발전할 수 없다.
p.142 thing 10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자랑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은 다른 부자 나라에서 비해 미국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도시국가 룩셈부르크를 제외하고 미국보다 생활수준이 높은 나라는 없다. 이는 미국이 자유 시장 경제 시스템을 가장 비슷하게 구현하고 있어서이다. 이것이 다른 나라들이 이를 추종하려는 이유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미국은 평균소득으로 볼 때 룩셈부르크 다음이지만 소득분배가 극도로 불균등하여 평균 소득만으로 비교해서는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짐작하기 어렵다. 소득불균등은 미국의 건강지표가 좋지 않고 범죄율이 높은 원인 중의 하나이다. 미국은 이민이 많고 고용조건이 열악하여 미국인들은 유럽인들에 비해 일을 훨씬 더 오래한다. 미국이 다른 부자 나라들에 비해 생활수준이 단연 더 높은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p.143 ● 미국의 도로는 금으로 포장되어 있지 않았다.
미국은 1900년에 와서야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건국 초기부터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희망의 나라였다. 19세기 초 미국의 평균소득은 유럽과 비슷했고,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평균소득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은 미국으로 가고 싶어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내야 하는 불편함이 있긴 했지만 미국에서 무한정 땅을 차지할 수 있고 일손이 귀해서 유럽보다 네 배 정도의 임금을 챙길 수도 있었다. 또한 미국이 봉건 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지 않은 나라여서 구대륙에 비해 신분상승의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미국에 매혹된 것은 이민 희망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 기업가들과 정책입안자들은 미국식 경제모델을 모방하기를 원하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미국의 자유 기업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무한 경쟁의 기회를 주고, 거기서 이긴 사람은 정부의 규제나 잘못된 평등주의 문화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응당한 보상을 받도록 해주는 이상적인 제도로 보였다. 고용과 해고가 쉬운 자유로운 노동 시장 덕분에 기업들은 상황에 따라 노동자를 경쟁 기업보다 빠르게 재배치할 수 있는 민첩한 구조를 유지함으로써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불평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모델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시스템에서 낙오한 사람들마저 그 결과를 기꺼이 수긍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시스템에서는 누구나 토머스 에디슨, J.P. 모건, 빌 게이츠가 될 가능성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고 창의력을 발휘하게 하는 동기부여가 이렇게 강력하니, 미국이 20세기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로 떠오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p.145 ● 미국사람들 잘사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은 제일 잘사는 나라가 아니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07년 기준으로 미국 1인당 국민소득은 46,040달러이다.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스위스, 덴마크, 아이슬란드, 아일랜ㄷ, 스웨덴 순으로 인구규모가 작은 아이슬란드나 룩셈부르크를 제외하더라도 미국은 세계에서 여선 번째로 부유한 나라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잘산다는 인상을 받는 이유는 어느 나라를 관광할 때 빈민가를 볼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유럽보다 미국에 빈민가가 훨씬 더 많은데도 그 곳을 뺀 나머지 부분만 보고 미국이 더 잘산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불평등 요인 말고도 유럽보다 미국이 더 잘산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물가에 있다. 미국의 택시요금이나 식당의 식사요금이 훨씬 저렴하다. 제네바에서 5마일 정도의 거리를 택시 타고 가면 35달러를 내야 하지만 보스턴에서는 같은 거리를 가는데 15달러밖에 들지 않는다.
같은 금액으로 구입할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의 양이 다른 이유는 시장 환율이라는 것이 주로 국제적으로 거래되는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수요 공급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국제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비교역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택시 운전이나 레스토랑의 서빙처럼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노동서비스이다. 나라마다 노동 서비스의 가격이 차이가 나는 것은 노동자 임금 수준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스위스 택시나 노르웨이 식당이 비싼 것은 그 나라의 노동자 임금이 높기 때문이다. 태국이다 멕시코에서 이런 서비스가 값싼 것은 노동자 임금이 싸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적 교역품인 TV나 휴대전화는 부자나라든 가난한 나라든 상관없이 비슷한 가격을 유지한다.
도시 국가로서 인구 50만도 안 되는 룩셈부르크를 제외하면, 미국인은 자신의 평균소득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이 정도로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결론 내리 전에 몇 가지를 더 고려해 봐야 한다.
p.149 ●..... 정말 그럴까?
선진국 중 소득 불평등이 월등히 심한 나라가 미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인 중 평균 생활수준 이하로 사는 사람의 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많다고 추측할 수 있다. 첫째,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평균 소득 수준임에도 평균 수명과 유아 사망률 같은 보건지수는 세계 30위에 불과하다. 1인당 평균으로 보았을 때, 미국의 교도소 재소자 수는 유럽의 8배, 일본의 12배나 될 정도로 범죄율이 높아 최빈곤층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둘째, 이 나라의 높은 생활수준이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위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이 나라에는 값싼 노동력이 가난한 나라로부터 이민 형태로 유입된다. 이들 중 많은 수가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에 임금은 한층 더 싸진다. 미국 노동자들, 특히 노조가 없는 서비스 분야에서 일하는 미국노동자들은 유럽에 비해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조건을 참아내야 한다. 미국 평균 소득의 구매력이 높은 것은 많은 미국 시민들이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조건을 견뎌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셋째, 미국인들은 일벌레라고 불릴 정도로 다른 나라에 비해 가장 일을 많이 했다. 미국인들은 유럽인들보다 10% 더 오래 일하고, 노르웨이와 네덜란드에 비해서 일하는 시간이 30%나 더 길다.
소득수준이 일정액을 넘어서면 여가 시간에 대한 물질적 소비의 상대적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에 여가 시간을 줄여 돈을 더 벌기 위해 긴 시간을 일하는 것은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미국식 경제모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미국인의 생활수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한나라의 평균소득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을 따져보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생활수준을 측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면 미국의 우월성은 상당히 빛을 잃고 만다. 소득으로 얼마나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살 수 있는지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여가 시간의 질과 양, 직업의 안정성, 범죄의 공포로부터의 해방, 의료 혜택, 사회 복지 등 ‘질 좋은 삶’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을 간과하기 쉽다. 모두가 진정으로 ‘잘사는’ 사회를 건설하려면 소득 이외의 요소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p.154 thing 11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프리카 저개발은 숙명이다. 기후가 나빠 열대병을 일으키고, 항구도 없는 내륙국가가 많으며, 시장규모가 작아 수출기회가 적은 데다 무력충돌은 이웃나라에까지 번진다. 천연자원이 너무 많아 사람들은 게으르고 부정부패와 갈등의 소지가 많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여러 민족으로 갈라져 있어서 통치하기 어렵고, 민족 간 무력 충돌이 많이 발생한다. 투자자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제도가 없고, 좋은 문화도 뿌리내리지 못해 사람들은 근면, 저축, 협동에는 관심도 없다. 바로 이런 구조적 문제 때문에 1980년대 이후 시장 자유화 조치를 취했음에도 성장을 하지 못했다. 아프리카는 해외 원조 없이는 발전 가능성이 없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위에서 열거한 구조적 문제가 그대로 있었음에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아프리카는 상당한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아프리카의 구조적 요인들 중 대부분은 오늘날 부자가 된 나라들도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이다. 나쁜 기후(극지 기후, 열대성 기후), 내륙국가, 풍부한 천연자원, 민족 분쟁, 바람직하지 않은 문화 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구조적 문제가 아프리카 발전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런 장애요인들이 낳는 문제를 처리할 만한 기술적, 제도적, 조직적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아프리카가 정체된 이유는 이 지역 국가들이 강요받았던 자유 시장 경제 정책이다. 역사나 지리적 요건과는 달리 정책은 바꿀 수 있다.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p.155 ● 새라 페일린의 눈으로 본 세상, 혹은 ‘생쥐 구조대’에 비친 세상?
많은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잘 구별도 되지 않는 나라들이 똑같이 무더운 기후, 열대병, 극심한 빈곤, 내전, 부정부패에 시달리는 땅덩어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지역 대부분의 나라가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남쪽지역은 더욱 그렇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07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1인당 평균 소득은 952달러로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부탄, 인도, 몰디브, 네팔, 파키스탄, 스리랑카 같은 남아시아 국가 평균 880달러 보다는 조금 높지만 이 지역을 제외하면 세계 최저 수준이다. 1980년대 이후 성장률이 상승하기 시작한 남아시아와는 달리 아프리카는 ‘만성적인 성장 실패’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 현재 사하라 이남 지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80년대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1980년대 이후 자유 시장 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구조적’ 장애요인을 안고 있다. 자연조건이 특히 그렇다. 적도에 가깝기 때문에 말라리아와 같은 열대병이 흔해서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반면에 의료비용은 늘어난다. 항구 접근성이 없는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세계 경제에 통합되기 힘들고, 주변의 가난한 나라들은 시장 규모가 작아 교역기회가 적고, 무력 갈등은 이웃나라로 쉽게 번진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천연자원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풍부한 천연자원 때문에 사람들이 게을러진다는 것이다. 천연자원으로 인해 일하지 않고 거저 생긴 돈은 부정부패를 양산하고 무력갈등으로 번지기도 한다. 동아시아의 한국, 일본처럼 자원이 없이 경제적 성공을 거둔 나라들은 자원의 ‘역(逆) 저주’를 받았다는 말을 듣는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민족 구성이 다양해서 민족 간 신뢰를 확립하기 힘들고 무력 갈등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시장의 거래비용이 높아진다. 식민통치를 하던 서구 열강은 열대병이 만연한 아프리카에서 영원히 정착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제대로 된 제도를 정비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원을 수탈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만을 도입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프리카 문화가 경제 발전을 가로 막는다고까지 단언한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고, 미래를 대비한 계획을 세우지도 않으며, 서로 협력할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열한 구조적 문제들 중 어떤 것들은 해결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문제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아프리카의 미래는 어두워 보인다. 아프리카 문제가 이런 구조적 장애 때문이고, 현실적인 대책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프리카에 해외원조나 국제 교역 지원 등 일종의 영구적인 장애복지 후원금 같은 것을 줘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달리 아프리카의 경제 발전을 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p.160 ● 아프리카 성장의 비극?
이 지역이 보이고 있는 저조한 성장률은 결코 만성적인 것이 아니다. 1960- 1970년대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의 1인당 소득 성장률은 1.6%로서 나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아시아의 5~6%에는 훨씬 못 미치고 라틴아메리카의 3%보다도 못하지만. 오늘날 부자가 된 나라들이 산업 혁명기에 이룩한 1~1.5% 성장률보다 나은 수치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가 1980년대 이전에는 괜찮은 성장률을 보였다는 것은 이 지역이 겪고 있는 비교적 최근의 정체가 ‘구조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이 구조적 요인이 작용한 것이라면 역사적으로 한 번도 성장한 적이 없어야 한다. 1980년대에 와서 갑자기 성장을 멈춘 현상은 이 구조적 문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당시 진행되었던 정책방향의 극적 변화가 성장 중지의 원인으로 보인다.
1970년대 말부터 사하라 이남 지역 국가들은 IMF 등이 제시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조건으로 따라온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정책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통념과는 반대로 이 정책들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thing 7) 이 정책으로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제품이 국제 경쟁 무대에 갑자기 노출되었고 일부 제조업이 붕괴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아프리카 각국은 코코아, 커피, 동과 같은 제품을 수출하자 갑자기 늘어난 공급량으로 인해 가격이 폭락하는 일이 잦아졌다. 예산적자를 줄이라는 IMF 등의 영향으로 정부지출 감축이 이뤄지고, 이는 취약한 사회간접자본의 부족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의 ‘지리적 약점’이 더 부각되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시행한 결과 아프리카 경제는 30년간 성장을 하지 않게 되었다. 1980-1990년대 동안 아프리카 국가들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해마다 0.7%씩 떨어졌다. 자유 시장 정책을 30년 동안 시행한 후 아프리카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80년과 같은 수준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구조적 요인들이라는 말은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163 ● 아프리카는 지리적 요건과 역사적 배경을 바꿀 수 있을까?
구조적 요인들이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풍부한 지하자원은 정치를 왜곡시킬 수도 있지만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도 있다. 어떤 요인이 구조적이라는 것 즉 그것이 자연이나 역사에 의해 주어진 요인이라고 해서 그 결과가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선진국들 대부분은 비슷한 조건을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먼저 기후 조건을 보면, 열대성 기후는 말라리아 같은 열대병 때문에 의료 부담을 늘려 경제발전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오늘날 부자나라들 중 많은 수가 열대병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제가 발전하면서 위생 상태를 개선하고 발병률 자체를 낮췄을 뿐 만 아니라 의료시설도 좋아졌다. 나쁜 기후가 저성장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저성장의 결과로 나쁜 기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리적 조건을 지적하면서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가 내륙국가라는 점을 거론한다. 그러나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는 내륙국가 임에도 잘사는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는 강을 통한 운송수단을 활용했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가 강을 끼고 있음에도 강을 이용한 내륙 수운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투자가 부족하다. 지리적 조건이 제약은 아니다. 사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겨울철에 바다가 얼어붙어 일 년의 절반은 내륙국가였으나, 쇄빙선을 개발하여 극복하였다. 인도는 주변의 파키스탄과의 군사적 충돌, 게릴라단의 무장투쟁, 내전 등을 겪으면서 경제 성장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자원의 저주를 이야기 하지만,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나라들이 경제 발전을 한 것은 풍부한 천연자원이 축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천연자원이 많은 것은 아님에도 사실 기계, 사회 간접 자본, 숙련 노동자 등의 인공적 자본이 너무 부족하여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20C초에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기록한 북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 스칸디나비아 등은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결국 자원의 저주라는 개념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족적 구성이 너무 다양한 것도 여러 면에서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민족적 다양성은 다른 지역에도 흔히 존재한다.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이민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차치하고라도, 언어, 종교, 이데올로기적 분열, 무력 충돌 등이 있음에도 또한 종교문제로 인한 내전을 겪으면서도 경제발전을 하는 나라가 많다.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져 큰 혜택을 봤다는 동아시아 국가들도 심각한 내부갈등을 안고 있다. 타이완은 본토인과 타이완 원주민으로 나뉘고 일본은 한국인 오키나와인, 아이누인, 부라쿠민 등 소수 민족문제가 심각하다. 한국은 민족적, 언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동질적이지만, 지역갈등이 존재하고 있다. 부자나라들이 다민족 문제로 고통 받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단일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국민 통합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낙후된 제도가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 막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진국들이 현재 아프리카 수준의 물질적 발전 단계를 거칠 당시에는 지금 아프리카의 제도보다 더 열악하였다. 그럼에도 선진국들은 꾸준히 성장해서 결국 높은 수준의 발달단계에 도달했다. 양질의 제도는 경제성장의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성장의 결과물로 나타날 수 있다.
아프리카의 나쁜 문화를 거론하기도 한다. 선진국들은 과거 아프리카 못지않은 나쁜 문화가 있었다. 20C 초 일본인은 게으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고, 19C 중반까지도 영국인들은 독일인을 가리켜 바보 같고 개인주의적이며 감정적이어서 경제발전을 하기에는 글렀다고 말했다. 일본과 독일의 문화는 경제발전과 함께 크게 변했다. 더 규범을 잘 따르고, 계산이 더 치밀한데, 이는 다른 사람들과 더 잘 협력하지 않으면 고도로 조직적인 산업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 아프리카가 되었든 유럽이 되었든 문화를 경제 저성장의 원인으로 거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아프리카의 장애요인들은 더 나은 기술과 뛰어난 조직력, 그리고 향상된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으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아프리카가 최근 들어 성장실패를 경험한 주된 이유는 정책, 즉 구조 조정 프로그램이 강요한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에 있다. 특정 자연 조건이나 역사적 배경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가 겪는 문제가 정책 때문이라면 문제는 더욱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진정한 비극은 만성적 성장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p.170 thing 12 정부도 유망주를 고를 수 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정부는 현명한 사업결정을 내리거나 산업 정책을 통해 유망주를 고르는 데 필요한 정보와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정책 결정자들은 이윤보다는 권력을 추구하고, 결정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할 확률이 높다. 정부가 시장 논리에 어긋나는 정책을 채택하고 그 나라가 가진 자원과 능력을 넘어서는 산업부문을 장려한다면 재난에 가까운 결과를 낳을 뿐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정부는 유망주를 고를 능력이 있고 그렇게 한 선택이 놀라울 정도로 성공한 사례도 많다. 기업 활동에 영향을 주는 정부 결정은 기업들이 직접 내리는 결정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정부는 필요하면 더 나은 정보를 획득하여 의사결정의 질을 높일 수 있다. 게다가 개별 기업에는 도움이 되더라도 국민 경제 전체로 보면 바람직하지 않은 결정들도 있다. 따라서 정부가 시장의 움직임에 역행하는 유망주를 골랐다 하더라도 그 결정이 민간부문과 긴밀한 협력 하에 진행되었다면 국민 경제를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p.171 ●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업 계획
세계은행 총재였던 유진 블랙이 개발도상국들은 고속도로, 일관제철소, 국가원수의 기념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난한바 있다. 실제로 개발도상국들이 고속도로와 제철소를 건설했지만, 고속도로는 텅 비어 있었고, 제철소는 막대한 정부 보조금과 관세 보호 정책으로 간신히 유지되었다.
당시 한국은 가장 가난한 나라로 어류, 텅스텐 같은 천연자원이나 가발, 저가 의류 같은 노동집약적 제조업 제품 수출에 의존하고 있었다. 경제학의 비교 우위론에 따르자면 한국은 노동력은 풍부하나 자본이 부족하므로 철강 같은 자본집약적 제품을 만들지 않는 것이 현명하였다. 철강석의 원자재가 나지 않는 나라이므로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들여와야 했고, 모두 5000~6000마일 떨어진 곳들이니 운송비가 엄청났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한국정부가 항만·도로·철도 등의 인프라 무료 이용, 세금 감면, 투자 초기 세금 부담 완화를 위한 자본 설비 가속 감가상각 적용, 전기·수요 요금 인하 등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약속해도 외국 원조나 투자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자본을 대줄 파트너를 찾아 협상을 하는 사이 투자자에게 미심쩍어 보이는 조치로서 1968년 포스코를 국영기업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는 개발도상국의 국영 기업들이 비효율적인 것으로 소문나 있고, 국영 텅스텐 광산 업체를 운영한 것 말고는 기업 경험이 없는 군 장성 출신의 박태준이 포스코의 회장을 맡았다.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벤처 기업을 설립하려는 마당에 그 일을 책임지고 이끌어 갈 사람이 전문 경영인도 아니라니 말이 되는가! 당연히 세계은행은 다른 자본 공여 기관들에게 이 프로젝트에 지원하지 말 것을 권고했고, 협상을 맡은 모든 파트너들이 1969년 4월 공식적으로 지원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일본 정부를 설득해서 식민 통치에 대한 보상금 중 상당부분을 제철소 건설 쪽으로 전용해 줄 것과 제철소에 필요한 기계류와 기술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포스코는 1973년 철강 생산을 시작했고,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리 잡았다. 1980년 중반에는 같은 업종에서 세계 제일의 효율성있는 기업으로 꼽혔다. 포스코는 2001년 실적보다 정치적 이유로 민영화되어 현재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4위의 규모를 자랑한다. 참으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정부 주도로 설립하여 성공을 거둔 한국 기업은 포스코 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1969~1970년대에 한국 정부는 많은 민간 기업들로 하여금 스스로는 선택하지 않을 부문에 진출하도록 만들었다. 이 ‘독려’는 정부 보조금이나 보호관세 같은 당근의 형태를 띠었다. 이러한 당근에도 기업이 움직이려 하지 않으면 국가 소유 였던 은행들을 통한 대출 중지 위협이나 중앙정보부가 ‘조용히’ 타이르는 방법도 사용되었다.
흥미롭게도 정부주도로 시작된 기업들 중 많은 수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LG는 1960년대 섬유 산업에 진출하고 싶었지만, 정부의 압력으로 전선 사업에 뛰어 들어야 했다. 이것은 LG전자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1970년대에 한국 정부는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업을 시작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정회장은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당시 독재자이자 한국의 경제기적을 주도한 박정희 장군이 현대그룹을 파산시키겠다고 협박하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현대 조선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회사 중의 하나이다.
p.175 ● 불량주 고르기?
현대 경제학의 주류인 자유 시장 경제이론에 따르면, 포스코, LG, 현대 등이 이룬 성공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는 정부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 비즈니스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놔둘 때 가장 성공한다는 것이다. 기업운영 당사자가 정부보다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더 많이, 더 효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리한 정부 관료라 할지라도 관련 기업 경영자들만큼 비즈니스 감각과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기업에게 어느 산업에 진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정부는 유망주를 골라낼 능력이 없다는 주장이다.
정부의 의사결정자들, 즉 정치인들과 행정 관료들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보다는 권력을 극대화하는데 더 신경 쓰고, 경제적 실효성보다는 가장 가시적이고 정치적 상징성이 높은 프로젝트를 선택하게 되어 꼴찌 할 말을 고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 관료들은 남의 돈을 가지고 일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의 경제적 성공여부를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결국 국가 이익보다는 개인의 명성을 우선시하는 잘못된 목표와 의사결정 결과에 개인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잘못된 인센티브를 가진 상태에서 정부 관료가 비즈니스에 개입하면 거의 확실하게 불량주를 고를 수밖에 없다. 이의 대표적 사례가 1960년대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공동 출자한 콩코드 프로젝트이다. 초음속 여객기를 개발하는 데 들어간 돈과, 브리티시 항공과 에어 프랑스가 콩코드를 구입할 때 들어간 정부 보조금등을 고려하면 이 프로젝트는 대실패로 끝났다.
널리 인정받는 경제이론과 다른 나라의 사례들로 비추어 볼 때 정부가 유망주 보다는 불량주를 고를 확률이 훨씬 높은 데도 한국은 무슨 재주로 그렇게 유망주를 골라낼 수 있었을까? 한국인은 인류 역사상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라 유망주를 재대로 골랐다고 말한다. 아마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명이 잘 먹혀들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한국이 유망주를 제대로 골라낸 것은 기본적으로 일본에서 배워 온 것이다. 타이완과 싱가포르 정부 관료들도 성공적으로 유망주를 고른 점은 한국 못지않았다. 20세기 후반 프랑스,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정부 등도 보호 무역이나 보조금 지급, 국영기업에 의한 투자를 통해 산업 발전을 성공적으로 입안하고 지휘했다. 미국정부도 2차 대전 이후 연구개발 부문에 대규모 지원을 해서 특정 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컴퓨터, 반도체, 항공기, 인터넷, 생명공학 등이 그렇다. 이제는 부자가 된 나라들도 19C말과 20C 초 대부분이 관세, 보조금 지원, 인허가, 규제책 등을 동원해서 특정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한 사례들이 많다.
정부들이 유망주를 골라낸 사례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면 이는 잘못된 부분이 많은 것이다. 정부는 산업 정책을 펴는 데 필요한 정보를 확보할 능력이 있다. 유망주를 뽑는 데 좋은 성적을 거둔 정부들은 보통 기업들과 효과적인 정보 소통 채널을 가지고 있었다. ⓵정부가 필요한 정보를 얻는 효과적인 방법은 국영 기업을 설립해서 필요한 사업을 직접 운영하는 것이다. 싱가포르, 프랑스,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핀란드 등이 이 방식에 주로 의존하였다. ⓶또 정부 지원을 많이 받는 기업들에게 사업의 주요 현황을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법적으로 요구하는 방법도 있다. 한국정부는 1970년대 조선, 철강, 전자 등의 분야에서 이 방법을 썼다. ⓷정부 관료들이 기업 엘리트들과 비공식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관료들이 사업 현황을 잘 파악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프랑스 국립행정학교 출신들이 그 예이지만, 배타적인 그룹의 형성과 부정부패의 소지가 있다. ⓸ 일본은 정부 관료와 재계 리더가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는 심의회를 구성했다. 이는 위의 경우를 절충한 것이며, 심의회에는 학계와 언론계 인물들도 참관인 자격으로 동석한다.
주류 경제이론에서는 기업이익과 국가이익의 충돌을 간과한다. 기업이 자기에게 유리한 판단을 내릴지는 모르지만 그 결정이 국가경제에 이로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1960년대 LG그룹이 섬유산업에 진출하겠다고 내린 결정은 회사이익에 유리하지만 LG를 전선 산업에 진출하도록 독려함으로써 한국정부는 국익을 증진했고, 이는 장기적으로 LG에도 더 나은 결정이었다. 다시 말해서 정부가 유망주를 고르는 것이 일부 기업에 손해를 끼칠 가능성은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p.181 ● 유망주를 고르는 것은 늘 있어 온 일이다.
정부가 유망주를 골라서 성공한 예가 많은데 지유 시장 이론이 어떠한 허점을 가지고 있는가. 정부가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지만, 성공한 사례도 많다. 실패한 사례만 보고서 정부가 유망주를 고르는 개념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유망주 선별에 가끔 실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불확실성의 세상에서 내리는 기업가적 결정에 리스크가 따르고, 그 결정의 일부가 실패로 끝나는 것은 당연하다. 민간부문의 기업들도 유망주를 선별하는 선택을 끊임없이 하고, 그 중 일부에서는 성공하지만 일부에서는 실패한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이나 정부는 항상 옳은 선택만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정부가 유망주를 선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그럴 능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선택의 승률을 높이는 것이다. 정치적 의지가 충분하면 정부의 승률을 극적으로 높일 수 있다. 타이완의 기적과 한국 정부가 그 예에 해당한다. 19C 말, 20C 초 유망주를 선택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것으로 유명했던 프랑스 정부도 2차 대정 후에는 유망주의 선별 부문에서 유럽 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
고르는 주체가 기업이 되었든 정부가 되었든 유망주는 항상 선별되고 있다. 가장 성공적인 경우는 기업과 정부가 협력해서 선택했을 때이다. 민간 기업의 유망주 선택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에 묻혀 그 너머를 보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정부가 주도하는, 혹은 관민협력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경제발전의 거대한 가능성을 모두 놓치고 말 것이다.
p.184 thing 13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분배보다 부의 창출이 우선이다. 싫건 좋건 투자를 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은 부자들이다. 부자들은 시장의 기회를 포착하고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과거 많은 나라에서 계층 간의 질시를 이용하고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정치를 펴면서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부의 창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일은 그만 두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지 않고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도 나아지지 않는다. 부자들에게 더 큰 파이를 주면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파이가 작아질지 몰라도 결국에는 이들에게 돌아가는 파이의 절대적 크기가 더 커질 것이다. 파이 전체의 크기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트리클 다운 경제학으로 알려진 이 주장은 ‘성장을 촉진하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 그리고 ‘성장 감소를 부르는 빈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의미를 양분해서 말하는데, 실제로 부자들을 위한 정책은 지난 30년 동안 성장을 가속화하는데 실패했다. 따라서 부자들에게 더 큰 파이를 주면 결국에는 전체 파이가 커진다는 트리클 다운 이론의 첫 번째 단계는 설득력이 없다. 두 번째 단계, 윗부분에서 창출된 보다 큰 부가 아래로 흘러내려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스며든다는 이른바 트리클 다운 현상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트리클 다운 현상이 조금씩 일어날 수 있으나 그것을 시장에 맡겨두면 그 효과는 미미하기 때문이다.
p.185 ● 스탈린의 유령, 아니면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유령?
1차 대전 직후 레닌은 식량 생산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추진했는데, 그 내용은 농업부문에서 시장거래를 허용하여 농민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좌파적인 레온 트로츠키는 신경제정책이 자본주의에 회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은 프레오브라젠스키였다.
프레오브라젠스키는 소련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제조업 부문의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농민들이 그나마 창출되는 잉여 생산물을 거의 모두 소유,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투자를 늘리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주장이었다. 그는 농촌에서 사유재산과 시장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정부가 농업 생산물의 가격을 낮게 매겨 제조업에 투자할 수 있는 농촌의 잉여 생산물을 남김없이 쥐어짜 낼 수 있으며, 정부 계획경제 당국은 이 잉여 생산물을 제조업 부문으로 옮겨 모두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는 이런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농민들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리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투자 극대화로 경제의 성장능력을 최대화해서 모든 사람이 더 잘 살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프레오브라젠스키는 그 후 숙청을 당하였으나 1928년이 되면서 권력을 독차지한 스탈린이 라이벌의 아이디어를 슬쩍해서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주장했던 전략을 실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농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업 집단화’를 통해 전체 농촌 지역을 국가통제 밑으로 귀속시켰다.
스탈린은 프레오브라젠스키의 권고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고, 농민들의 잉여 생산물을 남김없이 쥐어짜 도시의 제조업으로 옮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조업 부문 노동자들에게 생계비 이하의 임금을 지급해서 도시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해 공장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탈린이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전략을 채택하지 않았다면, 2차 대전 당시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을 정도로 신속하게 소련의 제조업 기반을 성장시키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독일군이 동부 전선에서 패하지 않았더라면 서유럽은 독일군을 격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서유럽 국가들이 오늘날 자유를 누리는 것은 바로 극좌파 소비에트 경제학자 프레오브라젠스키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프레오브라젠스키를 언급하는 것은 그의 전략이 오늘날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과 놀랄 정도로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p.188 ● 자본가 대 노동자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지고, 평생 그 상태로 살아야 하는 봉건적 질서는 18C 이래로 유럽 전역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은 출생 신분이 아니라 ‘성취한 것’에 따라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19C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금욕적인 생활을 해 나가는 인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면 당장 부자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그것을 소비해 버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은 잠시 재미를 보겠지만, 장기적으로 전체 경제의 투자와 성장이 지체되어 더욱 가난해진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반감을 가진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정치논리는 고전파 경제학자들로부터 지적인 뒷받침을 받았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노동자들이 소득을 전부 소비하기 때문에 국민소득에서 노동자들의 소득이 큰 부분을 차지할수록 투자와 경제성장은 위축될 것이라고 보았다.
리카도 같은 열렬한 자유 시장론자와 프레오브라젠스키 같은 극좌파 공산주의자가 만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둘이 많이 다른 것같이 보여도 그들은 모두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극대화하려면 투자 가능한 잉여 생산물을 ‘투자자’의 손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 사이에 다른 점은 이 ‘투자자’가 누구인지 하는 것뿐이다. 잉여 생산물을 집중시켜야 하는 투자자는, 자유 시장론자에게는 자본가 계급이었고, 극좌파 공산주의자에게는 계획경제 당국이었다. 오늘날 “부를 재분배하기 전에 먼저 부를 창출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잉여 생산물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p.190 ● 부자를 위한 정책의 흥망
그러나 19C 후반에서 20C 초반 사이에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사태가 일어났는데,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에서 남자에게 국한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남자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지 수 십 년이 지나는 동안 부자들에 대한 세금과 국가의 ‘사회복지비 지출’이 그렇게 많이 늘지는 않았다.
더욱이 부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중과세가 부과되기 시작한 후에도 자본주의는 파멸하지 않고, 오히려 고율의 세금 덕에 더욱 강고해졌다. 2차 대전 이후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누진세가 보편화되고 사회복지 지출이 증가 했는데 이 국가들은 1950~1973년에 사상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했다.(thing 21) 이 시기를 ‘자본주의 황금기’라 부른다. 황금기 이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1~1.5% 증가했으나, 황금기에는 미국과 영국에서 2~3%, 서유렵에서 4~5%, 일본에서 8%를 성장했다. 그 이후에는 이러한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적은 없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자유 시장주의자들은 케케묵은 논리인, ‘투자 계급’에게 돌아가는 소득 몫이 줄어든 것이 성장 감소의 이유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부자들에게 유리한 소득 재분배’를 신봉하는 정부가 정권을 잡았다.(레이건과 대처 수상이 대표적)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과 빌 클린턴의 민주당조차 공공연하게 이러한 정책을 지지했다. 1996년 빌 클린턴은 복지개혁 정책을 추진했는데, 실제로 복지지출 삭감은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thing 21) 고령화로 인한 연금, 장애인 수당, 의료보험 및 노인들에게 복지 지출을 늘려야 하는 구조적 압력이 커졌는데도 복지 예산이 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복지 국가의 성장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대다수 국가들이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부자에게로 소득을 옮기는 많은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최고 소득세율 인하 등 부자 감세가 시행되었다. 금융 탈규제로 금융업자들은 투기 수익을 올리게 되고 최고 경영자들은 천문학적인 보수를 받게 되었다.(thing 2, 22) 많은 규제 철폐로 기업들은 독점적 지위를 악용하고, 더 자유롭게 환경을 오염시키며, 더 쉽게 해고를 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또 무역 자유화와 해외투자 증대로 기업은 노동 임금을 낮출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20개 선진국 중 16개국에서 소득 불평등도가 올라갔다. 나머지 4개국 중에서 소득 불평등도가 의미 있을 정도로 낮아진 나라는 스위스밖에 없었다. 최악이었던 미국의 불평등도는 이 기간 동안 우루과이나 베네수엘라 같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 수준까지 올라갔다.
미국 중도 좌파 연구소인 경제정책연구의 조사에 따르면 1979~2006년 동안 미국 소득 순위에서 상위 1%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서 22.9%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소득이 상위 0.1%에 속하는 사람들은 1979년 3.5%에서 2006년 11.6%로 세배 이상 늘어났다. 이는 최고 경영자들의 보수가 천문학적으로 올랐기 때문인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들의 보수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개발도상국 및 구 사회주의 국가 65개국 중 같은 기간 소득 불평등이 심해진 나라는 41개국에 달했다. 이 비율은 선진국보다 낮은 것이지만, 이미 소득불평등도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소득불평등의 심화로 인한 악영향은 선진국에 비해 훨씬 심각하다.
p.194 ● 이래로 흐르지 않는 물
‘부자들에게 유리한 소득 재분배’가 정당화되려면, 이로 인해 경제 성장이 촉진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자들에게 유리한 신자유주의 개혁이 시작된 1980년 이래 성장률은 오히려 더 떨어졌다. 1960~70년대에는 1인당 평균 소득이 3%이상 증가했으나 1980~2009년 동안 1.4% 늘어나는데 그쳤다. 부자들에게 파이의 큰 조각을 주면 그들이 더 많은 부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 파이가 커지는 속도는 줄어 버린 것이다.
문제는 ‘투자자’에게 소득을 몰아주는 것만으로는 더 높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투자자가 투자를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었는데도, 미국,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캐나다 등 G7 국가모두와 대다수 개발도상국에서 국민총생산 대비 투자 비율은 감소했다.(thing 2, 6)
백번을 양보해서 부자에게 소득 재분배가 성장을 가져와도 가난한 사람들이 소득의 혜택을 보리라는 보장은 없다. 꼭대기에서 늘어난 부가 아래로 ‘똑똑 떨어져(trickle down)'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을 줄지도 모르지만, 이는 보장된 결과가 아니다. 시장에 맡겨 두면 상류층의 부가 밑으로 흘러내리는 정도가 미약하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경제정책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1989~2006년 사이 미국 총소득 증가의 91%가 소득 순위 상위 10%에 흘러 들어갔다. 더욱이 상위 1%가 차지한 몫은 총소득 증가의 59%에 달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강력한 복지 시스템을 갖춘 국가들의 경우 설사 ‘부자에게 유리한 재분배’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에 따른 성장의 혜택을 사회전체로 확산시키는 것이 훨씬 쉽다. 세금과 소득 이전이라는 강력한 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세금 징수와 소득 이전이 시행되기 이전의 소득 분배를 보면 벨기에와 독일은 미국보다 더 불평등하고 스웨덴과 네덜란드는 미국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서 상당한 양의 물이 밑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복지국가라는 전기펌프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 재분배’가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많다는 점이다. 불황기에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 재분배’이다. 소득이 적을수록 가용 소득에서 더 많은 몫을 지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저소득 가계에 복지 지출을 늘리는 방식으로 10억 달러를 추가 지원할 때 얻을 수 있는 경기 활성화 효과는 같은 금액을 부자들에게 감세해줄 때보다 더 크다. 노동자들은 추가 소득을 자신의 교육이나 건강에 더 투자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노동 생산성과 경제 성장이 촉진될 수 있다. 더욱이 소득 분배가 보다 평등해지면 파업이나 범죄가 줄어들면서 ‘사회적 평화’가 이루어지고 이는 다시 투자를 촉진한다. 사회적 평화가 이루어지면 재화를 생산하고 부를 생성하는 과정이 방해받을 위험이 줄어든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소득 불평등의 수준이 낮으면서 빠른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던 ‘자본주의 황금기’(1960~1970년대)는 이 같은 메커니즘이 작동한 덕분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부자들에게 유리한 소득 분배가 투자와 성장을 가속화시킨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이런 현상이 있었던 적도 별로 없다. 설령 성장률이 높아지는 경우에도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부가 아래로 분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약 부자들에게 주어지는 더 많은 부가 사회 전체의 혜택으로 파급되게 하려면 국가는 각종 정책 수단, 예를 들어 부자 감세를 허용하는 대신 투자를 조건으로 제시하는 정책수단을 통해서 투자를 더 많이 하도록 함으로 해서 높은 성장을 이루어내야 한다.
p.198 thing 14 미국 경영자들은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최고 경영진이 받는 보수는 터무니없이 많다. 이는 어디까지나 시장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을 영입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보수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 매출이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거대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수 백 만 달러, 때로 수 천만 달러를 지불해 좋은 인재만 끌어올 수 있다면 확실히 그만한 돈을 쓸 가치가 있다. 그렇게 영입한 경영자가 좋은 결정을 내리면 수억 달러에 이르는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막아서는 안 된다. 결국 역효과만 날 뿐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는 너무 높다. 우선 전임자들에 비해서 너무 높다. 동시대 노동자들의 보수 평균과 비교해서 현재의 CEO들의 보수는 1960년대 CEO들에 비해 10배를 더 받는다. 상대적으로 1960년대 CEO들의 경영실적이 훨씬 좋았음에도 말이다.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는 다른 부자 나라 경영자들과 비교해도 너무 높다. 비슷한 규모와 실적을 올리는 다른 나라 회사 경영진들에 비해 미국경영자들은 절대기준으로 많게는 20배 더 받는다. 이들은 보수만 지나치게 많이 받는 게 아니라 경영 부진에 대해서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게다가 실제로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가 완전히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 경영자 계층이 지닌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힘은 자신들의 보수를 결정하는 시장 자체를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p.199 ● 경영자의 보수와 계층 갈등의 정치학
급여, 보너스, 연금, 스톡옵션을 포함해 미국 CEO들이 받는 평균 보수는 급여, 복리후생비를 합친 노동자들의 평균 보수보다 300~400배 정도 많다. 이 점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바마도 이를 자주 비판한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이러한 보수 격차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CEO가 보수를 300배 더 받는 것은 일반 직원에 비해 회사에 300배 더 보탬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바마처럼 경영자들의 보수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계층 갈등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포퓰리스트일 뿐이라는 것이다. 생산성이 낮은 사람들이 생산성에 따른 보수 지급을 용납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문제는 경영자들의 능력이 현재와 같은 보수 차이를 정당화할 만큼 뛰어난가 하는 것이다. 미국 CEO들과 노동자들의 평균 보수를 비교해보면 1960~1970년대 동안에는 30~40대 1정도 였다. 이 비율은 1980년대 초반부터 급격하게 상승하여 1990년대 초반에는 100대 1, 2000년대에는 300~400대 1 수준에 도달했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해보면 미국 노동자들의 보수는 1970년대 이후 실질적으로 거의 오르지 않았다. 개별 보수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지만 가구당 수입은 높아졌다. 이것은 점점 더 많은 가정이 맞벌이에 나섰기 때문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의 논리, 즉 모든 사람은 각자의 생산성에 따라 응당의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에 충실하자면 CEO 대 노동자의 보수가 30~40배에서 300~400배가 되었다는 말은 미국의 CEO들이 1960~1970년대에 비해 10배나 더 효율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좋은 교육과 훈련 덕분에 미국 경영자들의 자질이 한 세대 전에 비해 자질이 10배 좋아졌다는 것이 있을 법한가? 보수 차이의 변화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유는 최근 들어 기업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CEO의 역할도 더 커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코넬대학의 프랭크 교수는 100억 달러의 이익을 남기는 기업이라면 유능한 CEO의 좋은 판단으로 3000만 달러의 이익을 더 남기는 건 쉬운 일이라고 설명을 했고, 이 논지는 많이 인용되고 있다. 3000만 달러를 더 벌어준 CEO에게 500만 달러를 더 주는 게 문제가 되겠냐는 암시가 깔려있다.
이 주장에는 일리가 있지만, 기업 규모가 커진 것이 CEO의 보수가 오른 주된 이유라면 미국 기업들의 규모는 꾸준히 커지고 있었는데, 왜 CEO의 급여는 1980년대에 와서야 갑자기 인상되기 시작했을까? 또한 같은 논리를 노동자에게도 어느 정도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현대 기업은 분업과 협력을 적절히 조화시켜서 돌아간다. CEO만 기업의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thing 3, 15) 기업 규모가 커짐에 따라 노동자도 기업 이익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우수한 직원을 채용하는 일이 갈수록 중요해짐으로 기업마다 인사관리부서를 두고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최고 경영진의 결정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에 CEO의 보수가 올라야 했다면, 비슷한 규모의 기업을 경영하는 일본이나 유럽의 CEO들이 훨씬 적은 보수를 받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미국을 제외한 13개 선진국 기업의 CEO들이 받는 보수 평균은 미국 기업 CEO 보수 평균의 44%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숫자들도 국가별 CEO의 보수에 스톡옵션을 포함시키면 보수 총액은 보통 3~4배, 많게는 5~6배 뛴다고 한다. 결국 미국 CEO의 보수에 스톡옵션을 포함하면, 스톡옵션을 포함하는 일본 CEO의 보수는 미국 CEO의 보수에 5%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 CEO들이 해외 CEO들보다 몇 배 더 많이 받으면서, 즉 몇 배 더 가치가 있으면서 왜 많은 산업부분에서 미국 기업들이 일본이나 유럽의 경쟁사들에 뒤지는 것일까?
일본과 유럽의 일반적 급여 수준은 미국과 비슷한데도 일본과 유럽 CEO 보수의 절대액은 낮다. 2005년 13개국의 노동자 급여 평균은 미국의 85%였다. 일본 노동자들은 미국 노동자들의 91%를 받는 반면에 일본 CEO들은 스톡옵션을 제외하면 미국CEO 보수의 25%밖에 받지 않았다. 스위스와 독일 노동자들은 미국 노동자들보다 보수가 오히려 더 높아서 각각 미국 노동자 평균 보수의 130%와 106%를 받는 반면에 CEO 보수는 미국의 55%와 64%에 지나지 않았다. 이 수치는 미국 CEO들이 훨씬 많이 받는 스톡옵션을 제외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미국 경영자들은 너무 비싸다. 미국 노동자들은 경쟁국에 비해 15%밖에 더 받지 않는 반면에 CEO들은 적게는 두 배 많게는 20배를 더 받는다. 그럼에도 미국 기업들의 실적은 일본과 유럽 경쟁사들과 비슷하거나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p.205 ● 동전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고 뒷면이 나오면 네가 진다
미국 다음으로 CEO 대 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곳이 영국이다. 영국 CEO들의 보수체계는 CEO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다. 과도한 보수 외에도 경영을 잘못했을 때 그에 따른 징계를 받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해고이지만 그럴 때에도 거의 대부분이 두둑한 퇴직금이 보장된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일을 잘못한 CEO에게 꼭 주지 않아도 될 혜택까지 주는 어리석은 기업이 있더라도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얼빠진 기업은 경쟁사에 밀려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시장의 압력에 의해 경쟁에 지고 만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비효율적인 관행은 경쟁과정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경영진에게 더 높은 인센티브를 주는 영미 기업들이 다른 나라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경영진에게 공정하지 못한 보수를 주는 관행이 시장에서 벌어지는 경쟁을 통해 없어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최근에 파산한 GM이 기울어 간다는 것은 최소한 30년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GM의 CEO들은 엄청난 보수를 챙겨갔고 아무도 이를 막지 못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엄청난 급여와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고용계약에 제재를 가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영미의 CEO 계층이 지난 수 십 년간 엄청나게 강해졌고, 강해진 데에는 엄청난 보수도 한몫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서로 상대방 기업의 임원을 겸직하고 사외이사들에게 제공하는 정보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이사회를 장악했다. 주주들은 배당금을 많이 받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고, 영미의 CEO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국의 노동당과 미국의 민주당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국에서는 특히 민간 부문의 CEO 출신들이 정부 부처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를 널리 전파하는 데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CEO 계층의 영향력은 2008년 금융위기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영국과 미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액수의 세금 수입을 자금난에 빠진 금융기관에 쏟아 붓게 되었을 때에도 그런 실패에 책임을 진 CEO들은 거의 없었다. 소수만이 물러났고 남아있는 CEO들의 급여도 크게 삭감되지 않았다. 공적 자금을 지원받은 금융회사 CEO들의 급여에 상한선을 두어야 한다는 소리가 미국의회에서 나오자 이들은 엄청나게 저항했고, 결국 이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영국과 미국의 납세자들은 정부의 긴급 지원을 받은 기업들의 사실상 주주가 되었음에도 저조한 실적을 낸 고용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납득할 만한 보수를 받도록 강제하지도 못하였다. 이것은 CEO 계층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반증하는 예라 할 수 있다.
시장은 비효율적인 관행을 사라지게 만드는 힘이 있지만, 이는 아무도 시장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야 그런 관행이 사라질지 모르지만, 일방적인 보수체계가 있는 동안은 경제 전반에 큰 손실을 끼친다. 노동자들은 계속되는 임금 하락 위협, 간단해진 해고절차와 정규직을 대체하는 임시직의 증가, 그리고 지속적인 다운사이징 등으로 압박을 받는 반면 CEO들은 이렇게 해서 창출된 추가 이윤을 주주들에게 분배해서 그들이 경영진의 과도한 보수를 문제 삼지 않도록 한다. 주주들의 입을 막기 위해 배당금을 극대화하려면 투자가 위축되고, 결국 기업의 장기적 생산 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경영진의 과도한 보수까지 보태면 영미 기업들은 국제 경쟁력을 잃게 되고, 결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만 없어지고 만다.
미국과 영국의 경영자 계층이 시장을 조종하고 자신의 결정이 부른 부정적인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강해진 마당에 그들에 대한 적절한 보수체계가 시장의 힘에 의해 결정되고, 또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p.209 thing 15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업가 정신은 역동적인 경제의 핵심이다. 신제품을 개발해서 수요를 창출할 기회를 찾는 기업가들이 없이는 경제는 발전할 수 없다. 경제가 활력을 잃은 나라들을 살펴보면 기업가 정신의 결여가 그 원인의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이 태도를 바꾸고 적극적으로 수익을 올릴 기회를 찾으려 하지 않으면 그 나라 경제는 영원히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저 생존을 위해서라도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면 구두 닦는 아이는 두세 명, 행상은 너덧 명 된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개인들에게 기업가 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산을 할 수 있는 기술과 현대식 기업 같은 발달된 조직이 없어서이다. 개인의 창업을 돕는다는 목표를 내걸고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의 돈을 빌려 주는 마이크로 크레디트(미소금융) 제도가 의도한 만큼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기업가 정신이 갖는 한계를 짐작할 수 있다. 20세기에는 특히 기업가 정신을 구현하려면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집단적 조직력의 부족이 개인의 기업가 정신의 부족 현상보다 경제발전을 가로 막는 더 큰 장애 요인인 것이다.
p.210 ● 프랑스의 문제는......
개발도상국 출신이거나 그런 나라에서 한동안 살아 본 사람이라면 개발도상국이 기업가 정신을 지닌 사람들로 넘쳐난다는 것을 잘 안다. 미국 대사관 비자 담당 창구 앞에서 줄서 주는 사람, 돈을 내지 않으면 주차된 차에 해코지 하는 깡패들과 이 차를 지켜주는 서비스, 길모퉁이에 노점을 차리고 음식을 팔 수 있는 권리, 엎드려 구걸할 수 있는 자리까지도 돈 주고 살 수 있다. 형태야 어찌 되었든 모두 인간의 창의성과 기업가 정신의 극단적인 모습들이다.
선진국 사람들의 기업가 정신은 이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선진국 사람들은 대부분 기업에서 고도로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업무를 수행한다. 너무 어렵고 위험이 따르는 자기 사업을 실행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 결과 선진국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지닌 기업가적 비전을 실행에 옮기며 평생을 보낸다.
OECD의 자료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는 비농업 인구의 30~50%가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최빈국에서는 1인 자영 업체 종사자의 비율이 더 높아져서 가나는 66.9%, 방글라데시는 75.4%가 되고, 베냉은 무려 88.7%에 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선진국에서는 비농업 인구의 12.8%만이 자영업에 종사한다. 특히 노르웨이는 6.7%, 미국 7.5%, 프랑스 8.6%를 기록한다.
같은 자영 기업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개발도상국에서는 선진국보다 기업가 정신을 더 발휘해야 한다. 기업운영에서 일이 꼬이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전기의 갑작스런 중단으로 생산 계획이 차질을 빚고, 달러화 환전 허가가 지연되어 기계 수리 부품을 세관에서 통관시켜 주지 않으며, 도로 사정이 나빠 트럭의 원자재 배달이 늦어지고, 하급 지방 관리들이 규정을 내세워 괴롭히며 뇌물을 요구한다. 이 모든 장벽을 헤쳐 나가려면 민첩한 판단력과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은 필수이다. 평범한 미국 기업가에게 프놈펜에서 회사를 경영하라고 하면 아마도 일주일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기업가 정신을 요하는 자영업 등의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이 훨씬 많다. 이렇듯 기업가 정신이 월등하게 더 높은 나라들이 더 가난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p.213 ● 위대한 희망, 마이크로 파이낸스의 등장
가난한 나라의 발전 동력은 정부에 등록되지 않은 소규모 사업체들로 이루어진 ‘비공식 부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견해가 주목받고 있다. 비공식 부문의 기업가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비전이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비전을 실현할 자금을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반은행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른 대부업체에서는 극히 높은 이자를 요구하고 있다. 마이크로 크레디트(미소금융)의 소액 대출금은 음식 파는 노점상을 열게 해주고, 휴대전화 사업을 할 단말기를 구입하게 해주며, 닭을 사서 계란 장사를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흔히 마이크로 크레디트를 창안한 사람이 무함마드 유누스라고 알려져 있다. 1983년 그는 고국인 방글라데시에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 특히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가난한 여성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도 95%라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상환율을 자랑하고 있다. 1990년대 초 그라민 은행, 볼리비아의 비슷한 은행들의 성공사례가 알려지면서 마이크로 크레디트, 그리고 대출뿐 아니라 저축과 보험까지 곁들인 마이크로 파이낸스는 빠른 속도로 퍼졌다.
마이크로 크레디트 덕분에 가난한 사람들은 기업가적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어 빈곤에서 탈출하게 된다. 이들은 더 이상 정부나 외국 원조기관에서 나눠주는 구호품에 의지해서 살아가지 않아도 되니 독립심과 자긍심도 생긴다. 가난한 여성들은 직접 돈을 벌 수 있으니 남편과도 더 대등한 관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빈민층에 보조금을 지원하지 않아도 되니 정부 예산에 대한 압박도 줄어든다. 이 과정에서 창출된 부는 비공식부문 자영업자들만 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전반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마이크로 파이낸스의 열기는 2000년대 중반에 대단히 뜨거워졌고, 유엔은 2005년을 국제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해로 정했다. 유누스 교수와 그라민 은행이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2006년은 가히 마이크로 파이낸스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p.216 ● 위대한 환상
마이크로 파이낸스가 정부 보조금이나 해외원조를 받지 않게 됨으로써 고율의 이자율을 매기게 되자 많은 비판이 쏟아지게 되었다. 1990년 말 보조금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자 그라민 은행도 2001년 회사를 재정비하고 40~50%의 이자율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자가 많게는 100%까지 붙는 상황에서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을 정도로 이윤을 낼 사업은 거의 없다. 그러자 마이크로 크레디트 자금의 대부분은 원래 목표였던 가난한 사람들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는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소비에 사용되었다.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자금 지원을 받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한두 가지 사업을 해본 사람들이었다. 동기부여가 확실하고, 사업에 필요한 기술도 있고 시장의 압력도 충분한 데다 사업에 온 정력을 기울이는데도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예를 틀어 1997년 그라민 은행은 지역 여성들이 휴대전화 대여업을 할 수 있도록 소액 대출을 해주었다. 1인당 연평균 소득이 300달러인 나라에서 750~1200달러를 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소액 대출을 받아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 경쟁이 치열해지자 수입은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론으로 얘기해서 전화 대여업의 수익성이 떨어지면 이동전화를 제작하거나 전화로 할 수 있는 게임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감소한 수입을 보충하면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소액 대출로 소 한 마리를 산 목축업자는 똑같이 소를 한 마리씩을 산 다른 목축업자 300명이 생산해내는 우유 때문에 우유 값이 바닥을 치게 되어 망하는 도리밖에 없다. 버터를 생산해서 독일로 수출하고, 치즈를 생산해서 영국으로 수출하려 해도 그에 필요한 테크놀로지, 조직력, 자금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주저앉는다.
p.219 ● 이제 영웅은 그만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개개인의 기업가적 에너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부자 나라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기업가적 에너지를 집단적 기업가 정신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기업가 정신은 탁월한 비전과 굳은 결의를 지닌 영웅에게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기업가 정신이라는 것은 점점 더 공동체적으로 함께 이루어 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에디슨이나 빌 게이츠처럼 특별한 인물들도 수없이 많은 제도적, 조직적 지원을 받았다. 이들이 지식을 습득하고 자신의 생각을 실험해 볼 수 있도록 해준 과학 인프라, 크고 복잡한 조직의 기업을 설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 회사법과 관련법, 이들이 고용한 엔지니어·경영진·노동자 등을 양산한 교육시스템,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해주는 금융 시스템, 새로운 기술을 보호할 수 있는 특허법과 저작권법 등이 모두 그 예이다. 여기에 더해 여러 나라 흩어져 있는 동일 업종의 동업자들이 협력하여 공동 투자와 마케팅을 추진할 수 있다. 예로써 유럽의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의 낙농업자들이 정부의 도움을 받아 조합을 조직해서 우유를 분리하여 크림, 버터 등을 만들어 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중소기업들은 정부의 보조를 받아서 산업협력 단체를 만들어 혼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연구개발 및 해외 마케팅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다.
기업 차원에서도 부자 나라에서는 기업가 정신이 집단적으로 발휘된다. 이제는 더 이상 에디슨이나 빌 게이츠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개인이 경영하는 기업은 거의 없고 전문 경영인들이 회사 경영을 맡고 있다. 지난 세기 동안 영웅적인 기업가는 점점 드물어지는 대신 슘피터가 기업가 정신의 핵심요소로 꼽는 생산, 공정, 마케팅상의 혁신과정은 점점 더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로써 세계경제는 2차 대전 이후 그 전 기간에 비해 더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일본 기업에서는 지위가 낮은 생산라인 노동자들의 창의성까지 흡수할 수 있는 제도적 메커니즘이 개발되어 있다.
한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의 노력이나 재능보다는 공동체 차원에서 효율적인 조직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웅적인 기업가들이 등장하는 신화를 거부하고 집단 차원의 공동체적 기업가 정신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조직과 제도를 마련하도록 돕지 않으면 가난한 나라들이 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p.223 thing 16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시장 참가자들은 모두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합리적이다. 기업은 무엇이 가장 이로운지를 잘 알고, 자기와 관련된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정부가 이들의 행동을 제한하려 하면 최상의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정부가 기업의 하려는 행동을 못하게 하거나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최선의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관련된 일들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제한된 합리성’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처리해야 할 문제의 복잡성을 줄이려면 일부러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고, 실제로 많은 경우 그렇게 하고 있다. 복잡한 금융 시장과 같은 분야에서 정부규제는 효력을 발휘한다. 정부가 보유한 정보가 우월해서가 아니라 정부규제를 통해 선택의 범위를 제한하여 문제의 복잡성을 줄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p.224 ● 시장은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개인과 기업들은 다른 누구와 소통 없이 제각기 따로따로 어떤 결정을 내리지만, 이런 각각의 결정들은 누가 일부러 나서서 조정하지 않아도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본다. 그들은 바로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상징되는 자유 시장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경제 주체들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즉 각 개인이 자기의 현 상황과 이를 개선하는 방법을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비합리적일 수 있지만 시장이 그들을 처벌함으로써 비합리적인 행동이 사라지게 만든다. 예를 들어 높은 가격이 매겨진 엉터리 금융상품을 매입하는 ‘비합리적’ 행위를 하는 사람은 낮은 수익률을 거둘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결국은 자신의 행위를 바꾸거나 시장에서 퇴출당할 것이다. 이런 가정을 근거로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개인에게 맡겨 두는 것이 시장 경제를 운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물론 시장이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밀턴 프리드먼 같은 자유 시장 경제학의 거두조차 시장이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시장실패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사례가 공해문제이다. 사람들이 공해를 ‘과잉생산’하는 것은 공해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시장 실패는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드문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시장 실패에 대한 처방은 시장의 힘을 더 활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공해를 줄이려면 ‘공해를 거래하는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사례 중의 하나가 공해 물질 ‘배출권 거래제’인데, 기업들에게 공해물질을 일정 정도 배출할 권리를 주고, 이 권리를 필요에 따라 사고팔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달리 정부가 개입하더라도 정부 역시 실패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시장 실패를 바로 잡으려 해도 그에 필요한 정보가 부족하다. 또 정부 자체가 국가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는 정치인과 관료들에 의해 운영될 수 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정부 실패의 비용은 시장실패이 비용보다 더 크게 마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시장 실패가 존재한다고 해서 정부의 개입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지적한다.
시장 실패와 정부 실패 중 어느 것이 더 문제인가에 관한 논쟁은 뜨겁게 진행 중이므로 여기서 결론짓기는 힘들다. 그러나 최소한 자유 시장의 문제가 단지 개인의 합리적 행동들이 집단적으로는 비합리적 결과를 낳는 것, 즉 시장 실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합리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존재라는 대전제를 부정하고 나면 시장과 정부의 역할에 대해 다른 접근법이 필요해진다.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
p.226 ● 네가 그렇게도 똑똑하다면...
1997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는 파생 금융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낸 로버트 머튼과 마이런 숄즈 였다. 1998년 LTCM(long term capital management)이라는 미국의 거대 헤지편드가 러시아 금융위기로 말미암아 붕괴위기에 직면했다. 그 규모가 워낙 커서 정말 파산이라도 하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파멸할 판이었다. 연방준비은행이 나서서 십여 개 채권 은행의 팔을 비틀어서 해당 펀드회사에 돈을 수혈하도록 해서 미국 금융시스템이 붕괴되지는 않았다. 결국 LTCM은 2000년에 청산되었는데, 머튼과 숄즈는 LTCM의 이사로 참여하여 직접 업무에 관여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자산가격결정(asset-pricing) 모델을 활발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LTCM의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숄즈는 1999년에 PGAM(platinum grove asset management)이라는 또 다른 헤지편드를 설립했다. 투자자들은 머튼-숄즈 모델의 실패가 러시아 금융 위기라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특수한 사건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노벨위원회도 인정한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8년 11월 PGAM은 파산상태에 이르렀고 투자자들의 투자금 인출은 동결됐다. 그 과정에서 투자자들의 유일한 위안이라면 노벨상 수상자에게 당한 사람이 그들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과거 숄즈의 파트너였던 머튼이 최고과학책임자로 일했던 트린섬 그룹 또한 2009년 1월 파산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실수를 한다. 그러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 다른 것도 아닌 자산가격결정에 대한 연구로 상을 받은 사람들마저 금융시장을 읽어 내지 못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사람은 늘 자기에게 가장 이로운 최선의 선택을 하는 만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된다’고 가정하는 자유 시장 경제학의 경제 원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앨런 그린 스펀조차 의회 청문회에서 “기업들, 특히 은행들의 이기심이 주주와 기업 자본금을 가장 잘 보호해 줄 것이라고 가정한 것은 실수”였다고 말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존 말코비치, 전설적 투수 샌디 쿠 팩스 등이 버니 메이도프같은 사기꾼에게 돈을 맡긴바 있다. 그 외에도 금융 전문가인 펀드 매니저들, 큰 은행의 임원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들까지 메이도프가 벌인 똑같은 사기극에 놀아났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메이도프나 앨런 스탠포드 같은 사기꾼들의 존재만이 문제가 아니다. 합법적인 금융업에 속하는 은행가나 여타 금융 전문가들이 상황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예가 비일비재했다. 2008년 여름 한 은행가가 “이제부터 우리는 대출에 관련된 리스크가 파악될 때에만 대출할 것입니다.”라고 말해 재무장관을 경악시켰는데, 그렇다면 당시까지 그들은 리스크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출을 해준 것이다. 미국 보험회사 AIG가 파산하기 겨우 6개월 전, 이 회사의 최고 재무책임자 조 카사노는 “경솔하게 들릴지 몰라도 적어도 신용부두스왑 거래에서 1달러라도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는 상상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이 발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AIG는 파산했는데 본업인 보험사업이 아니라 신용부도스왑 거래에서 441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금융 경제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 은행장, 날고 긴다는 펀드 매니저, 명문대학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유명 인사들까지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가정 위에서만 성립하는 경제학 이론을 받아드릴 수 있는가? 결국 인간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도 될 만큼 똑똑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똑똑하지 않은데 시장에 대한 규제는 가능한 것일까? YES이다. 사실은 그 이상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p.230 ● 최후의 르네상스적 인물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몬은 처음 정치학자로 출발하여 행정학 연구로 바꿔서 『행정행태론』이라는 그 분야의 고전을 썼다. 그는 조직행동론, 경영학, 경제학, 인지 심리학, 인공지능 연구로 관심을 돌렸다.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스스로를 조직하는지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먼은 우리의 합리성이 제한적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합리적이 되고자 노력하지만 합리적으로 되기 위한 우리의 능력에는 심각한 제약이 있다. 이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여 우리의 제한된 지적 능력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사이몬은 주장한다.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자 할 때 흔히 맞닥뜨리는 중요한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를 처리하는 우리 능력의 한계이다. 인터넷 시대에 정보가 넘치는데도 정작 인간의 의사 결정 능력은 그리 향상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사이몬의 이론이 옳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불확실성이란 단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음은 물론 어떤 특정사안에 한정에서 여러 경우가 일어날 각각의 확률을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생의 여러 측면(죽음, 질병, 화재, 부상, 흉작 등)에 포함된 위험을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보험업의 근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확률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사안이 우리 삶의 일부분에 그친다는 것이다. 통찰력이 뛰어난 미국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와 영국의 케인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각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커녕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도 예측할 수 없다. 현대 경제학의 이론적 근간인 ‘인간의 합리적 행동’이란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이 복잡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도 제한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이몬의 대답은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범위와 복잡성을 줄이기 위해 선택의 자유를 의도적으로 제한하자는 것이다. 우리 중 대다수가 너무 많은 의사 결정을 너무 자주 해야 할 필요가 없도록, 즉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우리 삶에 ‘규칙적 일과(routines)'를 도입한다. 주중에 대부분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며, 아침식사로 비슷한 메뉴를 먹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이몬은 인간이 자신의 제한된 합리성을 극복하기 위해 규칙을 도입한다고 한다. 예로서 체스 게임을 들면, 64개의 칸으로 32개의 말을 움직이는 체스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 게임이다. 만약 주류 경제학에 나오는 초합리적인 존재라면 모든 말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경우와 또 그 각각의 경우에 따라 벌어질 상황을 계산한 뒤에 한 수씩 두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이몬이 지적한 대로 한 게임당 평균 10120에 달하는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에 이를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지닌 인간은 없다. 사이몬은 실제로 체스의 대가들은 경험을 토대로 어림짐작으로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몇 개의 가능성에만 집중해서 다음 말을 움직일 수를 고른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분석해야 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의 수를 줄여주는 것이다.
32개의 말이 얽힌 체스가 이렇게 복잡할진대 수십억에 이르는 사람과 수백만에 달하는 상품이 얽혀 있는 우리의 경제는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생활이나 체스 게임에서 ‘일상적으로 움직이는 행동 패턴’을 만들어 내고 기업은 ‘일정한 생산 공정’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선택의 폭과 고려해야 할 경우 수를 단순화하기 위해서이다.
기업들은 일정한 의사 결정 체계, 공식 규정, 관례 등을 만들어서 고려에서 제외한 경영 대안이 더 높은 이윤을 낼 확률이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대안의 수를 줄인다.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비공식적 규칙들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줄을 서는 관습이 그것이다. 이런 관습이 없다면 붐비는 버스 정류장에서 시민들은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지금 자기들이 서 있는 위치가 버스를 먼저 타는데 가장 유리한지 가늠하고 또 가늠해야 할 것이다.
p.234 ● 정부가 더 많은 정보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기업이나 개인 상황을 당사자보다 더 잘 알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정부 규제에 반대한다. 그러나 사이몬의 이론으로 설명하면 정부 규제가 유용한 이유는 정부가 피규제자보다 관련 상황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더 많이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thing12참조) 오히려 규제의 효용성은 행위의 복잡성을 제한해서 피규제자들이 보다 나은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에서 선명하게 입증되었다.
2008년 금융 위기 직전에 이른바 금융 혁신을 통해 모든 것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우리의 의사 결정 능력은 이런 복잡성에 압도당해 버렸다. 물밀듯이 쏟아져 나온 복잡한 금융 상품을 전문가마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금융회사의 최고 경영진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금융당국 역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온전히 알아채지 못했다. 이제야 핵심적 의사 결정권자들의 입에서 이런 사실들이 발설되고 있다.
앞으로 유사한 금융 위기를 겪지 않으려면 금융시장에서는 행위의 자유를 엄격히 제한할 필요가 있다. 금융상품의 복잡성으로 인해 전문가마저 그 내용과 영향을 알지 못하는 파생 금융 상품은 폐기되어 마땅하다는 이야기 이다. 이런 주장이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는 약품, 자동차, 전기전자 제품 등 다른 상품에는 줄곧 적용해 오던 조치이다. 일례로 어느 제약회사가 새로운 약을 개발했다고 해도 약의 효능이나 약품에 대한 인체의 반응은 대단히 복잡하므로 엄격한 검증 절차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금융 상품도 판매하기 전에 안정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러 제한적인 규칙을 만들어 우리의 선택을 의도적으로 한정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환경을 단순화시키지 않는 한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으로는 세상의 복잡성에 대처해 나갈 수 없다. 우리에게 규제가 필요한 이유는 정부가 관련 상황을 더 잘 알기 때문이 아니다. 규제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제한된 정신적 능력에 대한 겸허한 인정인 것이다.
p.237 thing 17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교육을 잘 받은 노동력은 경제 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교육수준이 높기로 유명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이루어 낸 눈부신 경제적 성공과 세계에서 가장 학력이 떨어지는 지역 중 하나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국가들의 경제적 침체를 비교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더욱이 지식이 부의 원천이 되는 이른바 ‘지식 경제’가 출현하면서 교육, 특히 고등 교육은 번영으로 가는 열쇠가 되었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높은 교육 수준이 국가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은 더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생산성 향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지식 경제라는 개념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역사적으로 지식은 언제나 부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탈산업화와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대다수 일자리에서 꼭 필요로 하는 지식 요건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지식 경제에 더 중요하다는 고등 교육도 그것이 경제 성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 나라의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교육 수준이 아니라 생산성 높은 산업 활동에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는 사회 전체의 능력이다.
p.239 ● 교육, 교육, 교육!
1997년 총선 기간에 교육을 최우선적인 공약으로 내세워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탄생하였다. 1980년대 이후 지식 경제의 부상을 목격한 후 전 세계가 교육이야말로 경제 번영의 열쇠라고 확신하였다. 하물며 굴뚝 산업이라 부르는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교육이 중요했는데 근육이 아니라 두뇌가 부의 원천이 되는 정보화시대에는 그야 말로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더 배운 사람은 생산성이 더 높다. 그러니 배운 사람이 더 많을수록 경제에서 생산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 전문 용어로 ‘인적 자본’이 가난한 나라에는 더 적다는 사실이 교육의 중요성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OECD국가들에서 학교 다니는 기간이 평균 9년인데 반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그 기간이 3년도 채 되지 않는다. 또 기적적인 성장을 이룬 일본,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와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교육 수준이 높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나라들의 교육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도 뛰어나다. 국제 수학 과학 성취도 평가나 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 프로그램에서 항상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p.240 ● 학교는 도대체 왜 다녀....
경제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 ‘상식’에 반하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
1960년 타이완은 문맹률은 46%, 1인당 국민소득은 122달러이었고, 필리핀의 문맹률은 28%, 1인당 국민소득은 200달러였다. 그러나 현재 타이완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필리핀의 거의 열 배에 달한다. 같은 시기 한국의 문맹률은 29%, 아르헨티나의 9%를 훨씬 웃돌았다.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아르헨티나의 1/5이었으나 이제는 3배가 되었다. 경제 실적을 결정하는 요인은 많다 위의 사례에서 교육이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의 주요 요인이었다는 신화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필리핀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는 교육수준이 더 높았음에도 경제적으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사례에서는 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고 해서 꼭 경제가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80~2004년 동안 이 지역 문맹률은 60%에서 39%로 눈에 띄게 감소했으나, 같은 기간 1인당 국민소득은 매년 0.3%가 떨어졌다. 교육이 그토록 경제발전에 중요하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하버드 대학의 랜트 프리쳇 교수는 2004년 발표한 논문에서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고 해서 경제 성장이 촉진된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결론지었다.
p.241 ● 역사도 몰라요 생물도 몰라요
배운 사람이 더 많으면 나라가 더 부자가 된다는 이 논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그토록 없는 이유는 교육이 우리가 믿는 것보다 경제의 생산성 향상에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은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하지 않음은 물론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 중에는 간접적으로라도 생산성 향상에 영향을 전혀 주지 않는 과목이 많이 있다. 문학, 역사, 철학, 음악 등이 그 예일 것이다. 경제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과목들은 시간 낭비이지만, 이를 가르치는 이유는 그것이 아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다 나은 시민으로 길러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생산성 향상에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수학이나 과학 과목은 노동자들이 하는 일하고는 별 관계가 없다. 생물이 편드 매니저가 되는 것에, 수학이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것에 아무 소용도 없다. 이런 과목과 상당히 관계가 있는 직종에서조차 실제 업무를 보는데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배운 것조차도 써먹지 못한다. 자동차 조립 라인에서의 일과 물리 시간에 배운 것과는 관계가 없다. 많은 직종에서 현장 실습과 도제 제도를 중시하는 것도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학교 교육이 한계가 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생산성과 연관이 있다고 간주되는 과목들마저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생산성 향상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이다.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한 나라의 수학 성적과 그 나라의 경제 실적은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국제 수학 과학 성취도 평가와 부자 나라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수학 성적은 매우 낮고, 노르웨이도 마찬가지다. 교육열이 높고 첨단 연구 분야에 뛰어난 이스라엘의 8학년 학생들은 노르웨이보다 못했고, 심지어 불가리아보다 점수가 낮았다.
p.243 ● 그렇다면 지식 경제는?
아이디어가 부의 원천으로 점점 확고히 자리 잡아가는 지식 경제 시대에 교육은 한 나라의 번영을 결정하는 중요 요인이 되지 않을까?
지식 경제라는 말이 전혀 새로운 게 아니고 우리는 항상 지식 경제 사회에서 살아온 것이다. 10C까지 중국이 가장 부강한 나라였던 이유는 다른 나라에 없는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이, 활자, 화약, 나침반 등 몇몇 이름난 것들 외에도 많은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9C 영국은 기술혁신을 선두에서 이끌면서 세계적으로 경제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2차 대전 패전에도 독일은 강력한 산업대국으로서 기술적, 조직적, 제도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의 중요도는 최근 들어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다.
인류가 전체적으로 지닌 지식의 양은 과거에 비해 훨씬 많아졌다. 그러나 많은 업종에서 평범한 노동자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알아야 하는 지식의 양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특히 선진국에서 더 그렇다.
선진국 노동자들 중 높은 교육 수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비숙련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수가 많아졌다. 슈퍼마켓에서의 상품 진열, 햄버거 만드는 일, 사무실 청소 등이 그 예이다. 이런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늘어갈수록 평균 교육 수준을 낮추어도 된다. 여기에 더해 경제가 발전할수록 기계가 더 많은 지식과 기술을 대체한다. 노동자들은 과거보다 자기가 하는 작업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생산성은 향상된다. 요즘 상점의 점원들은 덧셈을 못해도 바코드 기계가 그 일을 대신해준다. 가난한 나라의 대장장이는 보쉬회사나 블랙 앤드 데커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보다 금속의 성질을 더 많이 알 것이다.
이런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기계화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가들이 생산 공정을 최대한 기계화하여 노동자들을 비숙련화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노동자를 쉽게 대체할 수 있게 함으로써 노동자들을 통제하기기 쉬워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계화 과정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건 그 결과는 기술적으로 발달한 경제일수록 교육받은 사람을 덜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p.246 ● 스위스 패러독스
고급 직종의 노동자들은 더 많이 교육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 나라의 번영도를 결정짓는 것은 초등학교보다는 대학교의 질에 달려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지식 위주의 시대에서조차 고등 교육과 경제발전 사이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산업화된 나라의 하나이다. 그런데 대학 진학률은 선진국 중 가장 낮아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부자나라 진학률의 1/3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후 이 비율은 높아져서 2007년에는 47%가 되었지만 선진국 중에서 가장 낮다. 핀란드(94%), 미국(82%), 덴마크(80%), 한국(96%), 그리스(91%), 리투아니아(76%), 아르헨티나(68%)보다 훨씬 낮다는 점이 특히 흥미롭다.
가난한 나라들에 비해 이렇게까지 고등 교육을 등한히 하고도 스위스는 어떻게 가장 높은 생산성을 기록하는가? 대학 교육의 질에 큰 차이가 있어서 인가? 한국이나 리투아니아의 대학들이 스위스 대학만 못해서 대학 진학률이 낮아도 한국이나 리투아니아에 비해 스위스가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은 가능할지 몰라도 미국이나 핀란드와 비교하면 이 설명은 빛을 잃는다. 미국이나 핀란드 대학 교육의 질은 결코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스위스 패러독스’ 역시 교육의 생산성 효과가 낮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초중등 교육의 생산성 효과가 낮은 것은 이 시기의 교육이 자아실현, 모범시민 양성, 민족 정체성 함양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라면, 고등 교육의 생산성 향상효과가 낮은 것은 고등 교육의 기능 중 경제학에서 ‘분류’라 일컫는 기능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교육은 피교육자에게 생산성과 관련한 지식을 상당 정도 전수해 주지만, 또 하나의 기능은 그 피교육자들이 얼마나 고용에 적합한지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대학 교육을 마치고 전공과 맞지 않는 분야에서 일하면 대학 교육이 쓸모가 없겠지만,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의지가 강하며, 조직적 사고력이 있다는 신호가 된다. 대졸자를 모집하는 회사는 각 직원의 전문지식 보다는 이런 일반적 능력을 보고 직원을 채용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얻은 전문지식은 대부분 직장에서 수행할 업무와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대학 진학률 10~15%로도 세계 최고의 국민 생산성을 기록한 스위스의 사례를 고려할 때 그보다 더 높은 대학 진학률은 사실 불필요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설령 지식 경제의 등장으로 기술 요건이 많이 올라 스위스의 현재 대학 진학률 40%대가 하한선이라고 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미국, 한국,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대학 교육의 절반 정도는 기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인 ‘분류’과정을 위해 낭비되고 있다는 말이다.
p.249 ● 교육이냐 기업이냐
기초 교육과 고등 교육이 한 나라의 번영에 크게 이바지 하지 못한다면 교육의 역할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한다. 부자 나라의 경우 고등 교육에 대한 집착을 줄여야 한다. 이 집착 때문에 건전하지 못한 학력 인플레이션이 생겼고, 그 결과 많은 나라에서 대학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일어났다. 대학 교육이 생산성 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생산성 향상이 목적이라면 교육 말고 제대로 된 제도와 조직을 건설하는데 신경을 쓰는 것이 진정으로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 길이다.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구성원 개인의 교육 수준이 아니라 얼마나 각 개인을 잘 아울러서 높은 생산성을 지닌 집단으로 조직화할 수 있느냐에 있다. 이런 조직화의 결과는 보잉이나 폭스바겐과 같은 거대 기업일 수도 있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에 많은 세계적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일 수도 있다. 이런 기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투자와 리스크 감수를 장려하는 일련의 제도가 필요하다. 유치산업을 보호 육성하는 교역정책, 장기적인 생산성 향상을 위해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자본’을 제공하는 금융시스템, 제대로 된 파산법으로 자본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좋은 복지 정책으로 노동자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주는 제도, 연구개발과 노동자 훈련에 관한 공공 보조금과 규제 정책 등이 필요한 것이다.
교육의 진정한 가치는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재력을 발휘하고 더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교육과 국민 생산성 사이의 연관성이 약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경제를 발전시킬 목적으로 교육을 확장하면 크게 실망하게 된다. 교육에 대한 과도한 열의는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생산적인 기업과 그런 기업을 지원할 제도를 확립하는데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
p.252 thing 18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업은 자본주의의 심장이다. 기업이야말로 제품을 생산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활발한 기업 활동이 없으면 경제도 활력을 잃고 만다. 따라서 기업에 좋은 것은 나라 경제에도 좋다. 세계화와 함께 국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기업의 설립과 경영을 어렵게 만들거나 기업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만드는 나라는 투자와 일자리 창출의 기회를 잃게 되고 결국은 뒤떨어지고 만다. 정부는 기업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기업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국민 경제에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규제가 기업에 해로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천연자원이나 노동력과 같이 기업들 모두가 필요로 하는 공동의 자원이 파괴되지 않도록 개별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기업 부문 전체에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기도 한다. 또 각 개별 기업에는 단기적으로 손해를 끼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기업 부문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규제도 있을 수 있다. 노동자 교육 규정 같은 것이 그런 예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 규제의 내용이지 양이 아니다.
p.253 ● 디트로이트는 어떻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나?
사람들은 디트로이트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디트로이트 지역의 자동차 회사들을 무기 공장으로 전환해서 무기의 대부분을 생산하였다. 디트로이트로 상징되는 미국의 산업 역량이 뒷받침해 주지 않았더라면 유럽 전역과 적어도 소련의 서쪽 지역은 나치에 점령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역사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나치 독일이 전쟁 초반에 이른바 전격전(Blitzkrieg)으로 알려진 신속한 이동 능력 덕분에 성공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독일군의 이 뛰어난 기동성은 대규모 동력화 덕분에 가능했는데, 이와 간련된 많은 기술이 다름 아닌 GM(1929년 GM이 인수한 오펠(독일?)을 통해)에서 나왔다. GM은 법을 어기고 전쟁 기간 내내 군용차는 물론 비행기, 지뢰, 어뢰까지 제작하던 오펠과의 관계를 비밀리에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GM은 전쟁을 하는 양 진영에 동시에 무기를 대면서 막대한 이윤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빅3로 통하는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업체 중에서도 당시 GM은 포드와 크라이슬러보다 훨씬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GM은 미국 최대의 자동차 업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매출액 기준으로 미국 최대의 기업이 되었다. GM의 CEO를 지내다가 1953년 국방장관에 임명된 찰리 윌슨이 임명 청문회에서 기업 경력과 공직 생활 사이의 상충 가능성에 대해 묻자, 그는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논리는 반박하기 힘들어 보인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민간 기업이 부와 일자리, 세수입을 창출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GM은 규모도 크고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는 기업이어서 그 기업의 성패와 운명이 경제 전반에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수많은 납품 업체, 거기에 고용된 노동자, 이 노동자들이 구매할 상품의 생산업체 등에 미치는 거대 기업 하나의 경제적 영향은 한이 없다. 그래서 거대 기업의 경영 성적이 국민 경제 번영에 특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가 폭넓게 수용되지 못하고, 1929년의 세계 대공황과 1970년대 사이에는 민간 기업을 의혹의 눈으로 보는 분위기가 있었다. 기업의 이윤 추구 행위는 정의, 사회적 융화, 약자에 대한 보호, 심지어 국가의 영광과 같은 보다 숭고한 가치를 위해 규제될 필요가 있는 반사회적 요소라고 간주되었다. 그 결과 기업설립에 대해 허가제가 도입되었다. 일부에서는 국가 발전을 위해 내켜하지 않는 기업들을 억지로 특정 산업 부문에 진출시키기도 했다.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보존하고 거대 기업으로부터 ‘작은 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규모 농장, 공장, 소매점 등이 활발한 시장부문에는 대기업 진출을 금지했다. 노동자 보호를 위해 노동 규제들이 도입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기업 활동에 저해가 될 정도로 소비자 권리가 신장되었다.
친기업적 성향의 사람들은 이 모든 규제가 거대 기업에 해를 끼쳤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손해를 입힌다고 주장한다. 다 같이 나누어 먹을 파이의 크기가 줄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고 새 분야를 개척할 능력을 제한하는 이 규제들은 전체적인 생산성 향상을 둔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들은 반기업적 논리의 오류가 명백히 들어나자 결국 197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친기업적 정책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 이후에는 공산주의 국가들조차 민간 부문을 옥죄는 정책을 포기했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p.256 ● 거인이 어떻게 쓰러졌나.....
국방장관 찰리 윌슨의 발언이 있은 지 50년이 지난 2009년 여름 GM은 파산했다. 국영기업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 미국정부였지만, 결국 GM을 인수해서 대규모 구조 조정을 실시한 다음 새로운 기업으로 재탄생시켰다. 이 과정에서 576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세금이 들어갔다.
GM구제는 미국 국익을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GM은 규모도 크고 연관된 기업이 대단히 많으므로 고용 시장과 수요에 엄청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당시의 금융위기를 더 악화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GM은 어떻게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GM은 1960년대 독일, 일본, 한국에서 수입된 차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자, 경쟁자들보다 더 좋은 차를 생산하려 하지 않고 손쉬운 길을 선택했다.
먼저 GM은 경쟁자들이 덤핑을 비롯한 불공정 무역행위를 한다고 비난하면서 미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일본차에 대한 쿼터제를 도입하고 경쟁사들의 본국 시장을 개방하도록 했다. 1990년대에는 이런 조치로도 GM쇠퇴를 막을 수 없다고 보고, 자동차 부문의 부진을 만회하고자 금융자회사인 GMAC를 키웠다. GMAC는 자동차 구매에 따른 금융업무라는 고유 업무 범위를 넘어서 영리 목적의 금융 거래를 시작했다. GMAC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2004년에는 GM 수익의 80%가 GMAC에서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GM은 가격경쟁력을 갖춘 좋은 품질의 차를 만들지 못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GM은 근본 문제의 해결보다는 스웨덴의 사브, 한국의 대우와 같은 규모가 작은 외국 경쟁 업체를 사들였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GM이 과거에 누렸던 기술적 우위를 되찾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시 말해서 지난 40년 동안 GM은 자사의 쇠퇴를 막기 위해 더 나은 차를 만드는 일 이외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러한 GM의 결정은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으나, 미국경제에는 좋지 않은 결정이었다. 결국 GM을 구제하느라 미국 납세자들이 막대한 금액을 떠안았으니 말이다. 보호무역을 위한 로비를 하고 더 작은 경쟁사들을 사들이는 한편 금융 분에에 손을 뻗치는 대신, 더 나은 차를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기술과 설비에 투자했어야 했다.
장기적으로 GM을 살리는 일을 하기보다는, GM의 경영진들은 노동자, 하청기업, 하청기업의 고용인들과 같이 상대적으로 약한 ‘이해 당사자’들을 쥐어짜는 반면 생산성 향상에는 투자하지 않음으로써 높은 이윤을 창출하고, 그 대가로 말도 안 되게 CEO들이 높은 보수를 챙기는 한편, GM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높은 배당금과 자사주 매입 등의 방법으로 주주들의 입을 막았다. 주주들은 오히려 이를 조장하기까지 했다.
GM의 사례는 기업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은 충돌할 가능성에 대한 유익한 교훈을 준다. 즉 기업에는 좋아도 국가에는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해 경영진이나 주주들에게는 좋은 것이 노동자나 납품업체 등 다른 당사자들에게는 좋지 않을 수 있다. 이는 결국 단기적으로 기업에 좋은 것이 장기적으로는 기업에 결코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독자들은 이러한 것이 미국에만 국한되는 예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과소규제가 문제를 일으켰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과다규제가 문제 아닌가?
p.259 ● 299가지 허가
1990년대 초 홍콩의 경제 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한국에서 공장을 하나 열려면 199개 기관에서 299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도 지난 30년간 연평균 6%의 놀라운 성장을 기록했다며 이것이 수수께끼 같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겉으로 보기에 엄청난 규제가 있으면서도 활력이 넘치는 경제 성장을 이룩한 나라는 한국만이 아니다. 일본과 타이완도 이와 비슷했다. 중국 경제 또한 지난 30년간 엄격한 규제 하에 빠르게 성장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해 규제 완화 조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들 나라에서는 과도한 규제가 있었던 1960~1970년대의 성장률보다 규제가 완화된 1980년대 이후 성장 속도가 훨씬 더 떨어졌다.
사업가들은 결국 돈을 충분히 벌 수 있다는 계산이 서면 299개의 허가를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수수께끼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좋은 사업 기회라면 299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고충을 감수하고서라도 너도 나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반대로 별로 돈을 벌 확률이 없는 곳에서는 29개의 허가받는 것도 너무 성가셔 보일 것이다.
이보다 저 중요한 점은 기업 활동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이유는 많은 경우 정부규제가 실제로는 기업 활동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단기적으로 기업 활동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모든 기업이 함께 사용해야 하는 공유 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과밀한 어류 양식을 규제하면 개별 양식업자의 이윤은 줄어들지만, 모든 어류 양식업자들이 이용해야 하는 수질을 보호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저임금의 어린이 고용을 금지하면 개별 기업의 이윤은 줄어든다. 그러나 어린이 고용을 허용함으로 인해 어린이의 육체적 정신적 발육을 저해하면 장기적으로는 노동력의 질을 떨어뜨린다. 아동 노동 규제는 장기적으로는 기업 부문 전체에 도움이 된다. 또 다른 예로 은행의 공격적 대출을 금지하면 개별은행의 이윤은 줄어든다. 그러나 모든 은행이 공격적 대출을 하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처럼 금융 시스템 자체가 붕괴될 위험이 높아져 결국 모든 은행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은행들에 대한 규제가 장기적으로 모든 은행을 돕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정부 규제는 개별 기업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저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만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규제는 개별 기업의 이윤에는 부합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산업 부문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조치를 강제로 취하게 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예를 들어 기업은 노동자 교육에 충분히 투자하지 않고 다른 기업에서 기껏 훈련시켜 놓은 사람을 스카웃하고자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서 모든 기업에게 강제로 교육을 시키도록 하면 전체 노동력의 질이 올라가고 궁극적으로 모든 기업이 혜택을 보게 된다. 또 다른 예로 해외에서 기술을 수입해야 하는 개발도상국의 경우 어느 기업이든 낡은 외국 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다. 이 기술은 단기적으로 국내 경쟁자들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나 장기적으로는 장래성 없는 기술에서 벗어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정부 규제는 장기적인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개별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제가 산업 부문 전체의 집단적 이익, 나아가서는 나라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규제들 중에는 반기업적인 것보다 친기업적 성격을 띤 것들이 많다. 많은 수의 규제들이 기업 모두가 사용하는 공유 자원을 보존하고, 장기적으로는 산업 부문 전체의 집단적 생산력을 향상할 수 있는 기업 활동을 장려하는 기능을 한다. 결국 문제는 규제의 절대량이 아니라 규제의 목적과 내용이라는 점이다.
p.263 thing 19 우리는 여전히 계획 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경제 계획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복잡한 현대 경제 시스템에 계획이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수익 창출의 기회를 노리는 개인과 기업에 기반을 둔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서만이 복잡한 현대 경제를 지탱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무엇인가 계획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계획은 적을수록 더 좋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도 계획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공산주의 경제의 중앙 계획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의 정부 역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모든 자본주의 정부는 연구개발과 인프라 투자에 필요한 재원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고 있고, 또 대부분의 자본주의 정부가 국영 기업의 사업방향을 정하는 방식으로 경제의 상당 부분을 계획한다. 부문별 산업 정책을 통해 미래의 산업 구조를 계획하는 경우도 많으며, 심지어 유도 계획(indicative planning)을 통해 국민 경제의 미래 모습까지 설계하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국경을 넘나들 정도로 큰 규모의 위계질서를 갖춘 대기업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기업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입각해서 경제 활동을 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계획의 수립 여부가 아니라 적절한 수준에서 적절한 계획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p. 264 ● 로켓을 만드는 오트볼타
1970년대 서구 외교관들은 소련을 ‘로켓을 만드는 오트볼타’라 불렀다. 모욕적인 이름이다. 오트볼타는 세계 최빈국이 아니었음에도 소련 때문에 가난한 나라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 별명에는 소비에트 경제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다.
소련은 우주를 개발하고 대륙간 탄도 미사일과 핵잠수함은 대량 생산해내지만, 괜찮은 TV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소련의 일류 과학자들은 자본주의 과학자들 못지않게 유능했지만 나머지 소련 국민들은 그만큼 유능하지 못했나보다. 그 이유는?
기계, 공장 건물, 도로 같은 생산수단의 집단 소유에 기반을 둔 계급 없는 사회라는 공산주의의 비전을 추구한 소련과 그 동맹국들은 완전고용과 높은 수준의 평등을 목표로 내걸었다. 생산수단을 누구도 소유할 수 없으므로(작은 식당이나 미용실처럼 사소한 예외는 있었다.) 모든 기업은 실질적으로 전문 경영인들이 운영했다. 그들은 아무리 경영 성과가 좋아도 평등주의 때문에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없었다. 당시 소련 소비자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품을 생산할 만한 첨단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영자들은 이런 기술로 좋은 상품을 생산해서 경영 성과를 올리려는 인센티브가 부족했다. 더욱이 완전 고용을 유지해야 하므로 경영자들은 노동 규율을 바로 잡기 위해 해고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일을 대충하고 결근도 잦았다.
공산주의 국가는 이타성이라는 인간 본성을 훨씬 더 기대하면서 경제 시스템을 설계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는 전문가 정신과 자긍심을 가지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헌신적인 경영자와 노동자들이 많았다. 더욱이 1960년대 경에는 공산주의 국가들은 초기의 이상적 평등주의를 포기하고 현실주의를 따르면서 성과급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인센티브 문제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그럼에도 경제 체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시장 시스템보다 더 효율적 대안이라고 했던 공산주의 중앙 계획 시스템의 비효율성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는 생산 과정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성격 사이의 모순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생산력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의 분업 정도가 진전되고, 기업들은 서로에게 더 의존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존정도는 커지는데 반해 각 기업의 소유권은 여전히 개별 자본가들이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상호의존적인 기업들의 행동을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이러한 ‘조정 실패’에 따른 수요-공급의 불균형은 주기적 경제 위기로 폭발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위기가 발생하면 소중한 자원들이 대규모로 낭비되는데, 팔리지 않는 상품은 폐기되고, 이런 상품 생산에 사용된 기계는 고철이 되며, 노동자들은 해고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이런 체제적 모순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고, 종국에는 시스템 자체가 무너지게 되리라고 예측했다.
반면 중앙 계획 시스템에서는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소유하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는 생산단위(기업)들의 활동이 단일한 계획에 따라 사전 조정될 수 있다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장했다. 사전 조정으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경제 위기를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앙 계획 시스템에서는 ‘필요한 물품’만 생산할 수 있고 경제위기로 낭비되는 자원도 전혀 없기 때문에 중앙 계획 시스템이 시장 경제 시스템보다 경제를 훨씬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장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중앙 계획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주된 문제는 바로 복잡성에 있었다. 그들은 생산력이 발전하면 경제가 더 복잡해져서 중앙에서 계획을 수립하는 것 역시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중앙 계획 시스템은 초기 소련의 산업화가 성공할 수 있게 한데서 보듯이 목표가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할 때에는 잘 굴러 갔다. 당시 소련의 주된 과제는 철강, 트랙터, 밀, 감자 등 몇 가지 안 되는 핵심 재화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면서 제품과 재화들의 수가 많아지고 종류도 다양해지자 중앙 계획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물론 경제 발전과 더불어 경영 기법과 계산 능력, 즉 컴퓨터 등도 같이 발전했기 때문에 능력이 향상되었으나, 복잡해지는 경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해결방안으로 제품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소비자들의 엄청난 불만을 야기했다. 게다가 이렇게 제품의 다양성을 제한하고도 계획으로 풀기에는 경제가 너무 복잡했다. 어떤 제품들은 너무 많이 생산되어 남아돌았고, 다른 제품들은 너무 부족해서 국영 상점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섰다. 이리하여 1980년대에 공산주의 체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공산당들이 권좌에서 축출되고 중앙 계획 시스템이 일제히 폐기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과 베트남 같은 나라들처럼 표면적으로는 공산주의를 고수하는 나라들마저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는 정도는 여전히 강하지만 점차 중앙 계획은 포기하고 있다. 쿠바나 북한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결국 우리는 모두 시장 경제 시스템에서 살고 있다. 계획 경제 시대는 지나간 것일까?
p.269 ● 계획도 계획 나름이다.
공산주의는 실질적으로 사라졌어도 경제 계획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전면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 역시 경제를 계획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전쟁 시에는 중앙계획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2차 대전 중 주요 자본주의 국가였던 미국, 영국, 독일은 단지 계획 경제라는 이름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모든 것을 중앙에서 계획했다.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유도 계획’을 성공적으로 사용해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전략 산업에 대한 투자, 사회 기간 시설 개발, 수출 증진 등 주요 경제 변수에 관해 대강의 목표를 세운 다음 민간부문의 협조를 얻어 그 목표를 이루는 방법이다. 중앙 계획 시스템과 달리 유도 계획은 ‘유도’라는 단어가 의미하듯이 법적 구속력을 갖지는 않는다. 정부는 보조금지급, 시장 독점권 부여 등 다양한 당근과 각종 규제 예를 들어 국영 은행을 통한 자금 압박 등 채찍을 활용하며 정책 목표를 달성한다.
1950~1960년대에 걸쳐 프랑스는 유도 계획을 통해 투자와 기술 혁신에 성공하면서 영국을 제치고 유럽 2위의 산업 강국으로 떠올랐고, 핀란드와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등도 같은 방법으로 경제 고도화에 성공했다. 동아시아의 기적을 일궈 낸 일본, 한국, 타이완도 같은 기간에 유도 계획을 활용했다. 이러한 성공 사례에서 보면 어떤 경제 계획은 자본주의 체제와 양립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더욱이 어떤 식으로든 대다수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가 핵심 부문만큼은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것이 사실이고, 이런 정책은 결국 전체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대다수의 정부는 이른바 ‘부문별 산업 정책’을 통해 핵심 산업 일부의 미래를 계획하고 틀을 잡는다. 유도 계획을 사용했던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부문별 산업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했으나, 유도 계획을 사용하지 않은 스웨덴이나 독일 같은 나라들도 부문별 산업 정책은 추진했다.
대다수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는 국영 기업을 통해 국민 경제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종종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국영 기업은 철도, 도로, 항만, 공항 같은 핵심 인프라 부문이나 수도, 전기, 우편 등 필수적인 서비스 부문에 많지만 제조업이나 금융 부문에도 있다. 국민 총생산에서 국영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싱가포르에서 20%를 웃돌기도 하나 미국처럼 1%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세계 평균은 10%에 달한다. 국영기업을 정부가 운영하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상당부문을 정부가 계획한다는 의미이다. 국영 기업은 전체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므로, 국영기업을 통한 경제 계획이 경제 전반에 미치는 간접 효과는 국민총생산 중 국영 기업의 비중으로 나타나는 수치보다 훨씬 크다고 보아야 한다.
이 외에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는 전체 연구개발비의 20~50%라는 막대한 몫을 부담하면서 국가 기술의 미래를 계획한다. 이 점에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계획된 자본주의 경제 중의 하나이다. 1950~1980년대 사이에 미국은 전체 연구개발비의 47~65%를 정부 지원금이 차지했고, 한국과 일본은 대략 20%를 선이었으며, 벨기에 핀란드, 독일, 스웨덴은 40% 미만이었다. 1990년대 이후 냉전 종식과 더불어 미국은 군사 목적의 연구개발 지원을 줄이면서 전체 비중은 낮아졌다. 그럼에도 미국의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여전히 높다. 미국이 국제적으로 기술 우위에 있는 국방 프로그램(컴퓨터, 반도체, 항공) 및 보건 프로젝트(제약, 생명공학) 등이 정부의 연구개발비를 지원받은 부문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1980년대 이후 시장주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면서 대다수의 나라에서 정부계획이 축소되었다. 유도 계획으로 성공을 거둔 나라까지도 그렇다. 민영화가 추진되면서 국영 기업이 국민총생산과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떨어졌다. 전체 연구개발비의 정부 지원의 비중도 떨어졌다. 그럼에도 필자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 계획은 여전히 광범위하며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p.272 ● 계획이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로다.
기업도 끊임없이 변동하는 시장 가격에 맞춰 그때그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내세워 기업의 미래를 계획적으로 설계하여야 한다. 기업 CEO는 새로 진출해야 하는 분야, 문을 닫아야 하는 분야, 문을 닫지만 공장 이전을 해야 하는 분야, 자회사를 설립해야 하는 분야, 외국 회사와 전략적으로 제휴해야 하는 분야, 연구개발배를 확대해야 하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계획을 하는 사람’이기를 사람들은 원한다.
기업들은 사업 계획을 세운다. 그것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세운다. 마르크스가 경제 전반을 중앙에서 계획한다는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기업의 사업 계획에서였다. 당시는 정부가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오직 기업만이 계획을 세웠다. 마르크스는 기업 내부에서 활용하는 ‘합리적 계획’이 시장의 소모적 혼란보다 우월하여, 결국 경제 전체로 확산되리라고 예언했다. 그러면서 사유 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자본가들을 몰아낸 뒤, 기업내부의 계획에서 합리적 핵심만을 따로 분리해 내면 사회 전체를 향상시키는 데 활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거대 기업이 지배하는 경제 영역이 더 확대되어 왔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계획에 따라 운영되는 영역이 사실상 늘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로서 오늘날 국제 무역량의 1/3 가량이 초국적 기업 내부의 거래 즉 여러 나라에 분산된 본사와 자회사들 간의 거래로 추진된다.
1978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몬은 1991년 쓴 논문 『조직과 시장』에서 사람들은 조직된 경제 내에서 생활한다고 결론지었다. 세계 경제 활동의 태반이 서로 다른 기업들 사이의 시장 거래를 통해서가 아니라 기업 조직 내부에서 조정되며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경제 계획은 죽었다고 생각한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각 기업의 내부 계획과 정부의 다양한 계획들을 합치면 고도의 계획 경제인 셈이다. 게다가 재미있는 것은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보다 더 계획적이라는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거대 기업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데다 정부의 존재 역시 경제 영역의 구석구석에 더욱 광범위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선진국은 더 은근한 방법으로 개입하므로 눈에 잘 띄지는 않는다.)
문제는 계획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적절한 계획의 형태와 수준이 문제이다. 중앙 계획 시스템의 실패로 계획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으나, 경제 계획에 대한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면 정부 정책과 기업의 사업 계획, 시장에서의 관계 등이 모두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대 경제의 성격을 이해할 수 없다.
시장이 없다면 우리 경제는 과거 소련처럼 비효율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 하나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소금이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므로 소금만 먹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
p.276 thing 20 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불평등에 분노한다. 하지만 노력과 성취의 크기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보상할 경우 재능 있고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성취동기를 잃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결과의 평등인데, 결코 좋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없다. 공산주의 몰락이 그 증거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등은 기회의 균등이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 분리 정책이 한창일 때 우수한 흑인 학생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인 학생들이 다니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는 것은 부당할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역차별 정책을 사용해서 단지 흑인이라거나 가난한 집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질이 못 미치는 학생들을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 역시 부당하고 비효율적이다. 이런 식으로 결과의 평등을 추구할 경우 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과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기회의 균등은 공정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훌륭한 성과를 올린 사람은 충분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경쟁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가난한 집 아이가 배가 고파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선천적으로 능력이 떨어져 성적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공정한 경쟁이 되려면 그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배불리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집에서는 생계비 지원을 받아 식사할 수 있도록 하고, 학교에서는 무료 급식을 통해 밥을 굶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기회의 균등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의 균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부모가 아이를 굶기지 않을 정도로는 돈을 벌 수 있어야(결과의 균등) 그 아이도 같은 조건에서 다른 아이들과 경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p.277 ● 교황보다 더 독실한 가톨릭 신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교황보다 더 독실하다’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주변부 국가가 종교적, 경제적, 사회적 원칙을 적용하면서 그 사상이 나온 본고장보다 원칙을 더 엄격하게 지키려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은 1945년 국토가 양분되기 전까지 천 년 넘게 한나라로 살아왔으며 남북한 인구를 합치면 7천만 가까이 된다. 그러나 한국은 주변 강대국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본고장보다 더 철저하게 적용하는데 능숙해졌다. 공산주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북한은 러시아보다 더 철저한 공산주의를 했다. 1960~1980년대에 일본식 정부 주도 자본주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남한은 일본보다 더 철저히 정부 주도 자본주의를 실시했다. (MB정부 들어) 미국식 자본주의로 스타일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은 후에는 미국인들에게 자유 무역의 장점을 설교하면서 금융시장과 노동시장을 완전히 개방하여 미국인들을 무색하게 했다.
한국은 유교 문화권에 속한다. 유교 문화권의 몇몇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유교문화가 경제 발전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유교는 20C 후반 현대식 자본주의의 요건에 맞게 변형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봉건 이데올로기였다.
대부분의 봉건 이데올로기처럼 유교에서도 타고난 신분에 따라 직업 선택이 제한되는 엄격한 신분 사회를 옹호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미천하게 태어난 사람은 신분 상승이 불가능했다. 유교 사회에서는 농부들과 다른 노동 계급을 차별하여 농부의 아이들에게만 과거에 응시해서 지배계급에 편입할 기회를 주었다.
중국은 유교 이데올로기를 해석하는데 좀 더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취할 만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장인과 상인 출신들에게도 과거를 볼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공자보다 더 철저한 공자였던 한국에서는 고집스럽게 원칙을 적용해서 아무리 재능이 있는 사람도 신분이 낮으면 과거시험의 응시기회를 주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배 이후에야 전통적인 신분 제도가 완전히 철폐되고 출생 신분이 개인의 성취를 제약하지 않게 되었다. 엔지니어와 기업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장인과 상인들에 대한 편견은 몇 십 년 동안 사라지지 않다가, 경제 발전 이후 직업의 위상이 변한 후에야 인기 있는 직종으로 부상했다.
사람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은 것은 봉건 시대의 한국만이 아니다. 유럽의 봉건사회에서도 비슷했으며, 인도에서는 지금도 카스트 제도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신분 제도만 기회의 균등을 막은 것이 아니다. 2차 대전 전까지 여자들이 공직에 진출할 기회를 주지 않는 나라가 많았다. 최근까지도 많은 나라에서 인종에 따라 교육과 직업 선택의 기회를 제한했다. 미국은 19C 후반에서 20C 초기에 아시아인 등 ‘질 낮은’ 인종을 정해 이민을 금지했다.
이렇게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종, 성별, 신분 등의 이유로 자기 발전을 방해받는 상황에서 벗어난 것은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러니 기회의 균등은 어렵게 얻은 소중한 가치이다.
p.280 ● 시장은 해방군인가?
최근 몇 세대 사이에 기회균등을 제한하는 공식적인 규정이 많이 폐지되었다. 이는 차별받던 사람들의 정치적 투쟁 덕이다. 19C 중반 남성 모두에게 선거권을 요구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 운동, 20C 후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 폐지운동, 그리고 현재 인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층 카스트 사람들의 싸움 등이 그 예이다. 바로 이러한 투쟁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제한된 권리를 받아드리면서 살아갈 것이다.
기회의 불균등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시장은 큰 공을 세웠다. 지유 시장 주의자들은 효율성이 가장 높은 사람과 기업만이 살아남는 시장에서의 거래에는 인종이나 정치적 편견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밀턴 프리드만은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빵을 사는 사람은 그 빵의 재료인 밀을 재배한 사람이 공산당원인지 공화당원인지.... 흑인인지 백인인지 모른다.” 따라서 시장의 힘은 인종 차별을 몰아내거나 최소한 많이 약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백인만 채용하는 고용주는 인종에 상관없이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을 골라 쓰는 더 개방적인 고용주와의 경쟁에서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인종 차별로 악명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일본인들을 ‘명예 백인’으로 인정한 사례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 안에 있는 도요타나 닛산 공장을 운영하는 일본인 경영진들더러 유색 인종이니 인종 분리법에 따라 흑인 거주 지역에 가서 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백인 우월주의에 젖은 그들이지만 하는 수 없이 자존심을 접고 일본인들을 백인인 것처럼 받아드렸다. 일제 자동차를 타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시장의 힘이다.
평등을 증대시키는 시장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널리 퍼져있다. 예를 들어 일부 대학이 소수 인종이나 노동자 계급 출신의 학생을 차별하고 대신 능력이 떨어지지만 출신 배경이 좋은 학생들만 받아드리는 행태를 계속한다면 고용주들은 차별이 없는 대학의 졸업생들을 더 선호하게 될 것이다. 자질이 가장 뛰어난 학생들을 확보하려면 대학들도 조만간 편견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시장이 모든 편견을 없애고 기회의 균등을 보장할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p.282 ● 인종 분리 정책과 카푸치노 사회
아직도 특정 인종, 빈민층, 하층 계급, 여성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지만 기회의 균등 원칙을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기서 두 가지로 의견이 갈린다. 어떤 사람은 평등이 기회의 균등에서 끝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형식적인 기회의 균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여기에 동의한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하면 되지, 그 행동의 결과까지 평등하게 만들어 버리면 열심히 일하고 혁신을 꾀하는 사람들의 의욕을 꺾는 결과가 된다고 경고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항상 옆에서 농땡이나 부리는 사람이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열심히 일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모택동이 추진하던 중국 협동농장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복지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부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세금을 부과하면 그들은 부를 창출할 의욕을 잃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도 어떻든 최저생활이 보장된다면 열심히 일을 하려는 동기를 잃을 것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이런 이유로 결과의 평등이 모든 사람에게 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모택동의 협동농장처럼 지나치게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일하고자 하는 의욕을 꺾는 일이며 공평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결과의 평등을 받아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핵심은 균등한 기회가 주어져도 그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들은 이제 백인들과 똑같이 보수가 높은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지만 그 직업에 적합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흑인들이 읽고 쓰기도 제대로 못하는 역량 미달의 교사들만 있는 가난한 학교 출신이면 명문대학에 입학할 확률은 여전히 희박하다. 흑인들이 명문대학에 들어갈 기회가 열렸지만, 이것이 실제로 그런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다니는 초중고등학교는 여전히 가난하고 운영상태도 엉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대학에 입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해도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은 교육과 의지, 그리고 시장이 제공하는 기회를 활용할 만한 기업가적 에너지가 없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똑같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대학 졸업장을 받은 사람과 도둑질이나 하면서 막 산 사람을 동등하게 보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옳은 주장이다.
이 주장이 옳기는 하지만 이것은 큰 그림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이 각자 태어난 사회경제적 환경과 현재의 환경이 개인의 성취에 심각하게 제약이 된다. 심지어 환경은 개인이 무엇을 성취하기를 원하는 지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환경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시도해 보기도 전에 포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영국의 노동자 계층 출신 학생들은 대학에 갈 생각도 안 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은 자기한테 안 어울리는 곳’이라는 이유에서이다. 1980년대 말에 BBC의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에 나온 광부 아버지는 대학에 가서 교사가 된 아들을 ‘계급의 배반자’라고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를 잊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사회경제적 환경에 돌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자기 자신을 믿고 열심히 노력하면 뭐든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 또한 말도 안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기회의 균등은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p.285 ● 알레한드로 톨레도의 기이한 사례
이제 가난한 집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허용되지만, 학비가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하기도 한다. 무상 교육이 제공되는 나라에서조차 가난한 집 아이들은 자기 잠재력에 상관없이 학업 성적이 저조한 경우가 많다. 집에서 밥을 못 먹거나 학교에서 점심을 거르는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집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영양 결핍으로 지능 발달이 지체되었을 수도 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모가 숙제를 잘 도와주지 못하지만, 중산층이나 부유층은 다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동생을 보살피거나 염소를 데리고 나가서 풀을 먹이느라 숙제할 시간조차 없을 것이다.
가난한 부모한테 태어난 것이 무슨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아이들이 최소한의 음식과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숙제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몇몇 나라에서는 무상 급식과 예방 접종, 기본적인 건강 검진을 제공하고 학교에서 교사들이 숙제를 도와주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 중 일부는 여전히 가정에서밖에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학교가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아이들에게 공정한 기회 비슷한 것이라도 확보해 주려면 부모 소득을 최소한 어느 정도는 균등하게 맞춰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 한 무상 교육, 무상 급식, 무상 예방 접종 등을 아무리 제공해 봤자 아이들에게 실질적으로 기회의 균등을 제공할 수 없다.
어른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결과의 균등이 필요하다. 실직 상태에서 다시 일자리를 얻기는 극도로 힘든 일이다. 애초에 일자리를 잃는 것도 온전히 그 사람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심한 고통을 당하고 역사의 폐기물 취급을 받는 것이 정말 공정한가?
물론 이상적인 자유 시장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라면 이런 실직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직한 철강 노동자와 조선 노동자는 다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거나 투자 은행가로 변신하면 되니까. 그러나 몇 명이나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설령 가능하다하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더 공정한 방법은 실직한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실업 수당, 의료 보험, 재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새로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운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이론적으로는 알레한드로 톨레도(Alejandro Toledo) 전 페루 대통령처럼 가난한 구두닦이 소년이 스탠포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은 가능하다. 누구나 노력만 하면 스탠포드를 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나머지 수백만 페루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으름뱅이라고 일축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톨레도 전 대통령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결국 부모 소득이라는 결과의 균등이 어느 정도 선까지 보장되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들은 기회의 균등을 충분히 활용할 수가 없다.
실제로 각 나라의 계층 이동성을 비교 조사한 연구를 보면, 계층 이동성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영국에 비해 더 높고, 영국은 미국에 비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처럼 복지 정책이 잘 된 나라일수록 계층 이동이 더 활발하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미국의 경우 계층 이동성이 낮은 이유가 주로 최하층에서 기회의 균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인데, 그 원인이 최하 기본 소득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해서이다.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최소한의 소득, 교육, 의료 혜택 등을 보장함으로써 최소한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100m 달리기 시합에서 모두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려야 한다면 공정한 경기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289 thing 21 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큰 정부는 경제에 좋지 않다. 복지국가는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기 위한 조정 비용을 부자들에게 부과함으로써 보다 편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로 만들어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실업 보험, 의료 혜택 등 복지 정책을 추진할 돈을 부자들에게서 거둔 세금으로 확충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지고, 부자들은 부를 창출하고자 하는 의욕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경제 전체가 활력을 잃게 된다.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새로운 시장의 현실에 적응할 필요를 못 느끼고, 따라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 맞춰 직업 및 직무 형태를 전환하는 것도 늦어진다. 공산주의 경제 체제가 실패한 것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생기 넘치는 미국 경제와 비대해진 복지 정책에 눌려 활력을 잃은 유럽 경제를 비교해 보라.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복지 정책이 잘된 나라 국민들은 일자리와 관련된 위험을 감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에 오히려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보호 무역에 대한 요구가 덜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유럽 사람들은 자기가 종사하는 산업이 외국과의 경쟁으로 문을 닫는다 해도 실업 수당을 받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고,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데 필요한 직업 재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에 반해 미국 사람들은 한번 일자리를 잃으면 생활이 심하게 어려워질 뿐 아니라 다시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복지 정책이 가장 잘 갖춰진 나라들이 ‘미국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1990년대 이후의 미국과 비슷한 성장을 하거나 더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p.290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한국에서 젊은이들에게 의사는 인기 있는 직업이다. 한국에서 27개 의대 중 가장 커트라인 낮은 대학도 국내에서 제일 좋은 대학의 공대보다 커트라인이 높다고 한다. 한국에서 의대가 늘 인기를 누리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초특급 인기는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21세기 들어 나타난 현상이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그 해답의 하나는 고령화 사회 등의 이유로 의사들의 수입이 상대적으로 높아지자 젊은이들이 변화한 인센티브에 반응하는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유능한 의사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우수한 젊은 학생들이 점점 더 많이 의사를 직업으로 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 수가 계속 증가하면서 의사의 수입은 상대적으로 줄고 있다. 의사되는 것 대신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새로운 규제책을 정부가 내놓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대 인기가 높아지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기현상의 원인은 지난 10년 사이에 직업 안정성이 극적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은 온정주의적 정부 개입 정책을 포기하고 무한 경쟁을 강조하는 시장 자유주의를 택했다. 노동 유연성을 높이면서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임시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아시아 금융 위기 전에도 한국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50%에 육박해서 선진국 중 가장 노동 시장이 유연한 나라로 꼽혔다. 거기에 더 자율화를 했으니 이 비율은 이제 60% 선에 달한다. 금융위기 전까지만 해도 정규직 노동자들은 사실상 종신 고용을 보장받고 일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정규직 직원도 40~50대의 노동자들은 회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기업이 마음대로 해고할 수는 없지만, ‘자발적으로’ 떠나게 하는 방법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되면 삼성과 현대 같은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으나 40대에 실직할 염려가 있다는 계산을 하는 것이다. 국내총생산 대비 공공 사회 지출이 선진국 중 가장 낮을 정도로 복지제도가 취약한 점을 감안하면 실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악몽이다. 취약한 복지 제도는 예전에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고용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직장을 잃으면 당장 생활이 어렵게 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일자리를 다시 얻을 가능성마저 아주 낮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유망한 한국 젊은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의사 면허를 따 놓으면 은퇴할 때까지 일자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를 가고자 한다. 혹 인문 계열 학생이라면 변호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 법학을 전공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공 계열 학생의 80%가 의사 체질이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결국 선진국 중 가장 유연하다는 한국 시장에서 인적 자원을 재능에 따라 효율적으로 배분하는데 극적인 실패를 하고 만 것이다. 이유는 바로 높아진 고용 불안이다.
p.293 ● 복지 제도는 노동자들을 위한 파산법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해고를 어렵게 하는 노동 시장 규제는 경제를 비효율적으로 만들고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한다. 이런 규제는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려는 인센티브를 약화시킨다. 게다가 필요할 때 바로바로 해고할 수 없으면 고용주들은 애초에 신규 노동자 고용을 꺼리게 되므로 부의 창출도 저해된다.
이들은 복지 제도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원흉이라고 주장한다. 실업수당, 의료 혜택, 무상 교육, 심지어 최저 소득까지 지원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정부가 모든 사람을 ‘실업자’로 고용하고 최저 임금을 지불하겠다는 보장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를 잃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복지제도에 필요한 재원을 부자들에게 거둔 세금으로 마련하기 때문에 부자들은 열심히 일해서 고용과 부를 창출할 동기를 잃는다.
이 논리는 크게 세력을 떨쳤다. 1970년대 당시 영국 경제가 활력을 잃자 비대해진 복지 제도와 노조 활동이 도를 넘어선 게 그 원인이라는 설명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실제 상황은 복잡했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는 노조들에게 주제파악을 하도록 하고, 복지제도를 대폭 약화시킨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영국을 살린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1990년대 과도한 복지 정책을 추진하는 다른 선진국보다 미국 경제가 더 빠르게 성장하자 복지 정책에 대한 이런 시각은 위세가 더 세졌다. 다른 나라도 영국병을 고친 대처 전 총리와 활기차게 성장하는 미국 경제를 운운하면서 복지예산을 줄이게 되었다.
그러나 직업 안정성이 높고 복지 제도가 잘 갖춰져 있으면 경제의 생산성과 활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과연 진실인가?
한국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고용 불안이 높아지면 젊은이들이 의사나 법률가처럼 안정된 직종을 선호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지만 사회 전체로 볼 때에는 재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하므로 경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떨어뜨린다.
미국의 취약한 복지제도는 이 나라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심한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취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이다. 유럽에서는 산업이 쇠퇴해서 일자리를 잃는 것은 타격이지만 의료혜택, 국가 임대 주택 혹은 주거 보조금, 실업수당과 정부지원의 직업 재교육, 구직에서도 정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에서는 정부에 보호무역을 요구하면서 한번 잡은 일자리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일자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실업 보험의 자격 요건이 까다롭고 그 지급기간도 유럽보다 짧다. 직업 재교육과 재취업 과정에서 정부의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 실직 후에는 의료혜택을 못 받고 사는 집마저 잃을 수 있다. 국가 임대 주택이나 임대료 보조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감원 등 산업 구조 조정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은 유럽보다 미국이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위 예들에서 알 수 있듯이 직업 안정성이 낮으면 열심히 일할지는 몰라도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 자리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엔지니어로 대성공을 거둘 사람이 의사가 되기 위해 해부학 교실에서 씨름을 하고 있다. 적절한 직업교육으로 생명공학과 같은 유망산업에서 일할 수 있는 미국 노동자들이 자동차 산업 같은 ‘사양 산업’에서 악착같이 일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와 미국 노동자들의 태도에서 본 것처럼 현재의 직업을 떠나야 할 때 사람들이 제2의, 혹은 제3, 제4의 기회가 생기리라는 것을 알면 좀 더 개방적인 자세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파산법의 배경과 같은 논리이다.
미국에서는 파산법을 통해 파산한 기업가들은 자기 비즈니스를 다시 정비하는 동안 채권자들로부터 6개월간 보호를 받는다. 파산법 제정 이전에는 채권자들이 채무를 면제해 주지 않는 이상 아무리 오래 걸려도 모든 빚을 다 갚아야 하기 때문에 한번 파산을 하면 다시 재기할 도리가 없었다. 이는 파산한 기업가들이 새로 기업을 시작하여 새로 얻은 이윤을 모두 오래된 빚을 갚는데 써야 했기 때문에 기업이 성장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2의 기회를 보장하지 않으면 기업가들은 파산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1849년 영국을 필두로 파산법을 도입해서 기업가들이 채권자들로부터 법원의 보호를 받도록 했다. 법원이 채무 삭감을 명령할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파산법은 유한 책임 회사 같은 제도와 함께 기업 활동에 따르는 리스크를 크게 줄이는 효과를 낳아 기업인들이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하게 되면서 현대적 의미의 자본주의가 가능해졌다.
노동자들에게 제2의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 복지정책은 노동자를 위한 파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파산법이 기업가들로 하여금 위험을 더 적극적으로 감수하게 해 주는 것처럼, 복지 정책은 노동자들이 변화에 더 개방적이고, 그에 따른 위험을 더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를 갖도록 해준다. 제2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첫 번째 직업을 선택할 때 더 대담해질 수 있고, 후에 직업을 바꿔야 할 때에도 더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
p.298 ● 큰 정부를 가진 나라들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복지 제도의 규모가 작을수록 경제가 더 역동적이라는 게 통념이다. 그러나 실제 나타나는 증거들은 이 통념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1980년대까지 미국은 복지 제도가 미비한데도 유럽보다 훨씬 낮은 성장률을 보였다. 1980년 국내총생산에서 공공 사회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미국은 13.3%인데 EU 15개국이 19.9%였다. 스웨덴은 28.%, 네덜란드는 24.1%, 서독은 23%에 이르렀다. 1950~1987년 사이 미국은 유럽 어느 국가보다 성장 속도가 더뎠다. 미국은 연 1.9%에 그쳤으나, 스웨덴이 연 2.7%, 네덜란드가 연 2.5%, 서독은 연 3.8%였다. 이 숫자들은 복지 제도가 잘 갖춰져 있다고 해서 높은 성장률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1990년 이후 미국의 성장률은 상대적으로 높아지기는 했지만, 동시에 복지 제도의 규모가 큰 나라 중에서 미국보다 성장한 나라들도 있었다. 1990~2008년 사이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8%로서 이전 기간과 비슷한 수준의 성장률을 보였지만 유럽 각국의 경제가 둔화하면서 상대적으로 미국을, 한국과 터키를 제외하고, 소위 OECD '핵심‘ 국가 중 가장 빨리 성장하는 나라로 보이게 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1990년 이후 OECD 핵심 국가 중 가장 빨리 성장한 나라 두 군데가 바로 핀란드(2.6%)와 노르웨이(2.5%)라는 것이다. 두 나라 모두 복지 정책이 잘 갖춰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03년 핀란드의 경우 국내총생산에서 공공 사회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이 22.5%였으며, 노르웨이는 25.1%였다. 그에 비해 OECD 국가 평균은 20.7%였으며, 미국은 16.2%였다. 스웨덴은 31.3%로서 미국의 거의 두 배에 달하며,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복지제도를 운영 중이다. 그럼에도 성장률은 연 1.8%로 미국과 거의 차이가 없다. 2000~2008년 동안 스웨덴의 성장률은 2.4%, 핀란드는 2.8%이지만, 미국은 1.8%에 불과하다. 자유 시장주의자들의 말대로 복지 제도가 노동자의 노동 윤리와 부의 창출 동기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복지 제도도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고,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 제도가 보편적이지 않고 미국처럼 선별적으로 적용될 경우 수혜자에게 낙인(stigma)을 찍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참고: 선별적 복지는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이 낙오자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음) 또한 복지 제도는 받고 싶어 하는 ‘최저 희망 임금’을 높여 줌으로써 열악하고 낮은 임금의 일자리를 택하는 것을 꺼리게 만든다. 일을 하는데도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국의 수많은 근로 빈곤층 문제나 유럽이 안고 있는 전반적으로 높은 실업률이나 똑같이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잠재적 단점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게 제2의 기회를 주기 때문에, 잘 설계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종류의 복지 제도는 사람들이 변화에 더 개방적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준다. 이러한 여유는 산업 구조 조정을 용이하게 만들기 때문에 경제 발전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다.
차를 빨리 몰 수 있는 것은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이다. 브레이크가 없다면 아무리 능숙한 운전자라도 교통사고가 두려워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업이 자기 인생을 망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큰 정부가 사람들을 변화에 더 개방적으로 만들고, 그에 따라 경제도 더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p.301 thing 22 금융 시장은 보다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금융 시장의 급속한 발달 덕에 우리는 자원을 신속하게 배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영국, 미국, 아일랜드 등 금융 시장을 자유화하고 개방한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이 좋은 경제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덕분이었다. 자유로운 금융 시장을 보유한 경제는 기회의 변화에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고, 이는 결국 빠른 경제 성장으로 이어진다. 최근 들어(2008년의 금융위기) 일부 금융기관의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행태로 인해 금융 부문 전체가 오명을 쓴 것도 사실이다. 특히 위에 언급한 나라들에서 이런 일들이 더 불거져 나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금융 위기가 있었고, 그 위기의 규모가 좀 컷다고 해서 금융 시장을 규제하는 쪽으로 서둘러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효율적인 금융 시장은 한 나라의 번영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현대 금융 시장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효율적이라는 데에 있다. 최근의 금융 ‘혁신’을 통해 만들어진 수없이 많은 새 금융상품들 덕에 금융부문은 금융 자산 보유자들을 위한 단기 이윤 창출에는 더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에도 보았듯이 이 새로운 금융 자산들은 금융 시스템 뿐 아니라 경제 전반을 더 불안하게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금융 자산의 유동성을 이용해 자산 보유자들은 작은 변화에도 빨리 반응을 하기 때문에 실물 경제 부문의 기업들은 장기적 발전에 필요한 ‘기다려 줄 줄 아는’ 자본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 사이에 존재하는 속도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 즉 금융 시장의 효율성을 의도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p.302 ● 아이슬란드에서 쓸모없는 세 가지 문장
1990년대에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공항의 공식 관광 안내서에는 ‘아이슬란드에서 쓸모없는 표현’이라는 난이 있는데, 여기에는 “기차역이 어디있습니까?”,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더 싼 것은 없습니까?”가 실려 있다. 아이슬란드에는 철도가 없고, 날씨가 정말 좋은 날이 없는 듯하다. 또한 아이슬란드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세 번째 표현이 상황에 딱 걸맞은 표현이다.
물가가 매우 비싼 것은 사실 아이슬란드가 경제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처럼 끊임없이 저임금 이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소득이 높은 나라에서는 노동 서비스의 가격이 비싸서 물건 값이 비싸진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아이슬란드는 1995년 무렵에 벌써 룩셈부르크, 스위스, 일본,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싱가포르, 프랑스 등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11번째로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이미 부유했던 아이슬란드 경제는 1990년대 후반 금융 산업의 민영화와 자유화가 추진되면서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1998년에서 2003년에 이르기까지 국영 은행들과 투자기금들을 민영화하고, 은행에 대한 지급준비율 제도마저 없애는 등 가장 기본적인 금융 규제까지 철폐했다. 이후 아이슬란드 은행들은 무서운 속도록 확장하여 해외 고객을 유치하는 등 영국, 네덜란드, 독일 금융 시장까지 잠식했다. 한편 아이슬란드의 투자자들은 자국 은행들의 공격적인 대출 정책 덕분에 엄청난 자금을 융통해 기업 쇼핑(인수 합병)에 나섰는데, 그 대상은 영국이었다. 젊은 재력가 욘 요하네손이 소유한 투자 회사 바우거는 2007년 영국 소매 유통업의 핵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영국의 유명한 소매 대기업의 대주주가 된 바우거는 3800개 소매점에서 6만5000여 직원들을 고용하며 100억 파운드에 달하는 매출을 올리는 거대 비즈니스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1985년에야 주식 시장이 개설되었을 정도로 지나친 규제로 악명 높았던 금융 후진국 아이슬란드가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활기 넘치는 신생 금융 중심지로 급변한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이래 아이슬란드 경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세계에서 5번째로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이때만 해도 아이슬란드의 경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성장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아이슬란드 경제는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아이슬란드 3대 은행이 모두 파산하는 바람에 정부가 울며 겨자 먹기로 인수해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고, 2010년 초 현재 IMF는 아이슬란드 경제가 2008년 -8.5% 성장을 기록했다고 추정했는데, 이는 선진국 중 가장 빠른 추락이었다.
요즘 들어 아이슬란드가 1990년대 후반에 추진한 ‘금융 주도 발전’정책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증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2007년 아이슬란드의 은행 자산(참고: 자산에는 부채가 포함됨)은 국내총생산의 1000%에 달했는데, 이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서 영국의 두 배에 달했다. 아이슬란드 금융업의 팽창은 외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순외채(채무에서 채권을 제외한 금액)는 2007년 국내총생산의 거의 250%에 달했다. 사실 이보다 훨씬 적게 외채를 쓰고도 망한 나라가 많다. 예로써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직전의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순외채가 각각 국내총생산의 25%와 35%였다. 아이슬란드의 경제 기적 뒤에는 감춰진 거래의 어두운 면은 은행의 주요 대출자 중 상당수가 같은 은행의 핵심 주주였다는 점이다.
p.305 ● 새로운 성장 동력?
지난 30년 동안 금융 부문의 민영화, 자유화 및 개방으로 경제 성장 동력을 육성하려 한 나라는 아이슬란드만이 아니고 아일랜드도 똑같은 전략으로 ‘금융 중심지’를 모색했다. 이 나라의 금융 자산 역시 2007년 국내총생산의 900%에 달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나라에 빠져들었다.
IMF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아일랜드는 2009년에 -7.5%의 성장을 기록했다. 라트비아도 금융 중심지 발전 노선을 추진하였는데, 위의 두 나라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IMF의 추정에 따르면 2009년 경제 성장률은 -16%에 달했다. 자칭 중동의 금융 중심지인 두바이는 다소 오래 버티는 듯싶었지만, 결국 2009년 11월 이 나라의 최대 국영 기업 집단인 두바이월드가 모라토리엄(채무 지불 유예)을 선언하면서 백기를 들고 말았다.
최근에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까지 이들 나라들은 새로운 ‘금융 주도 비즈니스 모델’로 찬사를 받았다. 더구나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라트비아 경제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도 금융 주도형 경제 전략을 추진하겠다는 나라들이 있다. 2009년 9월 터키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전통적으로 제조업에서 강세를 보여 왔던 한국도, 비록 벤치마킹하고자 했던 아일랜드와 두바이가 붕괴하고 나서 좀 주춤해졌지만 여전히 동북아시아의 금융 중심지가 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미국과 영국에서 금융 규제 완화를 시행하자 이것이 다른 나라들로 확산되고 있는데, 아일랜드나 아이슬란드는 이러한 금융 완화 정책 노선의 극단적인 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국은 1980년대 후반 이른바 ‘금융 빅뱅’으로 ‘금융 탈규제’에 박차를 가했다. 그 이후에도 이른바 ‘최소 규제 원칙’을 구현한다고 자랑해왔다. 미국도 이에 발맞추어 투자 은행과 상업 은행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 버렸다. 많은 나라가 미국과 영국의 선례를 따랐다.
이처럼 많은 나라가 ‘금융 탈규제’에 기반을 둔 성장전략을 채택하는 이유는 금융 부문에 대한 규제를 완화내지 폐지해 놓으면 금융업이 제조업처럼 골치 아픈 다른 산업보다 돈 벌기가 훨씬 쉬운 업종이었기 때문이다.(2008년 금융 위기 전에는 그렇게 보였다.) 미국의 경우 1960~70년대에는 금융 기업의 이윤율이 비금융 기업의 이윤율보다 낮았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금융 부문에 대한 탈규제 정책이 추진된 뒤로 금융 기업의 이윤율이 상승세를 타면서 4~12%에 이르렀고, 2~5%에 그쳤던 비금융 기업의 이윤율보다 늘 높게 유지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1970~1980년대 중반 동안 금융 기업의 이윤율은 마이너스 상태였으나, 1980년대 후반 탈규제 정책이 추진되면서 금융 기업의 이윤율이 상승하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에는 비금융 기업 이윤율을 따라 잡았고, 계속 상승하여 2001년에는 10%를 넘겼다. 반면 비금융 기업의 이윤율은 1990년대 초반 하락하기 시작하여 2001년에는 대략 3%에까지 떨어졌다.
미국에서는 금융 산업이 하도 매력적이라서 제조업 대기업조차 사업 내용으로 볼 때 사실상 금융 기업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금융 산업 참여율이 높았다. 예를 들어 GE, GM, 포드같이 한때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던 회사들조차 자회사로 설립한 금융 기업은 지속적으로 팽창하는 반면 핵심 비즈니스인 제조업 부문은 수그러들면서 ‘금융화’되어 버렸다. 이러한 거대 제조업체들이 이윤의 대부분을 핵심 비즈니스인 제조업이 아니라 금융업을 통해 벌어들이게 되었다. 예를 들어 2003년 GE그룹 이윤의 45%는 GE캐피털에서 창출되었고, 2004년 GM그룹 이윤의 80%는 금융 자회사인 GMAC에서 올렸으며, 2001~2003년 동안 포드그룹의 모든 이윤은 포드파이낸스가 벌어들인 것이다.
p.309 ● 대량 금융 살상 무기?
세계적 차원에서 그리고 특히 부유한 나라에서 금융 부문은 엄청난 성장을 했다. 의미심장한 점은 금융 부문이 그를 떠받치는 실물 경제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해 왔다는 사실이다.
팔마 교수가 밝힌 바로는 1980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축적된 금융 자산의 규모는 세계총생산의 1.2배 수준이었는데, 2007년에는 4.4배로 증가했다. 금융 부문의 상대적 크기는 부유한 나라일수록 더 심했다. 2007년 현재 영국 금융 자산의 규모가 국내총생산의 7배에 달했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다. 미국의 경우 1950~1970년대에 금융 자산 규모는 국내총생산의 4~5배 사이를 오락가락했는데, 금융 탈규제 정책이 시행된 1980년대 초반이후 급속한 상승세를 타다가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9배를 돌파했다.
이 말은 동일한 양의 실물 자산과 경제 활동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금융 청구권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진다는 의미이다. 주택 대출 시장에서 파생 금융 상품을 만들어 판 것이 2008년 금융 위기를 부른 주요 원인이었다.
이전에는 누군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사면 돈을 빌려 준 은행이 그 금융 거래의 결과, 즉 집을 담보로 일정 기간 동안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하는 것에서 이야기가 끝났다. 그러나 금융 혁신의 결과 주택 담보 상품을 수천 개 엮어서 만든 MBS(mortgage-backed securities 주택 담보부 증권)라는 상품이 나왔다. 여기서 여러 개의 MBS, 많게는 150개까지 되는 MBS를 묶은 것을 담보로 해서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부채 담보부 증권)이라는 상품이 나왔다.그리고 이 CDO를 담보로 한 CDO-제곱이 나왔으며 CDO와 CDO-제곱을 합쳐 CDO-세제곱까지 만들어졌다. 심지어 더 제곱을 한 CDO들도 개발되었다. 이렇게 되자 CDO가 부도날 경우 투자자를 보호할 또 다른 금융 상품인 CDS(credit default swap, 신용 부도 스왑)도 나왔다. 이외에도 현대식 금융이라는 온갖 종류의 금융상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명되었다.
이쯤 되면 누구나 헷갈린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동일한 실물 자산, 즉 최초로 주택 담보 대출에서 담보로 사용되었던 집들과 그 집 소유자들의 경제활동들이 새로운 자산을 ‘파생’시키기 위해 반복해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핵심은 이러한 금융 상품이 기대한 만큼의 수익을 낼 수 있는지의 여부는 최초로 담보 대출을 받았던 수십만 명의 노동자와 중소기업가들이 대출 융자금을 꼬박꼬박 상환하는지에 달려 있다.
결국 금융 혁신의 결과는 실물 자산이라는 기초 위에 금융 자산이라는 빌딩을 끝없이 높게 쌓아 올린 끝에 전체 건물이 흔들리는 꼴이 되었다. 금융 상품은 ‘파생’이 되면 될수록 금융 상품을 궁극적으로 떠받치는 실물 자산과의 거리도 멀어지며, 이에 따라 점점 더 그 파생 금융 상품의 정확한 가격을 매기기가 힘들게 된다. 이는 기초를 튼튼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 건물의 층수만 올린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층수가 올라갈수록 품질이 불확실한 자재를 사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의 유명한 투자자 워런 버핏은 2008넌 금융 위기 전에 이를 ‘대량 금융 살상 무기(Weapons of Financial Mass Destruction)'라 일컬었던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p.312 ● 금융 시장의 수레바퀴에 모래를 뿌려라
지난 20~30년에 걸친 금융 부문의 지나친 발전을 비판한다고 해서 금융이 모두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금융 발전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금융 발전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금융 자본이 경제 발전에 필수적이었던 이유는 산업 자본보다 훨씬 유동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금융 자본은 생산을 저해하거나 심지어 파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공장 소유주는 추가적으로 많은 주문을 받으면 원자재나 기계를 더 구입할 자금이 갑자기 필요하게 된다. 이윤을 더 거둘 수 있는 상황에서 은행이 기계와 공장을 담보로 자금을 빌려주면 공장주는 무척 고맙게 여길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공장주가 새로운 분야에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 공장의 절반을 팔려는 데 아무도 이를 사려는 사람이 없는 경우, 공장에 대한 주식을 발행한 뒤 이 중 절반을 팔아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렇듯 금융 부문은 건물과 기계 같은 비유동성 자산을 대출금, 주식 등의 유동성 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기업이 성장하고 사업 영역을 다각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금융 자산이 경제 전체에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도 바로 이 유동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장을 짓거나 생산을 하는데 에는 최소 몇 개월이 걸리고, 세계적 기업하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조직적 노하우를 축적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린다. 이와 대조적으로 금융 자산은 다른 곳으로 옮겨 재배치하는 데 몇 초, 길어야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엄청난 유동성 차이로 심각한 문제가 빚어지는데, 이는 금융 자본이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자본으로 단기간에 이익을 챙기려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진다. 우선 단기적으로 경제가 불안해진다. 금융 자본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것도 대단히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국적과 산업 부문을 가리지 않고 옮겨 다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부작용이다. 금융의 높은 유동성은 생산성 상승을 약화시킨다. 기업이 생산성을 높이려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자금을 조달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금을 제공하는 금융 자본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장기 투자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최근 수 십 년 동안 금융심화도(국민총생산에 대한 금융자산 총액의 비율)가 높아졌는데도 경제 성장이 지체되는 것은 이런 점들 때문이다.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면 어디든 재빨리 옮겨 갈 수 있는 이 효율성 때문에 금융이 경제의 다른 부문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198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토빈은 금융 이동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금융 거래세의 도입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토빈세만이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의 속도 차이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적대적 인수 합병을 어렵게 만들어 투기적 주식 투자로 얻는 이득을 줄일 수 있다. 주식을 빌려서 파는 공매도(short-selling)를 금지하거나 주식 증거금을 인상하는 방법도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에 대해 규제를 가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의 속도 차이가 완전히 없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물 경제와 함께 움직이는 금융 시스템은 무용지물이다. 금융의 존재 가치는 실물 경제보다 빨리 움직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금융이 지나치게 빨리 움직여 실물 경제에서 탈선했다는 데에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수준의 유동성을 유지하면서도, 물리적 자본과 인적 자본, 조직 혁신 등에 기업이 장기적 투자를 할 수 있도록 금융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다.
p.316 thing 23 좋은 경제 정책을 세우는 데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정부 개입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아무리 그럴싸해도 정부 정책의 성공 여부는 그것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의 능력에 달렸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정부 관료들은 경제학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다. 좋은 경제 정책을 실행에 옮기려면 경제학 지식이 필수적인데도 말이다. 그런 관료들은 자기의 한계를 깨닫고 선별적인 산업 정책 등 ‘어려운’ 정책에 손대지 말고, 정부 역할을 최소화하는 ‘쉬운’ 자유 시장 정책을 고수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자유 시장 정책은 일거양득이다. 가장 좋은 정책일 뿐 아니라 관료의 자질에 그다지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좋은 경제 정책을 수행하는 데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경제를 잘 운영한 경제 관료들은 대부분 경제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기적’적인 성장을 구가하는 동안 일본과 한국에서 경제 정책은 법대 출신들이 맡았다. 타이완과 중국에서는 공대 출신들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경제가 성공하는데 경제학, 특히 자유 시장 경향의 경제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보았듯이 지난 30여 년 동안 자유 시장 경제학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경제 실적이 저조해졌다. 성장률 감소, 경제 불안정성과 불평등 악화,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까지 몰아온 주범이 바로 이 자유 시장 경제학인 것이다. 정책 입안에 경제학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경제학은 자유 시장 경제학이 아닌 다른 종류의 경제학이어야 한다.
p.317 ● 경제학자 없는 경제 기적
일본, 타이완, 한국, 싱가포르, 홍콩,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을 가리켜 흔히 ‘기적’의 경제권이라고 한다. 19C 산업 혁명 기간 동안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등 국가들의 1인당 국민소득 증가율은 대충 1~1.5%였다. 1950~1970년대 중반 이른바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이 나라들의 1인당 국민소득은 연간 3.5~4%씩 성장했다. 이에 비해 195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 기적의 성장기 동안 동아사아 국가들의 1인당 국민소득은 어림잡아 연간 6~7%씩 증대했다. 1~1.5%를 ‘혁명’, 3.5~4%를 ‘황금기’라 부른다면, 6~7%는 가히 ‘기적’이라고 부름직하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는데 있어서 정부에 경제학자들이 없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일본의 경제 관료들은 대부분 법대 출신이었다. 타이완과 중국에서 주요 경제 관료 자리에 경제학 전공자가 아닌 공학이나 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차지했다. 한국 역시 1980년대 이전에는 경제 관료 중 법대 출신의 비율이 높았다. 1970년대 한국의 중화학공업 육성 프로그램의 운영에서 두뇌 역할을 한 오원철은 공대출신이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험에 관한 한 가지 해석은 경제 정책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학 전문 지식이 아니라 전반적인 지적 능력이라는 점이다. 대학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경제학은 현실과 동떨어져서 실용성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경제 정책 입안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보다 그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분야를 전공한 사람이 가장 유능한 경제 정책 입안자가 될 확률이 크다는 말이 된다. 그것이 법학이든 공학이든 심지어 경제학이든 가장 인기 있는 분야에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는 경제학 전공자들, 경제학 분야에서 고도의 훈련을 받은 경제학자들이 경제 정책을 운영했지만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훨씬 열등한 경제 실적을 올렸다는 사실은 위의 추론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인도와 파키스탄에도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이 많았으나 이 두 나라의 경제 실적은 동아시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경제학은 실제 경제 운용과 큰 관계가 없어 보인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오히려 경제학이 경제에 해롭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들이 많이 있다.
p.320 ● 왜 아무도 이런 일을 예상 못했지요?
2008년 11월 영국 여왕이 런던 경제 대학(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을 방문했다. 당시 전 세계를 삼켜버린 금융 위기에 관해 경제학자에게 물었다. “왜 아무도 이런 일을 예상 못했지요?” 2008년 가을 모든 사람이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과거 20년 동안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비롯하여 금융 전문가, 명문 대학 출신의 유능한 투자 은행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세계 경제는 잘 돌아가고 있다는 소리를 되풀이해서 말하였다. 경제학자들이 드디어 빠른 성장과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도하는 마법의 공식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여왕의 질문에 관한 소식을 들은 영국 아카데미는 학계, 금융계, 정부 부처에서 최고로 꼽히는 경제학자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이 회의 결과를 정리한 편지는 2009년 7월 22일 여왕에게 전달되었다.
편지의 내용은 “경제학자들 개개인은 유능하고, 나름대로 자기가 맡은 일은 잘 해내고들 있었지만 금융 위기 직전에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세계적으로 수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집단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시스템 전체에 끼치는 리스크를 이해하는데 실패했다.”고 반성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줄곧 말해온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자유 시장이 제일 좋은 이유는 우리가 이성적이고 개인적이어서 각자 원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밖에 모르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얻는 방법을 아는 것도 본인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2008년 위기를 불러온 환경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사실 그들은 1982년 제3세계 채무위기, 1995년 멕시코 페소 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1998년 러시아 위기 등 1980년대 초 이후 크고 작은 수십 개의 금융 위기에도 책임이 있다. 금융 규제 철폐와 무제한적 단기 이윤 추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준 것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더 넓게 생각하면 그들은 경제 성장의 둔화, 고용 불안과 불평등 악화, 그리고 지난 30년간 전 세계를 괴롭혀 온 잦은 금융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주장해 왔다.
부자 나라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기술의 위력을 과대평가하도록 유도했고,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현상을 모르는 체하도록 했고, 탈산업화 현상에 안주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그들은 점점 심화되는 불평등, 지나친 경영자들의 높은 보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극심한 빈곤 등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의 본성과 각자 생산 기여도에 따라 보상받을 필요성을 감안할 때 모두 피할 수 없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다시 말해 경제학은 그저 실생활에서 동떨어진 것 이상의 우를 범한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이 한 짓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해를 끼쳤다.
p.323 ● '다른‘ 종류의 경제학자들은?
필자가 경제학을 계속하는 이유는 경제학이 불필요하거나 해악을 끼치는 학문으로 머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험한 것은 지난 30여 년 동안 세상을 풍미해온 자유 시장 경제학이라는 특정 부류의 경제학일 뿐이다. 역사 전반에 걸쳐 경제를 발전시키고 더 잘 운용하는데 도움을 준 여러 경제학파들이 존재한다.
2008년 세계 경제를 총체적 붕괴에서 구해 낸 것은 케인스, 금융위기에 관해 저명한 찰스 킨들버거와 하이먼 민스키 등의 경제학이다. 이번에 대공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이들의 통찰을 배워 주요 금융 기관에 구제 금융을 지원하고, 정부 지출을 늘리고, 예금보험을 강화하고, 실직자의 소득을 보조하는 복지정책을 사용하고, 대규모의 유동성을 금융 시장에 쏟아 부은 덕분이다. 이 대책 중 많은 부분은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한사코 반대해 왔던 정책들이다.
1970년대까지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관료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학적 지식은 자유 시장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들은 마르크스, 리스트, 슘피터, 칼도, 허시먼 등의 경제학을 알고 있고 있었다. 물론 이 경제학자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제학적 문제를 가지고 고심했고 극우파(리스트)에서부터 극좌파(마르크스)까지 정치적 견해도 다양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장기 투자와 생산 구조를 바꾸는 기술혁신이지, 풍선을 부풀리듯 이미 존재하는 구조를 팽창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치산업을 보호하고, 기술적으로 정체된 농업과 같은 산업분야에서 보다 역동적인 산업분야로 자원을 강제 이전하는 한편, 허시먼이 강조하던 서로 다른 부문 간의 연계 효과를 활용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유 시장 경제학에서 따온 것이 아니다.
허버트 사이몬과 그를 따르는 경제학자들은 우리 경제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완전히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졌다는 신화를 깨버렸다. 인간은 늘 합리적이지만은 않으며, 다양한 행동 동기를 가진 개인들이 모여 시장, 기업, 정부, 네트워크 등을 통해 복잡한 조직을 이루고 사는 것이 현대 경제라고 본다. 성공한 기업, 정부, 개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자유 시장 경제학과는 달리, 이들은 자본주의의 세세하고 미묘한 차이를 놓치지 않고 있다.
자유 시장 경제학의 기초를 제공하면서 현재 경제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학 안에서조차 자유 시장 내에서 왜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없는지에 관한 이론들이 많다. 피구, 센, 보몰, 스티글리츠 등이 발전시킨 ‘시장 실패 이론’ 혹은 ‘후생 경제학’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다른’ 경제학자들을 아예 무시한다. 요즘 널리 쓰이는 경제학 교과서들을 보면, ‘시장 실패론’을 이야기하는 경제학자들을 제외한 다른 경제학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이론을 설명하기는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에 걸쳐 벌어진 경제 현상들을 보면 지유 시장 경제학보다 이들 다른 경제학자에게서 배울 점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학은 쓸모없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올바른 경제학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결론: 세계 경제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지금 우리의 당면 과제는 세계 경제를 완전히 새롭게 재건하는 것이다. 현재의 경제 상황이 1930년대의 대공황 때보다 나은 이유는 정부가 엄청난 재정 적자와 사상 유례없는 통화량 확대로 수요를 진작시켰고, 예금 보험을 확대해서 집단적인 예금 인출 사태를 막고 상당수의 금융 기관에 구제 금융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1930년대보다 훨씬 더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경험했을 것이다.
자유 시장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현 시스템을 적당히 보수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금융기관의 투명성을 조금 더 높이고, 조금 더 규제하고, 지나치게 높은 경영자 보수에 약간 제한을 가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동안 경제와 사회를 조직해 온 방식을 그냥 수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는 우리의 경제 시스템을 재설계한다고 할 때 명심해야 할 8가지 원칙만 짚고 넘어가려 한다.
p.328 ①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나쁜 경제 시스템이다. 이윤 동기는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연료이며, 우리는 이런 이윤 동기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 동안 배운 것은 이윤 동기에 어느 정도 규제를 가하는 것이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시장메커니즘은 무수한 경제 주체들을 상호 조정하도록 하는 데에 특히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다. 시장은 메커니즘 혹은 기계에 불과함으로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세심한 규제와 조정을 필요로 한다. 같은 자동차라도 취객이 운전하면 살인무기가 되지만 응급 환자를 병원에 이송하면 사람의 목숨을 구하듯이 시장은 엄청나게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일을 할 수도 있다. 또 성능이 개선된 브레이크를 장착하거나 더 효율적인 연료를 사용함으로써 자동차의 품질을 개선할 수 있듯이, 시장도 참여자들의 태도와 동기 그리고 시장을 지배하는 규정을 적절하게 변화시킴으로써 더 잘 돌아갈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를 운용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그 중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며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경제 성장을 늦추고, 불평등과 불안정을 고조시켰으며, 금융 위기를 더욱 빈번하게 초래했다.
모두에게 맞는 유일한 경제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식, 스칸디나비아식, 독일식, 프랑스식, 일본식 자본주의가 각각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과 같은 심한 불평등을 용납할 수 없는 나라는 스웨덴처럼 고율의 누진세로 재정을 마련하여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도 있고. 일본과 같이 대형 마트 개점을 까다롭게 하는 등 돈 벌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다. 이 두 방법 중 어느 것이 객관적으로 낫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하되,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아닌, 더 잘 규제된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
p.330 ② 인간의 합리성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는 인식 위에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2008년 경제 위기는 우리가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복잡한 세상(특히 금융 부문에서)을 만들어 버린 탓에 일어난 것이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이 붕괴한 것은 복잡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의 조정에 따라 시스템이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투명성만 높이면 대규모 금융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투명성이 높기로 유명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1990년대 초반 금융 위기를 겪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투명성만으로는 안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의 정보 처리 능력의 부족이다. 이른바 ‘금융 혁신’이 계속 무제한으로 허용된다면 우리의 규제 능력은 끝까지 우리의 혁신 능력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와 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고자 한다면, 장기적으로 사회에 이롭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복잡한 금융 상품의 발행을 금지해야 한다. 식품, 약품, 자동차, 비행기 같은 상품을 출시하려면 안전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새로운 금융 상품을 개발하면, 그 상품이 금융 회사의 단기적 이윤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 전체에 장기적으로 어떤 위험과 이익을 미치는지 평가한 뒤에 출시를 허용하는 승인 절차를 만들 필요가 있다.
p.331 ③ 인간이 이기심 없는 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나쁜 면보다 좋은 면을 발휘하게 하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착한’일을 하게 하려면 금전적 보상을 하거나 벌칙으로 위협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이 믿음이 비대칭적으로 적용되어 부자는 더 많은 금전적 보상이 약속되어야 더 열심히 일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될 것을 두려워해야 더 열심히 일한다는 이상한 주장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물질적 자기 이익 추구가 인간 행동의 강력한 동기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는 물질적 자기 이익이 유일한 행동 동기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 이다. 자유 시장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만큼 인간은 물질적 자기 이익만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는 아니다. 만약 이 세상이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들로 넘쳐 난다면 이 세상은 끊임없는 사기, 감시, 처벌, 협상 때문에 망했을 것이다.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물질적 부를 중요시하되 유일한 목표가 되지 않는 경제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 또 기업이든 정부이든 모든 조직은 구성원들 간의 신뢰, 상호 연대, 정직성, 협동 등을 장려하는 형태로 설계되어야 한다. 그리고 금융 시스템 개혁을 통해 기업에서 단기 주주의 영향력을 줄이고, 기업들이 단기 이윤 극대화외의 다른 목표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에 더해 우리는 공익적 행동(에너지 소비 절감, 노동자 훈련에의 투자 등)들에 정부 보조금뿐만 아니라 보다 높은 사회적 중요성을 부여하여 더 많이 보상해야 한다. 이것은 도덕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단기 이익만을 생각하면 전체 시스템을 파괴하여 장기적 이익을 잃게 되는 것이다.
p.332 ④ 사람들이 항상 ‘받아 마땅한’ 만큼 보수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개개인으로 따지면 부자 나라 국민들보다 더 생산적이고 기업가 정신이 더 뛰어난 경우가 흔하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부자나라의 이민정책 때문에 부자나라에 가서 일하며 높은 임금을 받지 못한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개인적 자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기 나라의 경제 시스템과 선진국의 이민 정책 때문이다.
기회의 평등만 보장되면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은 마땅한 말이 아니다. 어느 정도 결과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특히 모든 아이가 최소한의 영양과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면, 시장이 제공하는 기회의 평등 정도로는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을 보장할 수 없다. 이는 100m 달리기에서 누구도 먼저 출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주자들은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메고 달리는 것과 같다.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는 1950년에서 현재까지 최소한 10배는 증가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CEO들의 평균 보수는 노동자 평균 임금의 35배였는데, 오늘날에는 300~400배에 이른다. 미국 경영자들은 네덜란드 경영자보다 2.5배, 일본 경영자들보다 4배 많은 보수를 받고 있지만, 미국 경영자들의 생산성이 네덜란드나 일본 경영자들의 생산성보다 높다는 증거는 없다.
우리는 주식회사 경영자들의 천문학적 보수를 제한하기 위해 주식시장과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능력위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어느 정도 동등한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실업 수당과 공적 보조금으로 지원되는 재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재기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시장의 결과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p.334 ⑤ '물건 만들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탈산업화 지식 사회는 신화에 불과하고, 제조업은 지금도 경제에 필수적이다. 특히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는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제조업 쇠퇴는 탈산업화 시대에 불가피한 현상으로 간주되어 왔고, 탈산업화의 성공 사례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지식 경제라는 개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결국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로서 아이다어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사실 대다수의 나라들이 점점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옛날보다 물건을 덜 소비한다고 느끼는 것은 제조업체들의 생산성이 대단히 향상되어 서비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조업 제품이 싸졌기 때문이다. 즉 가계 소득 중에서 제조업 제품의 구입비용의 비율이 낮아진 것이다.
흔히 탈산업화의 성공 사례로 간주되는 스위스와 싱가포르 등은 사실은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나라에 속한다. 더욱이 대다수의 고부가가치 서비스들(금융, 기술 컨설팅)은 제조업 부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서비스는 교역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서비스 부문의 비중이 높은 국가는 국제수지 기반이 약화되면서 결국 성장을 유지하기 어렵다.
(기계 투자에 대한 가속 감가상각 등) 세제를 바꾸고, (노동자 교육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며, (사회간접 자본 투자 같은) 공공 투자 등의 정책수단을 통해 기계, 사회 간접 자본, 노동자 교육처럼 ‘재미없는’ 부문에 대한 투자를 늘릴 필요가 있다. 산업 정책 역시 생산성을 증대할 여지가 많은 핵심 제조업 부문을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p.336 ⑥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이 더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대 경제가 생산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건강한 금융 산업이 필수적이다. 금융 부문이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투자 시점과 투자의 결실이 나타나는 시차를 메워주는 것이다. 금융은 그 속성상 빨리 움직일 수 없는 실물 자산에 유동성을 부여함으로써 자원을 신속하게 재배분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 동안 금융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버렸다. 금융 자유화로 돈의 이동이 쉬워졌고, 심지어 국경도 손쉽게 넘나들 수 있게 되면서 금융 투자자들은 더 참을성이 없어져 즉각적인 이윤을 원하게 되었다. 금융 투자자들은 돈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을 정부와 기업에 대한 협상카드로 활용해서 국민소득의 더 많은 부분을 금융 소득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금융을 더 불안정하게 하고 고용불안 또한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금융 부문은 속도를 늦춰야 한다. 실물 부문과 금융 부문 간 속도 차를 크게 줄이지 못하면 장기 투자의 확대나 실질적인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없다. 생산적 투자가 결실을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본 자동차 산업이 성공을 거두기까지 40여 년에 걸친 정부의 국내 시장 보호와 보조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전자 산업 부문의 노키아도 이윤을 내기까지 17년이 걸렸다. 그러나 금융 자유화의 폭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세상은 점점 더 짧은 시간을 단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금융 거래세,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 이동에 대한 제한, 기업 인수 합병에 대한 규제 강화 등은 금융 산업의 속도를 늦춰서 금융이 실물 경제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도록 만드는 정책이다.
p.337 ⑦ 더 크고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는 정부가 사회 병폐의 해결사가 아니라 병폐의 일부라고 끊임없이 주장해왔다. 시장 실패와 기업 실패처럼 정부실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정부가 눈부신 성공을 거둔 사례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자유 시장주의를 철저하게 신봉하는 미국에서도 정부 개입이 많이 늘었지만, 이는 주로 위기관리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풍요롭고 평등하며 안정적인 사회를 건설하는데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고안된 제도 중에서 민주주의 정부가 사회적인 여러 상충된 요구들을 조정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가장 우수한 장치이다. 정부의 장점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항상 주장하는 성장과 형평 간의 상충 논리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즉 정부는 형평을 추구하면서도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자들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분하는 큰 정부는 경제 성장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 왔다. 부자들은 부를 창출하려는 의욕을 잃고,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우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은 정부가 성장에 이롭다면 그런 정부를 가진 상당수의 개발도상국들은 잘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거대한 복지 국가와 높은 경제 성장률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는 작은 정부가 항상 성장에 이롭다는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또 적극적인 정부는 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오늘날 부유해진 나라들은 모두 정부가 경제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개입 정책을 구사했다. 정부 개입은 제대로 계획되고 추진되기만 하면 경제를 더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연구개발, 노동자 훈련 등 시장이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사회적 수익은 높지만 사적인 수익은 높지 않은 사업의 위험을 분담하며, 특히 후진국의 ‘유치’산업 부문의 신생 기업들이 생산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 우리는 더욱 활력이 넘치고 안정적이며 더 평등한 경제 시스템에서 정부가 어떻게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는지를 더 창조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더 좋은 복지 국가, 특히 금융에 대한 더 나은 규제 시스템, 더 우월한 산업 정책 등이 필요하다.
p.339 ⑧ 세계 경제 시스템은 개발도상국을 ‘불공평하게’ 우대해야 한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에서는 민주주의의 제약 때문에 완전히 자유 시장주의에 맞는 개혁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마가릿 대처 총리조차 영국의 국가의료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정들로 인해서 자유 시장 정책의 실험이 이뤄진 곳은 주로 개발도상국들이었다.
따라서 세계 경제 시스템은 개발도상국들이 자국에 적합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책 공간’을 넓혀 주는 방향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특히 자국 시장보호, 외국인 투자 규제, 지적 재산권 등에서 개발도상국에 더 관대한 체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WTO의 개혁과 빈국과 부국 간의 무역 및 투자 협정의 폐지나 개정이 필요하다. 또한 국제기구로부터 대출을 받거나 부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때 첨가되는 조건들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이런 제안들은 일부 선진국들이 주장하듯이 개발도상국들에게 ‘부당하게 유리한’ 것이다. 그러나 개발도상국들이 이미 국제 관계에서 수많은 불이익을 당하는 마당에 이 정도의 ‘봐주기’ 시스템은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여덟 가지 원칙들은 모두 지난 30년 동안의 경제적 통념들과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세계를 퇴보시키고 재앙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던 원칙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비슷한 대참사를 반복함은 물론 빈곤과 불안으로 고통 받는 수십억 인구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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